ESG 선풍 속 노동(L)이 제대로 자리잡을 곳
ESG(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약자. 기업이 지속가능한 비즈니스를 달성하기 위해 갖춰야 할 3가지 핵심요소)가 화제다.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건 L-ESG라고 해서 노동(labor)의 측면에서 ESG를 바라보려는 움직임이다. 노동운동을 했던 활동가나 연구자가 나서는가 하면 언론이나 대학까지 가세해 불을 붙이고 있다. L-ESG로 돈벌이에 나서는 회사나 연구원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L-ESG에 관한 세미나도 한 달이 멀다 하고 열린다. 가마솥에 팥죽 끓듯 뒤늦게 열린 잔치판이다.
L-ESG는 공통으로 “ESG가 E(환경)를 강조하면서 S(사회), 특히 노동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L-ESG는 ESG 공시기준이 강화되는 움직임을 지렛대 삼아 노동기준을 높이는 한편 그 이행을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ESG의 움직임에서 눈에 띄는 지점은 ESG 정보의 공개가 자율공시에서 법정공시로 바뀌고 ESG 와싱(거짓정보공개)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유럽연합(EU)은 올 1월부터 기업의 지속가능 공시기준(CSRD)을 적용한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ESG와 관련된 정보에 더해 2025년까지 스코프 3 배출량, 기업 자체의 노동자 및 공급망에 속하는 노동자의 노동조건, 생물 다양성,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정보를 공시해야 한다. 국제적으로는 2023년 6월, 국제회계기준위원회(IFRS)가 지속가능성 및 기후 관련 공시를 위한 글로벌 표준 최종안을 발표했다.
우리나라도 자산 2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에 대해 2026년 이후부터 ESG 공시를 의무화하고 2030년부터는 코스피 상장사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다. 나라 안팎에서 기업의 이윤과 사회적 책임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L-ESG, 기후위기 해결과 노동권 강화를 통합적으로 파악해야
길지 않은 글이니만치 두 가지만 질문하면 이렇다. 하나가 “ESG에서 노동을 따로 분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또 다른 하나는 “L-ESG가 노사협조주의 노선을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이다. 앞의 질문이 “노동이 협소한 자기 이해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라면 뒤의 질문은 “노동이 자본주의 체제의 전환에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는가”라는 우려를 드러낸다.
먼저 ESG에서 노동(L)은 사회(S)의 한 부문으로서 일터에서 인권과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고 일터 민주주의와 노동시장에서의 불평등 해소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노동은 ESG에 전략적으로 개입해 노동을 존중하는 ESG 생태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최근 국제노동기구(ILO)의 기본협약으로 추가된 산업안전보건과 여성이나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와 차별 금지는 ESG에서도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노동(L)은 환경(E)이나 지배구조(G)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지향을 갖는다. L-ESG에 관한 최근의 논의가 일반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L-ESG가 추구하는 노동중심주의는 자칫 노동을 ‘그들만의 리그’에 가둠으로써 노동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다. 사회적 의제를 외면한 채 자신의 가치를 배타적으로 추구한다면 L-ESG가 지향하는 지속가능한 사회란 결국 노동자의 자기 이해를 지키기 위한 포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ESG를 E(환경)와 S(사회), G(지배구조)로 따로 떼어놓을 것이 아니라 뭉뚱그려 다가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를 들어 거버넌스(G)를 토대로 삼아 기후위기의 해결(E)과 노동의 가치실현(S)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노동은 한편으로는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희생과 피해가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되지 않게 함으로써 사회정의를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권의 강화를 통해 노동이 기후위기 해결의 주체로 나서는 것을 말한다.
물론 지속가능한 사회가 기후위기의 해결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양극화나 저출산·고령화, AI(인공지능)로 대표되는 디지털 전환, 부채위기 등도 간과할 수 없는 사회적 의제들이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짧은 기간에 하나의 최고 이슈로 등장한, 따라서 대응에 필요한 논리적 바탕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중차대한 도전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ESG에서 E를 첫머리에 놓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다.
자본 의존이 아닌 노동 주체의 ESG를
노동이 추구하는 ESG, 즉 L-ESG가 체제유지에 봉사하는 노사협조주의 노선에 빠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L-ESG가 자신의 행보를 어디로 잡는가에 따라 자신의 미래는 물론 노동운동이나 기후위기의 해결에도 영향을 미친다.
원래 ESG는 ESG 금융을 말하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본투자의 리스크를 줄이는 전략에서 비롯됐다. ESG는 기업에게 비교 가능한 ESG 관련 리스크와 정보를 투명하게 공시하도록 강제한다. 그리하여 책임 투자자를 비롯한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기업가치를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합리적인 투자를 결정하도록 유도한다. 기업으로서는 투자를 유치하고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지표의 개선에 노력한다. 투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개별 자본의 전략이 지속가능한 사회를 지향하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L-ESG가 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기업가치의 극대화를 노동자의 안정적인 고용 및 근로조건 개선의 토대로 여긴다면 노사협조주의 노선은 불가피하다. 노동기준의 상향이 노사갈등을 줄여 노사 양측에 도움이 된다고 호소하는, 이른바 ‘노동과 자본의 따뜻한 동행’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ESG 공시기준에서 노동기준을 상향하거나 ESG의 이행을 촉구하는 움직임도 결국은 자본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기업별 노조 체계와 그 지배적 이념인 경제주의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다.
노동은 전통적으로 단체교섭이나 파업 같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전략을 통해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불평등과 차별을 줄여왔다. 노사 간 협력이나 동의는 부분적이고 불확실한 바탕 위에서 구축될 뿐이다. ESG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중화하려는 노력을 자본의 온정주의에 맡겨둘 게 아니라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사회전환에 나설 필요가 있다. 노동은 기업 권력과 그 정치적 동맹세력을 압박하면서 ESG 공시기준을 강화하고 그 이행을 강제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면서 자본주의를 길들여 왔다.
결론적으로 L-ESG는 노동참여의 거버넌스를 바탕으로 기후와 노동인권을 균형 있게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것은 노동이 주체가 되어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투쟁이다. 그리하여 L-ESG는 “정의의 실현과 함께 전환을 도모하는” 정의로운 전환에 닿는다. 전환을 기후위기에 따른 전환으로 좁혀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정의로운 전환이 노사협조주의,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은 노동을 주체로 세우는, ‘좌도 우도 아닌’ 아래로부터의 전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