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 최초, 여당의 예산 발목잡기…'이상민 지키기' 올인
국힘, 상임위 예산 증액 핑계로 예결위 심의 거부
"이상민 해임안→민생 외면"이라는 '기적의 무논리'
양보할 수 없는 '윤석열표 예산' vs '이재명표 예산'
합의 불발 가능성 높아…민주 '단독 감액예산' 계획
통상적인 예산 국회의 모습은 이렇다. 여당은 어떻게든 법정 기일 내에 통과시키려고 하고 야당은 요구 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법정 기일이고 뭐고 막무가내로 나온다. 그 과정에서 야당은 더 깎으려 하고, 여당은 조금이라도 덜 깎으려 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어느 날 새벽에 각당 원내대표가 악수하는 사진과 함께 합의문이 나와 예산이 처리된다.
그런데 이번 2023년 예산 국회는 여당이 예결위 소위 심의를 거부하고, “이상민 해임안을 추진하면 예산 합의도 없다”며 있는 힘껏 버티고 있다. 여당이 예산과 무관한 사안을 걸어 예산을 발목잡는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힘, ‘상임위 예산 증액’ 핑계로 예결위 심의 거부
여야 양당 정책위의장과 예결위 간사 간의 2+2 협상이 진행되고 있고, 여기에 원내대표가 추가된 3+3 협상으로 전환될 예정이지만 국민의힘이 ‘이상민 지키기’ 올인 노선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예산안 처리 마지노선으로 정한 9일까지 여야 합의의 예산안이 도출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국민의힘은 11월 25일 시작된 예결위 계수조정소위를 28일 들어 갑자기 거부하고 심의에 불참했다. 이유는 “민주당이 행정안전위와 국토위에서 정부 동의 없이 예산을 증액시킨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었지만 상임위의 예산 증액안은 ‘예비안’으로 정부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바로 예결위 소위에서 심의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불법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11월 24일 이태원참사 국정조사위원회가 구성된 바로 다음 날, 대통령실은 국조 대상에 대검을 포함시킨 것에 반발했고, 국민의힘은 국조위 구성 하룻만에 합의를 번복하며 “대검 제외”를 주장했다. 민주당이 “대검 마약 수사 부분으로 국한”하는 것으로 물러섰지만, 국민의힘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상민 해임·탄핵안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상민 해임안→민생외면”이라는 ’기적의 무논리‘
예결위 소위 심의 거부는 국힘 지도부의 “이상민 해임안 제출하면 예산 합의도 없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상민 해임안을 추진하면 예산 합의는 불가능하고, 이는 곧 민생을 내팽개치는 것이므로, 이것은 민주당이 ’이재명 지키기‘로 민생을 외면하는 것”이라는 뒤죽박죽의 무논리로 연일 민주당을 비난하며 ’심의 거부‘를 이어갔다. 그런 예산 방치 상태가 꼬박 5일이나 이어져 아무 것도 못한 채 빈 손으로 법정 처리 기한인 2일을 맞게된 것이다.
2일 본회의 무산 후 시작된 2+2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국민의힘은 정진석 비대위원장, 주호영 원내대표, 대변인 등 가릴 것 없이 연일 “이상민 해임안→예산합의 불가→민생 외면→이재명 지키기”라는 ’기적의 무논리‘를 반복하며 민주당을 비난하는 데만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양보할 수 없는 ’윤석열표 예산‘ vs ’이재명표 예산‘
9일까지 2+2, 3+3, 원내대표 간 담판 등 협상을 이어가는 모양새는 계속 취하겠지만, 이상민 해임안이 아니더라도 이런 협상 과정을 통해 예산안이 합의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국힘은 이상민 지키기 외에 “윤석열표 예산 고수, 이재명표 예산 절대 불가”를 또 하나의 대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대통령실 이전 관련 예산과 경찰국, 검찰, 감사원 등 ’시행령 통치‘에 의한 권력기관 예산 등 ’윤석열표 예산‘을 삭감하고 지역화폐와 임대주택 예산 등의 ’민생 예산‘ 대폭 증액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주당은 정부와 여당이 ’민생 예산‘ 증액에 동의하면 ’윤석열표 예산‘ 삭감은 양보할 수도 있어 보이지만, 여당은 지역화폐 예산 등이 ’이재명표 예산‘이라며 ’윤석열표 예산 고수와 이재명표 예산 절대 불가‘ 입장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태세다.
합의 불발 가능성 높아…민주 ’단독 감액예산‘ 계획
예산안을 조금이라도 덜 삭감된 채 최대한 빠른 기일 안에 통과시키기 위해 간도 쓸개도 다 빼놓아도 시원찮을 여당이 “합의 안 되면 준예산으로 간다”는 배수진을 치면서 요지부동으로 버티는 이유는 뭘까?
윤석열 대통령이 “협상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 내는 정치 과정”에 전면적인 혐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예산으로 갈지언정 양보는 하지 말라”는 가이드라인이 여당을 옥죄고 있는 것이고, 이에 따라 여당은 모양만 협상을 벌일 뿐 대통령실의 가이드라인에서 한 발도 물러날 수가 없는 것이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5일 비대위 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원내대표끼리의 정치적 결단, 정무적 결단 이런 것들이 필요한 시기가 다가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주 원내대표 차원에서의 결단을 점치는 전망도 있지만, 국회 운영위 대통령실 국감 당시 김은혜·강승규 수석 퇴장과 이태원 국정조사 합의로 대통령실로부터 2연타를 당한 주호영 원내대표가 대통령실의 뜻에 어긋나는 합의를 하거나, 대통령실을 설득해 합의를 이끌어낼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민주당은 임대주택과 지역화폐 등 민생 예산 증액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두고 있지만, 끝내 합의가 불발될 경우 증액은 포기한 채 삭감만을 반영한 ‘감액 예산안’을 단독으로 제출해 통과시킬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