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MM 10조 유보금 눈독 들였다가 헛물켠 하림

HMM 인수 협상 진통 끝에 최종 결렬

국적 해운사 공적 기능 외면이 원인

매각 측 “해운업 발전에 써야 할 자금”

하림 “과도한 경영권 개입 수용 불가”

“자금력 풍부한 인수 기업 다시 물색”

2024-02-07     장박원 에디터

국내 최대 해운사인 HMM(옛 현대상선)을 인수하려고 했던 하림의 시도가 무산됐다. 매각 측인 산업은행(산은)과 한국해양진흥공사(해진공)는 7일 자정 무렵 “일부 사항에 대한 이견으로 (우선협상대상자인 하림과의) 협상이 최종 결렬됐다”고 밝혔다. 양측의 협상은 지난달 23일까지 마감 시한이었으나 이달 6일로 한 차례 연장된 바 있다. 매각이 무산되며 HMM은 당분간 산업은행 등 채권단 관리체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하림지주 익산 본사 신사옥 [하림지주 제공] 연합뉴스 

이번 일은 국적 해운사의 공적 역할을 무시하고 금융 논리만으로는 HMM 매각이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해운업계와 HMM 노동조합은 매각 협상이 최종 불발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평가했다. 자금력이 부족한 하림이 인수했다가 HMM과 하림그룹이 모두 위험 처하는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지난 2016년 한진해운 파산 때 쪼그라들었던 한국 해운산업은 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산은과 해진공은 지난해 12월 18일 HMM 인수를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하림을 선정했다. 예비입찰에는 LX인터내셔널과 동원산업, 하림-JK파트너스 컨소시엄, 세계 5위 해운사인 독일 하팍로이드 등이 참여했다. 국적 해운사를 외국 기업에 넘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고 하팍로이드는 적격 인수 후보에서 제외됐다.

본입찰에서는 하림과 동원그룹 양파전을 펼쳤는데 하림이 동원보다 2000억 원가량 많은 6조 4000억 원을 써내면서 우선협상대상자로 낙점됐다. 그러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회의론이 제기됐다.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격”이라 불안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 집계 기준으로 하림은 재계 27위이고 HMM은 19위였다. 자산 규모도 HMM이 25조 8000억 원으로 하림보다 9조 원 가까이 많았다.

더 큰 문제는 하림이 과연 6조 원이 넘는 인수자금을 조달할 능력이 되느냐는 점이었다. 하림은 해운 계열사인 팬오션의 유상증자로 3조 원을 마련하고 2조 원의 인수 금융과 JKL파트너스의 지원, 영구채 발행과 자산유동화 등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팬오션 유상증자부터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왔다. 팬오션이 아무리 우량한 기업이라 해도 시가총액보다 많은 금액의 유상증자는 무리라는 이야기다.

해운 경기의 사이클이 하락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시장이 불안한 상황에서 HMM의 안정된 경영을 위해선 하림이 인수한 뒤 장기간 지분을 보유해야 했다. 이는 산은과 해진공이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었다. 그러나 하림은 이 조건을 수용할 형편이 안 됐다. 인수자금을 댄 사모펀드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차익을 실현한 뒤 투자금을 회수해야 한다. 하림이 컨소시엄으로 함께 참여한 JKL파트너스의 지분 매각 기한에 예외를 적용할 것을 요구했던 이유다.

인수 기업의 자금력 부족은 HMM 경쟁력을 높이는 데 불리할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세계적인 해운업체들은 불황에 대비해 판을 다시 짜고 있다. 세계 2위 해운사 머스크는 하팍로이드와 내년 2월부터 ‘제미니 협력’이라는 새로운 해운 동맹을 창설하기로 했다. 하팍로이드는 HMM이 소속된 해운 동맹인 ‘디얼라이언스’의 일원이다. 하팍로이드는 디얼라이언스를 주도했던 해운사다. 이런 회사가 빠지면 디얼라이언스 경쟁력 하락은 불가피하다. HMM도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산은과 해진공은 협상 과정에서 HMM이 보유한 10조 원이 넘는 유보금을 해운산업 발전이 아닌 다른 곳에 쓰이지 않도록 할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HMM은 2016년 유동성 위기로 채권단 관리체제에 들어갔고 2020년 9년 만에 적자 탈출에 성공했다. 2022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물류 수요가 폭증한 덕에 매출 18조 5868억 원, 영업이익 9조 9455억 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이는 10조 원 이상의 유보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됐다. 공적 자금 투입으로 조성된 자금인 만큼 국가 해운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것이 정부와 산은, 해진공의 입장이다. 주주 간 계약에 HMM의 현금배당 제한과 일정 기간 지분 매각 금지, 정부 측 사외이사 지명 권한 등의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HMM 실적 추이와 하림과의 자산 비교. 연합뉴스

하지만 하림은 이런 요구가 과도한 경영 개입이라고 반박했다. 무늬만 대주주일 뿐 실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인수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주주 간 계약의 유효기간을 줄이고 재무적투자자의 자금 회수를 보장하기 위해 사모펀드 지분 매각 기한을 예외로 적용해야 한다는 요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운산업의 공공성을 자금력이 빈약한 기업에 일임하는 것은 위험이 컸다. 산은과 해진공은 하림 측의 요구를 거절했고 결국 인수 협상은 최종 결렬됐다.

해운업계는 하림의 인수 시도가 처음부터 무리였다고 보고 있다. HMM 정상화와 해운업 발전을 위해선 하림보다 자금동원력이 풍부한 대기업이 인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종 협상이 불발된 직후인 7일 HMM 양대 노조도 환영의 뜻을 밝혔다. HMM 해원연합노조(선원 노조)와 전국사무금융노조 HMM 지부(육상 노조)는 “하림 측의 인수자금 조달계획이 충분치 않고 재무적 안정성이 결여됐다”며 “이번 매각 무산은 실패가 아닌 대한민국 대표 국적선사의 민영화 지배구조 계획수립의 중요성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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