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ELS 판매 중단…“고객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홍콩ELS 손실률 53%…5대 은행 이익 7천억
“H지수 반등 없으면 올해 손실 6조~7조 예상”
금융당국은 뒤늦게 “불완전판매 엄중 대응”
판매 중단은 땜질 처방…“사전 감시가 중요”
은행들이 고위험 상품인 주가연계증권(ELS) 판매를 중단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지난 2021년 판매한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 추종 ELS 상품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고 금융당국이 불완전판매 조사를 벌이자 뒷북 대응에 나선 것이다.
올해 들어 5대 은행이 판매한 홍콩 H지수 기초 ELS 상품 중에 올해 들어 2일까지 만기 도래액은 약 7000억 원인데 고객이 돌려받은 돈은 3300억 원에 불과하다. 평균 손실률이 53%를 넘는다. 잘못된 투자 권유로 고객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데도 지난 3년간 5대 은행이 ELS 판매 수수료로 챙긴 이익은 수천억 원에 달한다. 은행의 ELS 판매 중단이 “고객 소를 팔아 이익 내고 외양간 고치는 셈”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KB국민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 등 5대 은행이 2021년부터 2023년 3분기까지 ELS 판매 수수료를 통해 얻은 누적 이익은 6815억 7000만 원으로 집계됐다고 연합뉴스가 5일 전했다. H지수가 1만 2000을 넘어 최고점을 찍은 2021년 ELS 투자가 급증하며 2806억 9000만 원의 이익을 냈고, 2022년과 지난해 3분기까지 각각 1996억 9000만 원과 211억 90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은행들은 ELS 상품 중에 증권사가 설계해 발행한 ELS를 가져와 만든 신탁(ELT)이나 주가연계펀드(ELF)를 팔았다. ELT는 통상 판매액의 1%, ELF는 0.7~0.9%의 수수료를 은행이 받는데 은행들은 수익성이 높은 ELF 판매에 주력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은행들이 홍콩 ELS 투자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수수료 장사에 매달리는 동안 은행 권유로 이 상품에 투자한 고객은 전전긍긍해야 했다. 반토막 이하로 하락한 H지수가 회복되지 않으면 손실이 확정되기 때문이다. 고객들의 불길한 예상은 올해 들어 현실이 되고 있다. H지수가 최고점 대비 절반 이하인 5000선에 머물며 손실이 확정된 상품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5대 은행이 판매한 H지수 추종 ELS 상품 가운데 올해 들어 지난 2일까지 만기가 돌아온 것은 모두 7061억 원이다. 이중 고객이 돌려받은 금액은 3313억 원으로 평균 손실률이 53.1%에 이른다. H지수가 5000 아래로 떨어졌던 지난달 말 만기 도래했던 일부 ELS 상품은 손실률이 60%에 달했다.
문제는 중국 경제 침체로 H지수 반등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만기를 앞둔 홍콩 ELS 상품이 많다는 사실이다. 올해 상반기에만 10조 원이 넘고 연말까지 15조 4000억 원에 달한다. H지수가 6000~7000선 이상으로 반등하지 못하고 현재 추세가 그대로 유지되면 전체 손실액은 6조~7조 원까지 불어날 수 있다. 손실을 보는 고객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분쟁조정과 민원 신청 건수가 지난 2일 기준으로 무려 3000여 건에 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금융당국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불완전판매 조사에 들어갔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5일 열린 ‘2024년 금감원 업무계획 브리핑’에서 ELS 불완전판매가 사실로 드러나면 엄중하게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불완전판매로 고객에 손실을 끼치는 등 금융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금융사에 대해선 시장에서 퇴출하는 방안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원장은 “확인된 H지수 ELS 불완전판매에 대해서는 엄정 대응하고 합당한 수준의 피해구제를 추진할 것”이라며 “고위험 상품 판매 규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다시는 후진적인 형태의 불완전판매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은행들이 H지수 ELS 상품을 판매할 때는 손 놓고 있다가 손실이 커지자 규제 강화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뒷북 대응이 아닐 수 없다.
은행들은 금융당국의 압박과 고객 불만을 모면하려고 ELS 판매를 중단하겠다지만 임시 처방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현재 은행들은 대출과 예금 금리 차이인 예대마진을 통해 대부분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전체 수익에서 비이자 수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정도다. ‘이자 장사’로 돈을 번다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ELS를 비롯한 금융상품 판매를 포기하기 힘든 실정이다. 당장 ELS 판매를 중단하거나 축소해도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또 다른 고위험 상품을 내놓을 게 뻔하다. 풍선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뜻이다.
지난 2019년 DLF(파생결합펀드) 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은행들은 고위험 상품 판매를 줄이고 자세한 설명과 적합성 기준 등을 철저하게 준수해 불완전판매를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말은 지켜지지 않았고 비슷한 유형의 사고가 또 발생한 것이다.
현실적인 대안은 은행에서 고위험 금융상품 판매를 막을 게 아니라 감시 감독을 강화하는 것이다. 현행 금융소비자 보호와 불완전판매 관련 규정에 구멍은 없는지 살핀 후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다. 사고가 발생한 뒤에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는 뒷북 행정이 아니라 사전에 감시 감독을 강화해 유사한 잘못이 반복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