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사람들을 위한 증언…『그곳에 엄마가 있었어』

2024-02-01     김대현 문화평론가
김대현 문학평론가

지난 해를 돌아본다. 일본정부는 더욱 안전한 처리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비용절감을 이유로 방사능 오염수를 모든 생명의 근원인 바다에 무단으로 방류했다. 최인접국이자 피해 당사자로서 적극적으로 저지해야 할 우리 정부는 일본의 무단 투기를 묵인하고 오히려 이를 방조하는 듯한 언행을 이어나갔다. 블루와 레드라는 이지선다의 외교정책으로 고조되고 있는 남북 간의 긴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본격화된 세계대전의 위기 속에서 한반도가 다시 언제든지 비극의 공간으로 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대내적으로는 세계 잼버리대회의 파행이 있었다. 폭염에도 불구하고 의료시설이나 쉼터의 부족으로 많은 청소년들이 위험에 노출되었고 많은 나라들이 한국의 대회 운영능력을 의심하며 국격이 실추되었다. 이외에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와 무차별 칼부림 난동 등의 사고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태원 참사, 오송 참사와 마찬가지로 최종 책임자에 대한 추궁은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다.

우리 사고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역사 수정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다가온 사건은 국민의 역사 인식에 대한 선전포고에 있다. 독립운동 중에는 건국 운동이 아닌 것도 있다는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와 함께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에 배치된 독립운동가들의 흉상을 철거했다. 이는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을 넘어 현 대한민국과 독립운동의 연관성을 단절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정권이 행하고 있는 여러 실책보다 역사에 대한 인식의 수정이 더 심대한 위협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이유는 이렇다. 앞서의 예시들은 주어진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의 문제이지만 역사 수정은 문제를 인식하는 우리의 사고체계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는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역사 전쟁의 진정한 의도이다. 역사 전쟁을 수행하는 이들이 독립운동과 그중에서도 홍범도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을 더욱 주요한 표적으로 삼는 까닭도 이 지점이다.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가 아니라 1948년 이승만 정부 수립을 현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승인할 때, 일제 강점기에 저질러진 반민족적 부역행위가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몰각될 수 있는 것이며 그들을 물심으로 계승하는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 상황이 지속될수록 이들의 부역은 국가 정통성 차원에서 중요한 흠결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이승만 정권 및 그들과 궤를 같이하는 정권들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사회주의에 찬동한 반국가적 인물로 낙인찍고, 미래에 그들로부터 국가의 정통성을 수호한 자들로 섬김을 받는 것이 역사전쟁의 최종 목적인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도 함께 왜곡되고 망각된다는 점에 있다. 그들이 역사전쟁의 또 하나의 주체인 일본의 우익세력과 손을 잡고 강제징용과 징병, 위안부 피해자,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학살된 민간인들의 존재를 지우거나,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이유도 이 지점이다. 피해자들의 육성은 어떠한 역사적 사료보다도 힘이 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피해자들의 편이 아니다. 이들의 역사가 어떠한 수정 시도에도 의미의 변동 없이 고정된 상태에 이르기 전에, 이들의 힘이 되어 주어야 할 정부의 외면 속에서 피해자들의 육신이 하나씩 스러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 엄마가 있었던 곳, 아버지가 있었던 곳

윤정모 작가의 '그곳에 엄마가 있었어' 표지.

윤정모의 『그곳에 엄마가 있었어』(다산책방 2023)는 이런 맥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소설이다. 소설은 아버지의 부고를 받은 작중 소설가 배문하의 독백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배문하는 아버지를 살해하는 주제로 소설을 쓸 정도로 아버지를 증오한다. 그가 아버지를 혐오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제발 좀 떨어져라, 이 갈보년아.”라고 폭언을 내뱉고 두 모자를 세상에 방기한다. 어머니는 오히려 “미안해요. 나 같은 것이 아이를 낳고 길렀어요.”라고 사죄하며 그를 혈연이라 여기지 않는 배문하에게 꼬박꼬박 아버지라 부르게 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의 세부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아들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우리가 인식하는 일반적인 가족관계와 달리 모종의 불합리가 있다.

배문하는 아버지의 장례에 참여하여 그의 과거가 적힌 일기를 습득한다. 일기에서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으며 태평양 전쟁에 차출되어 동료의 죽음, 약탈과 학살 등 전쟁의 참상을 겪는다. 아수라장 속에서 아버지의 행동원리는, 고종 사촌형이 말해 준 이른바 이중과제다. 식민지 청년으로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이고 이에 맞추어 적응하는 것이 두 번째 과제이다. 아버지는 이에 맞추어 식민지 청년으로서 일제와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생존을 우선으로 한다. 결국 아버지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해방된 나라로 귀환한다.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배문하에게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비밀을 지키고 싶던 어머니의 바람보다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던 그는 결국 어머니에게 과거를 직접 추궁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감추고 싶었던,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들려주고 싶었던 진실이 드러난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위계에 의해 일본 병사들의 위안부로 끌려가 심각한 성적 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했던 것이다. 지옥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어머니는 ‘육신의 주인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정신만 확고하다면 그는 순결한 사람이다’라는 말에 의지하며 동료들과 함께 자신들이 겪은 일을 낱낱이 기록한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에 도착한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전에 포로수용소에서 함께 있던 인연으로 관계를 가지고 배문하를 잉태한다.

 

1944년 8월 14일 버마 미치나에서 미군의 심문을 받는 조선인 위안부의 모습. 위키백과

허구가 아닌 기록을 택한 소설의 미덕

이후 소설은 어머니의 고백을 들은 배문하의 혼란을 묘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마음의 혼란을 정리하는 것은 이제 읽는이의 몫이다. 모든 불화의 씨앗으로 여겨진 아버지의 피해의식의 근원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학도병과 위안부라는 유사한 종류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는 왜 역사에서 지워졌는지, 아버지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한 인식과 적응이라는 이중과제를 넘어, 왜 어머니와 같은 여성에게는 신체에 새겨진 폭력의 흔적을 은폐해야 하는 삼중의 과제가 주어졌는지, 그럼에도 그 기억을 왜 다시 복원해야 하는지의 물음들이 그럴 것이다.

물론 소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준비하고 있다. 소설의 형식은 때로 그 자체로 하나의 전언이 된다. 소설의 말미에 100여 페이지 넘게 증언의 형식으로 배치된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록도 그럴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이 소설 속 내용은 거의 모두 사실”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의 증언 또한 소설적 가공이 들어가지 않은 사실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소설은 그들의 증언을 소설의 내부에 적절히 가공하지 않고 기록의 형식으로 그대로 인용하였을까?

여기에 소설의 윤리가 있다. 우리는 소설을 허구의 이야기로 생각한다. 테리 이글턴의 지적대로 ‘허구는 현실을 책임져야 하는 문학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허구를 통해 소설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부담해야 할 책임을 면제받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책임을 기꺼이 부담하기로 한다. 이유는 어렵지 않다. 역사 수정의 시도로 인해 피해자들의 고통이 왜곡될 수 있는 현실에서 문학적 개입보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현출하는 것이 소설의 형식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믿음이 그러하다. 나아가 이 기록을 통해 피해자와 그들의 피해가 허구가 아닌 실재하는 일이며, 수전 손택의 말대로 ‘우리의 삶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고통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목적인 것이다.

권력의 역사 수정 시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격

문학과 역사는 벌어진 사실들의 단순한 나열이나 재기술이 아니라 서사를 통해 그 시대의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친연성을 가진다. 또한 문학과 역사는 사실과 허구를 경계로 철저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참조를 통해 그 시대를 구성하는 상보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4월 제주의 비극을 담은 현기영의 소설이나 5월 광주의 항쟁을 담은 작품들이 그럴 것이다. 이들로 인해 우리는 기존의 역사에 기입되지 않은 4월의 제주와 5월 광주의 참상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공동체 구성원 다수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위안부 문제를 집요하게 탐색해 온 윤정모의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문학은 권력이 역사를 부인하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수정을 시도할 때마다 굳건히 자기의 소리를 내어 왔다. 그럼으로써 해당 시기를 함께 살아간 그 누구도 그 사건을 회피할 수 없으며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시킨다. 이번 역사전쟁도 마찬가지다. 전방위적으로 벌어지는 역사 수정의 시도 속에서 『그곳에 엄마가 있었어』는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격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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