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파이프가 소나무로…이길래 설치조각가의 매직

개인전 '늘 푸른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다'

2024-01-27     임종업 에디터

이길래(1961~) 조각가의 개인전 ‘늘 푸른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다: 생명의 그물망’(2024. 1. 25.~4. 21)이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 미술관에서 10여 년 만에 여는 개인전에서는 2~4층에 걸쳐 입체(52점), 드로잉(54점) 등 106점을 펼쳐 그의 작품세계 전반과 작풍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조각가 이길래의 소나무 작품. 

작가는 다소의 넘나듦이 있기는 하나 두 개의 키워드, 동파이프와 소나무로 압축된다. 30여 년 전 동파이프를 가득 실은 트럭 뒤꽁무니에서 목격한 원형 단면들의 형상성에서 착안한 이래 잘게 썰어낸 동파이프를 재료로 한 설치조각 작품을 제작해 왔다.

썰어낸 동파이프 즉 ‘테이프형 구리고리’는 직경을 달리해 다양한 크기를, 일그러뜨려 여러 모양을 얻을 수 있어 작품제작의 최소단위로 활용하기에 맞춤하다. 조각가한테 자기만의 재료를 발견했다는 건 전사가 무기를 얻은 것에 비유된다. 구리고리들을 조합, 용접함으로써 형상과 크기를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게 됐다.

 

조각가 이길래의 설치조각 작품. 

재료 못잖게 중요한 게 소재의 특화인데, 그의 선택은 소나무였다. 갈라진 껍데기와 구리고리의 모양이 흡사해 고리를 이어붙이면 소나무 등걸과 줄기를 형상화할 수 있겠다는 발상이다. 출발이 ‘사소한’ 재료와 소재의 유사성이었으나 소나무의 내포와 외연은 30년 넘도록 천착해도 될 만큼 장대하다.

소나무가 주로 분포한 북반구 중위도 지역은 온난 기후대여서 오래 전부터 문명을 꽃피워온 터. 로마, 베이징, 서울, 캘리포니아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사계가 뚜렷한 그곳에서 소나무의 상록성은 원주민한테 깊은 인상을 남기며 공존해 왔다.

한국의 경우, 고구려 고분벽화, 신라 솔거의 설화에 등장할 만큼 연원이 깊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나라의 나무’로 격상돼 문인들의 시서화의 소재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애국가는 그 잔재다.

토양 산성화로 인해 소나무는 전성기를 맞고 있는 현재, 한국화, 유화, 사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수다한 소나무 작가가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설치조각에서는 이길래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작가가 명민하다고 해야 할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각가 이길래의 설치 작품.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작가는 고리를 이어붙여 소나무를 형상화하는데, 최소단위는 선, 면으로 확장하여 부조가 되고 입체가 되어 벽걸이, 설치조각으로 구현된다. 길이와 높이가 다른 음표를 리드믹하게 조합하여 모티브를 만들고 이를 변주하여 전체를 완성하는 작곡과 흡사하다. 그런 까닭에 이길래 작가의 작품은 타악기 위주의 곡으로 변환돼 연주되기도 한다.

이길래의 소나무는 등걸과 가지에 이파리를 붙임으로써 더 완성된 형태로 진화해 왔다. 최근들어 뿌리로까지 확장되어, 얕은 산성토양에 사방으로 뿌리를 뻗쳐나가는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하는 데 이르렀다.

주목할 점은 고리로 된 그물망은 선인 동시에 면이며 입체적 성질을 띤다는 것이다. 하여, 빛의 각도에 따라 다양한 그림자를 거느린다. 작가의 소나무는 그림자를 드리운 벽과 바닥과 함께 완성된다. 빛과 장소에 따라 공짜로 다양한 변주를 얻는 셈이다.

이길래는 소나무의 지구적 분포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K-컬처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국내 전시보다 국외 전시를 빈번하게 하고 있으며 작품 가격도 수요가 많은 만큼 높게 받고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우직하게 외곬으로 천착한 게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조각가 이길래의 드로잉 작품.

문제는 타성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재료와 소재가 탄탄하여 30여 년 집중할 수 있었는데, 이는 자칫 동어반복 또는 자기복제의 수준으로 떨어질 여지가 있다. 이번 전시에서 일부 선보이는 ‘소나무+바위’가 돌파구가 될지 모르겠다. 다만, 조각 활동 틈틈이 그린 드로잉에서 가능성을 엿본다. 대개 조각가의 드로잉은 조각작품의 밑그림 또는 아이디어 모색 과정에 해당한다. 드로잉 가운데 밑그림 외에 나이테, 뿌리뻗음을 형상화한 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검정 무채 위주의 그것은 블랙홀, 은하 또는 우주의 탄생을 연상시킬 정도여서 독립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이를 발판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수년 전부터 지구적으로 솔잎혹파리병이 번지고 있다. 대만은 방제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국 역시 남쪽에서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북상하고 있다. 소나무가 우세종으로 자리잡은 마당에 방제 실패는 산림황폐로 이어질 수 있다. 남북한 공동방제가 필요한 시점인데, 윤 정부 들어 교류가 단절돼 한반도 전체로의 확산을 손 놓고 바라보는 형편이다.

이길래의 소나무도 그렇다. 한국인 디엔에이에 각인된 만큼 작품의 생명성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겠지만 하마나 화석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조각가 이길래의 작품 전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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