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1 대 1000 항일시가전 벌인 청년 김상옥
쌍권총으로 일제 경찰 20여명 쓰러뜨려
숨진 여성동지의 관 값으로 구입한 무기
3.1만세운동 뒤 좌절한 조선인 용기 북돋워
노동자에서 소상공인 거쳐 독립투사로
1923년 1월 22일 동틀 무렵. 종로 효제동 72번지 이진옥 노인의 집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이어진 고요. 경찰이 70대 여인을 방패막이로 하여 진입하여 수색한 결과 청년은 권총을 움켜쥐고 정면을 응시한 채 벽에 기대어 식어가고 있었다. 새벽 3시 반부터 시작된 1000여 일제 무장경찰과 조선인 게릴라의 대결은 청년의 자결로 끝났다. 적 15~16명을 쏘아 쓰러뜨린 게릴라 이름은 김상옥.
34살 짧은 삶을 마감한 72번지 집은 그가 나고 자라 뜻을 세운 탯자리. 10년 전인 1913년 24살에 결혼할 당시 주소가 종로 6정목 210번지로 바뀌었으니 24년 동안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방패막이로 끌려와 시신을 처음으로 확인한 70대 여인은 김상옥의 모친 김점순이다.
검시 결과 그의 몸에서 11발의 총알이 발견됐다. 스스로 머리에 쏜 1발을 제외한 나머지는 하반신에 집중돼 있었다. 생포를 목적으로 한 게 분명하다. 특이점은 엄지 발가락 하나가 없었다. 애초 은신처 73번지 이태성의 집을 급습한 경찰과 교전하면서 74, 75, 76-2번지 등 장소를 옮겨 적을 교란하고 최후의 응전 장소인 72번지 옛집으로 월담하는 과정에서 부러져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1 대 1000 시가전의 시작은 6일 전인 1월 17일 새벽, 후암동(삼판통) 304번지 고봉근의 집이다. 감나무밭 사이 세 채의 집 가운데 하나로 집주인 고 씨는 김상옥의 매부다. 행랑채에 세든 조선인의 밀고로 21명의 경찰이 가장 취약한 시간에 들이닥쳤다.
김상옥이 후암동 외딴 집에 숨어든 것은 매부가 든든했거니와 남대문역(경성역)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일본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에서 열차를 타는 사이토 총독 일행을 처단하기에 적절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김상옥은 상하이를 떠나오기 전,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 무기와 폭탄을 지원받기로 약조를 받은 바 있다. 김상옥이 경성에 잠입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검속을 강화한 가운데 고봉근의 집 행랑에 세든 조선인의 밀고로 거점이 드러났던 것이다.
체포조가 방문을 부수고 들어서자 김상옥은 쌍권총을 발사하여 4명을 쓰러뜨린 뒤 눈 내리는 산 속으로 맨발 도주했다. 이태원 근처 채석장, 한남동, 석호정 등 남산 남동자락을 휘돌아 장충단 돌다리 근처에 권총을 숨겼다. 하왕십리 안장사에서 승복으로 갈아입고, 왕십리를 거쳐 무네미(수유리) 이모 집에서 한 숨을 돌렸다. 저녁 무렵 나무바리 소를 끌고 가는 땔감장수 옆에 붙어 탁발을 마치고 귀가하는 스님으로 위장하여 동소문 검문을 통과하여 효제동 73번지 이태성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나고 자란 집의 옆집 딸 이혜수는 어려서부터 잘 아는 사이로 김상옥의 항일운동을 함께 한 동지다.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진 가운데 다음 날 이혜수를 통해 권총 1정을 회수하였고, 19, 20, 21일 정설교, 이창수 등 동지를 만나 차후 행동을 논의했다. 와중에 동지 중 한 명인 전우진이 검거돼 모진 고문 끝에 은신처를 자백하였고 김상옥의 동상에 걸린 발은 썩어갔다.
김상옥이 끝까지 쥐고 있었던 7연발 모젤 권총. 당시 육혈포라고 불리는 이 무기는 상하이 체류 때 숨진 여성동지 장규동의 관을 사러갔다가 눈 질끈 감고 관 대신 구입한 것이다. 애초 돈을 들려 내보냈던 백범은 물론 임시정부 사람들은 관 값을 다시 추렴했다. 교회활동을 하며 알게 된 장규동은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그가 열혈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함께 해온 오랜 동지다.
김상옥은 1920년 8월 미국 상하원 의원 42명의 경성 방문 때 남대문역에 마중 나온 총독부 간부들을 처단하기 위해 암살단을 조직하여 거사를 준비하던 중 예비검속에 걸려 계획이 탄로 나게 된다. 동지들 대부분이 검거돼 구속되고 자신은 중국으로 망명한다. (김상옥은 그곳에서 의열단과 접촉한 것으로 보인다.) 장규동 역시 모진 고문과 능욕을 당하여 깊은 병에 든 채 누워서 재판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김상옥은 궐석상태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상하이에서 인편으로 이 소식을 들은 김상옥은 1921년 7월 독립자금 모금 임무를 띠고 국내 잠입한 김에 여성동지를 들쳐 업고 상하이로 탈출한다. 장규동의 병세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다가 이듬해 4월 겨우내 묵은 빨래를 한 게 화근이 되어 세상을 떴다. 동서 10개월 만이다. 김상옥에게 독립 무장투쟁은 정인을 위한 복수와 동격이었을까
김상옥이 일으킨 두 차례 거사는 모두 미수에 그쳤다. 하지만 두 번째에 이르러 암살투쟁은 6일간에 걸친 시가전으로 전환돼 적 19~20명을 처단하는 전과를 거뒀다. 3.1만세운동 이래 일제가 조선, 동아, 시대일보 등의 발간을 허용하는 등 소위 ‘문화정치’를 시행하는 동시에 고등계 형사를 대폭 증원하여 사찰을 강화하면서 국내 독립운동 세력의 씨를 말린 즈음에 벌어진 김상옥의 거사는 1919년 9월 사이토 총독 암살을 노린 강우규 의사의 폭탄투척 사건과 함께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숨죽여 살던 조선인의 용기를 북돋웠다.
김상옥은 본디 동대문에서 영덕철물점을 운영하는 소상공인이었다. 1912년 창신동 493번지에서 창업하여 말편자, 농기구 등을 만들어 교외농사를 짓는 농민을 대상으로 판매하였으며 겸하여 갓에서 모자로 의관이 바뀌는 시절에 즈음하여 국산 말총모자를 보급하였다. 시대를 읽는 눈이 탁월하고 수완이 좋아 한창 때는 종업원 50명을 거느릴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1889년 1월 5일 태어난 그는 8살부터 구한말 군관 출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체공장의 잔심부름꾼으로 노동을 시작했다. 1903년 14살부터는 대장간에서 본격 육체노동을 하는 동시에 연동교회 야학에서 공부하며 시절 눈을 떴다. 18살 무렵 스스로 야학교를 세워 자신은 물론 불우청소년의 시야를 넓혔다. 황성기독교청년회관(YMCA) 청년부 활동을 하며 미국 유학 꿈을 꾸었다. 동대문 근처에서 1911년 한햇동안 기독교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앉아서 책 파는 일을 그만 두고 권서인 겸 매약행상으로 삼남지방을 돌면서 나라 사정에 눈을 떴다. 이 때 대전에서 만난 한우석(일명 한훈)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김상옥과 동갑인 한우석은 17살 때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에 참여해 초모장으로 군사를 모으는 역할을 맡아 활동한 바 있다. 둘은 대한광복단 동지가 되었고 김상옥이 1912년에 차린 철물점은 대한광복단의 비밀본부가 됐다. 김상옥은 광복단원 자격으로 1916년 악질 친일부호를 사살하고 헌병분견대를 습격한 바 있다.
김상옥은 철물점 종업원을 이끌고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일본 경찰에 쫓기는 여학생을 구출하고 일본도를 빼앗기도 했다. 만세운동 한달 뒤부터 6개월에 걸쳐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배포하였다. 이 일로 그는 40일 동안 서대문 감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노동자에서 소상공인으로, 소상공인에서 독립운동가로 나아간 김상옥. 그는 먹물 또는 외국물을 먹은 세력과 무관하게 자력으로 무장투쟁의 지경에 이르른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3.1독립만세운동이 무위에 그쳤음에도 이듬해 미 의원단 방문 때 독립청원을 하겠다던 온건파와 달리 총독부 간부를 암살하려던 그의 시도는 당시로는 역발상이었다. 김상옥이 온 몸으로 낸 길은 나석주, 이봉창, 윤봉길 등이 뒤따랐다.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는 시가전 100주년을 기려 ‘김상옥, 겨레를 깨우다’ 특별전(2023.12.1.~2024.3.10. 1층 원형 특설공간)을 열고 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유폐된 관련 사료를 서울로 끌어올려 특별한 자리를 마련한 관계자의 노력이 가상하다. 전시장 끄트머리에 등신대로 확대하여 세운 사진 한 장이 유독 눈길을 끈다. 1922년 상해를 떠나기 직전 스튜디오에서 정장차림으로 찍은 김상옥의 마지막 사진인데, 태극기 앞에 무기를 들고 찍는 여느 의사들과 달리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리고 뒷짐을 졌다. “김 동지. 왜 뒷짐을 지고 사진을 찍소?” 그의 대답은 이랬단다. “나라를 빼앗기고 아무 것도 못 하고 가만히 있는 두 손이 부끄럽네.” 그가 숨을 거둔 효제동 72번지에서 가까운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같은 포즈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참고자료
<김상옥 평전>(이정은, 민속원, 2014)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2010 초판, 2016 개정판, 김동진,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