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을 '거부권'이라 부르지 못하는 '박민의 KBS'
사장 교체 이후 '이름 바꾸기' 잇따라 벌어져
범용 '거부권' 대신 생경한 '재의요구권'으로
'전두환 씨'는 '전 전 대통령'으로 되돌리고
대통령 의중 따라 북미→미북, 한중일→한일중
한국방송(KBS)에서 ‘이름 바꿔 부르기’가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박민 씨가 지난해 11월 윤석열 대통령과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의 지원하에 신임 사장으로 입성한 이후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변화 중의 하나로, 호칭과 용어를 윤 정권의 시각에 맞추거나 과거의 것으로 되돌리고 있다. '국민의 방송'에서 '박민의 방송'으로 바뀌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KBS에서 나타나고 있는 또 하나의 퇴행이다.
5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씨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에 대해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을 두고 KBS는 ‘거부권’이라는 표현 대신 ‘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고 보도했다. 재의요구권이 거부권을 뜻하는 말이기는 하나 흔히 쓰이는 용어인 거부권 대신 재의요구권이라는 표현을 굳이 쓴 것에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반대 여론을 의식한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주요 언론들 중에서 거부권 대신 재의요구권이라는 표현을 쓴 곳은 KBS가 거의 유일하다. 재의요구권이라는 표현을 쓴 매체들도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쓰고 있지만 KBS 보도에서는 아예 '거부권'이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전날인 4일에는 KBS의 방송뉴스 책임자가 소속 기자들에게 “전두환의 호칭은 앞으로 ‘씨’가 아니라 ‘전 대통령’으로 통일해달라”고 일방적으로 공지한 사실이 한겨레신문의 취재를 통해 확인됐다. 한겨레에 따르면 이날 오후 4시41분 한국방송 기자들이 사용하는 내부망인 보도정보시스템에 김성진 통합뉴스룸 방송뉴스주간 이름으로 해당 내용이 담긴 공지가 올라왔다.
김 주간은 이 공지에서 “‘전 대통령’은 존칭이 아니라 대한민국 11·12대 대통령을 지냈던 사람에 대한 지칭일 뿐”이라며 “김일성을 주석으로 부르고,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부르고, 김정은도 국무위원장으로 부르는데 전두환만 씨로 사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라고 했다.
전두환 씨는 ‘반란 및 내란 수괴와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지난 1997년 대법원에 의해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경호·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됐다. 전두환 씨는 2006년 노무현 정부 때 태극무공훈장 등 9개의 수훈 훈장이 취소되기도 했다.
‘전두환 씨’라는 호칭으로 변경된 것은 전두환 씨에 대한 이 같은 전직 형사적 단죄 및 전직대통령 예우 박탈과 취소에 맞춰 이뤄진 것으로 KBS는 2018년 하반기부터 ‘전두환 전 대통령’과 ‘전두환 씨’라는 호칭을 혼용하다가 최근에는 ‘전두환 씨’로만 써 왔다.
그러나 신임 박민 사장의 취임 이후 이같이 정착돼 있던 ‘전두환 씨’ 호칭이 상부의 일방적인 지시에 의해 과거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호칭 사용 지시를 내린 김성진 주간은 박민 사장이 취임한 지난해 11월 13일 통합뉴스룸 방송뉴스주간 자리로 발령받았다. 박민 사장이 정권의 후원하에 사장으로 밀고 들어온 이후 이른바 대통령 동정을 매일같이 주요 뉴스로 다루는 이른바 '땡윤 뉴스'를 내보내고 있는 KBS가 '땡윤 뉴스'의 시초인 '땡전 뉴스'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현상이다.
전두환 씨에 대한 전 대통령 호칭 환원 사실이 알려지자 KBS 시청자 게시판에는 이에 대한 항의와 함께 박민 사장의 답변을 요구하는 시청자 청원이 올라왔다.
KBS의 이름 바꾸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박 사장이 취임한 지난해 11월 KBS 보도본부에 내린 ‘한중일’과 ‘북미’ 표현도 보도에 반영되고 있다. 당시 ‘한중일’ 대신 ‘한일중’, ‘북미’ 대신 ‘미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라고 공지한 일이 알려졌는데, 이 역시 김성진 주간의 지시였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국제 외교 무대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해온 ‘한중일’ 대신 ‘한일중’, ‘북러’ 대신 ‘러북’ 등의 표현을 사용한 것을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지난 1일까지 빅카인즈를 기준으로 ‘한일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지상파 방송사는 KBS가 유일하다. ‘한일중’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기사는 KBS가 22건인 데 반해 MBC는 전혀 없었으며 SBS는 1건이 있긴 하나 이는 SBS 소속 기자가 아닌 이 방송국의 프로그램에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 한 발언에 ‘한일중’이 쓰인 것이다. ‘미북’ 표현을 사용한 보도도 역시 KBS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