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제기하는 '상식'에 대해

전 국가인권위원장에 대해 공수처는 신속히 수사하라

2023-11-20     김정희 재불동포, 시민인권위원회 공동위원장 

나는 여성으로서 남존여비의 사회적 정서가 농후했던 60-70년대 시대에 한국에서 성장기를 거쳤다. 그리고 70년대 말 80년대에 유럽(오스트리아)에서 체류를 하면서 인격적인 존중을 받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인격적인 존중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인권이 존중받는 것을 뜻한다.

그 당시 한국에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2020년대의 시각으로 보면 비참함 그 자체였다. 여성들은 남자들의 장식품이나, 생활의 도구였다. 그 당시의 여성들은 형제 남매간 사이에서도, 남동생이나 오빠를 위해 희생을 요구받았다. 아들들은 교육을 받는 순서에서 항상 우위였고, 직장을 구하는 것에서도 남자들이 절대적인 선점권을 갖는 사회였다. 그런 관습 속에서 여성들은 살았다.

 

시민인권위원회가 11월 7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최영애 (전)국가인권위원장에 대한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필자)

그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가장 잘 적응하는 여성이 모범이었고, 그 당시의 가치관 즉 희생하는 여성을 미담으로 만드는 사회였다. 얼마나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가족을 위해 봉제공장에서 가발공장에서 혹은 미군기지에서, 인권이 부정당하는 그 많은 곳들에서, 효녀로 애국자로 취급 당했던가? 더욱이 여성들이 사람으로서 가져야 하는 기본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던 사회였다. 그런 사회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버텼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아마도 내 자신이 그런 사회를 탈출한 여성이었기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한국사회는 무서운 속도로 사회가 변하게 된다. 청년들의 저항의식과 희생으로 일부이나마 정치적 사회적 민주화를 얻게 되고, 정치권의 야합으로 부패한 나라로서 IMF 사태를 겪으면서,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는 저출산 정책도 크게 한몫을 하면서 한국사회의 인간관계는 확실하게 변화를 거쳤다. 이제 대한민국은 1900년대의 비참한 일제강점기, 학살과 죽음의 전쟁의 시대, 투쟁의 시대, 극복의 시대를 거치면서 2020년대는 ‘묻지마’의 광풍의 권력시대가 된 것인가? 한국사회에서는 기득권의 선점을 차지한 그룹들에게 정당한 이의제기조차도 함묵을 해야 하는 야만의 시대가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의 오판일까?

2020년 7월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죽은 채 발견되면서, 성추행 피해자의 변호사와 여성단체들의 기자회견을 통한 여론몰이와 정의당 의원의 공개선언들이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야 한다. 공정성이 지켜져야 하는 국가인권위가, 경찰 수사가 진행되는 사건에 대해 수사의 공정성을 방해할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직권조사 결정을 내리고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같은 조사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피해자나 가해자나 공평한 인권을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정당하므로 피해자나 가해자의 인권이 같은 무게로 보호받지 못한다면 '방황하는 인권'을 생산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어느 사회이든지 여론몰이로 결론을 추론시킬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조작이 가능하다. 그같은 조작이 행해진다면 어떤 여론몰이를 다각적으로 시도하는 그룹에 의해 진실이 감추어지고 거짓이 진실인 것처럼 포장되는 인위적 결론으로 몰아가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정정당당하게 이의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이의제기를 하고 있는 편이 소수일지라도 그것을 입막음 하는 것이 아닌 들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만약 이의제기를 하는 소수에게 2차 가해라는 등의 딱지를 붙여 입막음이 가능한 사회라면 이 사회를 건전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공평한 인권이 보호를 받지도 못하고 언제 어디서 누군가가 돌이킬 수 없는 가해자 혹은 범법자로 낙인 찍으면서 수사도 종결하기 전에, 공정한 재판에 올려지기 전에 이미 범죄자로, 여론재판으로 그의 인권이 말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무슨 방법으로든지 승리하는 사회적 강자, 즉 기득권을 갖는 강자들의 세상이 될 것이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 더 사악하고 조작의 기술을 습득한 강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과연 대한민국 사회 성원들은 이런 방향으로 가는 사회를 방관하고, 방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소수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사회, 소수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거부하는 사회, 소수는 허용되지 않는 사회를 과연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선점권의 강자들, 조작의 달인들인 강자들이 더 쉽게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고 조정하는 것을 허용하는 사회를 대중들이 원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선점권의 강자들이나 조작의 달인들인 강자들은 사회대중을 위하여 그들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혹은 그들의 상대편을 제거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대중들이 허용하는지 묻고 싶다.

3년 전 여름 대한민국은 이상한 광풍 속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원순 서울 시장의 죽음을 둘러싼 광풍의 한가운데에 최영애 당시 국가인권위원장이 놓여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작년 2022년 10월 시민인권위원회(공동위원장 이원영 수원대 교수, 고문변호사 정철승)에 의해 공수처에 고발당했다. 죄명은 직권남용.

하지만 공수처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수사를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전 서울시장에 대한 국가인권위원장의 직권남용은 그 공적 지위의 무게 때문에 모든 국민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중대사안이다. 마땅히 수사가 신속히 이루어져야 함에도 1년이 넘도록 고발인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직무유기에 가깝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의 원인과 경위를 명백하게 밝히는 공적이고 상식적인 절차가 이뤄지지 않은 결과, 그를 일방적으로 성범죄자로 낙인 찍는 사자(死者) 명예훼손 범죄행위가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며칠 전 시민인권위원회가 그 신속한 수사를 촉구한 것은 상식의 일부이나마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불행하게 발생하는 많은 사건들은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시간에 쫓기면서 또 다른 유형의 새 사건에 묻혀버린다. 거듭되는 진실공방 속에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면서 진짜 피해자와 가짜 피해자도 가리지 못하면서 사법정의라는 포장 속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불행한 사회의 길을 걷게 될 거라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사회에서 권력이 아닌 정의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는 날을 기대하고 싶다. 강자들이 강요하는 진실이 아닌, 사실이 왜곡되지 않는 진실은 밝혀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진실 앞에 모두 겸손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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