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미래, ‘최소량의 문학’

장기비상사태와 민주주의 그리고 독자의 재탄생

2023-10-29     이문재 시인

지난 24~26일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 일대에서 열린 ‘2023 DMZ평화문학축전’에서 발표된 이문재 시인의 기조연설문을 싣는다. 경기문화재단이 주최한 이번 평화문학축전의 대주제는 위기의 시대, 문학의 길이었고, 이 기조연설은 지구의 위기와 작가의 역할을 주제로 한 제1세션에서 발표되었다. 이번 축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르클레지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비롯한 외국 작가와 국내작가 현기영, 윤정모, 오수연, 나희덕 등 총 50여 명이 참여했다.

 

1. DMZ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DMZ평화문학축전’ 개최를 축하합니다. 한국문학의 일원으로서 멀리 바다 건너에서 오신 작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아울러 뜻깊은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뒤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정전된 지 어언 70년이 되었지만 한반도와 지구가 직면한 위기를 문학과 평화, 평화와 문학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접근하는 노력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잘 아시다시피, 1945년 8월의 해방은 한반도에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일제 강점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기쁨도 잠시, 한겨레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3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치렀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갈등과 대립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남북은 여전히 휴전 상태입니다. 분단 상황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경우이지만, 휴전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것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2023 DMZ 평화문학축전' 행사 중의 하나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와 대화의 시간 기념 사진. 경기도 제공

DMZ, Demilitarized Zone. 즉 비무장지대는 저에게 분열증적인 개념이자 실재입니다. 원래 뜻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무장지대는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최정예 병력을 배치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무장에 의한, 무장을 위한 비무장인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하다는 힘의 논리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대다수 한국 작가에게 DMZ는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Divided Mental Zone’, 즉 ‘분열된 정신 지대’일 것입니다. 일제 강점이 그러했듯이 분단 상황은 우리의 의식 구조를 억압했습니다. DMZ가 우리 의식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감정, 마음, 정신은 물론 영혼까지 분열되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은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는 상상력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은 비현실이었습니다. 꿈속에서도 자기검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DMZ는 감시기구였습니다.

한반도는 두 개의 섬으로 나뉘었습니다.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둔 두 섬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섬이었습니다. 사면이 아니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남과 북은 섬이 아닌 섬이었습니다. 남한의 북쪽 경계와 북한의 남쪽 경계 DMZ는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깊고 험한 바다였습니다. 그 어떤 배로도, 그 누구도 건널 수 없는 죽음의 바다였습니다.

DMZ는 한반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6.25 전쟁이 내전이 아니라 동서 이념의 충돌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DMZ는 단박에 지구 차원으로 확대됩니다. 이곳 DMZ에서 세계의 군사력, 경제력, 이념과 체제가 맞서고 있습니다.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분열과 갈등이 있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이 DMZ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력에 의한 평화가 있는 곳,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곳은 어느 곳이나 DMZ라고 봐야 합니다. 나-우리와 다른 것을 틀린 것, 나쁜 것이라고 단죄하는 모든 닫힌 마음 안에 DMZ가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무장에 의해 유지되는 비무장지대는 가상현실, 비현실입니다. 대다수 작가에게 DMZ는 Divided Mental Zone, 즉 분열된 정신의 지대입니다.

2. 지구의 위기가 아니라 인류의 위기

DMZ는 세계의 ‘끝’, 시대의 ‘끝’입니다. 오늘 우리가 DMZ를 지척에 둔 이곳 한강 하구에서 평화와 문학, 문학과 평화를 논의하는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학이 이 ‘끝’을 ‘시작’으로, ‘처음’으로, ‘맨 앞’으로 바꿔내는 일, 다시 말해 대전환을 이뤄내는 것이 당대 문학과 작가가 자임해야 할 신성한 권리이자 숭고한 과업일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한자리에 모여 이마를 맞대는 본질 목적일 것입니다.

‘체르노빌’이란 드라마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코로나 팬데믹 직전이던 2019년 여름에 보았습니다만, 1986년 4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핵발전소 폭발 사고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룬 6부작 드라마입니다. 당시 구소련 에너지 장관이 핵물리학자와 함께 체르노빌로 날아가 현장 상황을 파악한 뒤 혼잣말처럼 내뱉은 한 마디가 “끝이 시작되었다”였습니다. 드라마 속 그 많은 대사 중에 이 한 마디가 제 뼈에 새겨졌습니다. “끝이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끝’이 보였습니다. 그 이전에 시작된 끝들도 새삼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는 ‘새로운 끝’의 시작이었고, 후쿠시마, 세월호, 9‧11, IMF 구제금융이 다 시작된 끝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기후 위기와 자원 고갈, 생태계 붕괴, 인구 폭증과 도시화, 불평등과 양극화가 모두 거대한 끝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생활의 안팎이 ‘시작된 끝들’로 가득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산업문명이 ‘끝의 시작’이었습니다. 개발과 성장이 유토피아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경제 논리가 ‘거대한 끝’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경제학은 과학적이기는커녕 상식적이지도 못했습니다. 경제학은 지구 자원이 무한하다는 그릇된 전제 아래 무한 성장을 추구했습니다. 항아리에 든 물을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결국 폭주를 거듭하던 산업 문명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기후 위기로 인해 인류가 비상사태로 접어들었으며, 이 비상사태는 상당히 오래 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하지만 이 위기는 지구의 위기가 아닙니다. 천지자연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 장기 비상사태는 전적으로 우리 인류가 자초한 것입니다. 신을 대신한 ‘이성 중심주의’의 오만이, 천지자연을 도구화한 ‘인간 중심주의’의 폭력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미덕이라고 부추긴 ‘경제 성장 제일주의’의 무지가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3. ‘소로의 세 의자’와 새로운 문학

헨리 데이빗 소로의 오두막에는 의자가 세 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대 왜 굳이 세 개였을까요. 혼자 있을 때는 의자가 하나만 필요했겠지요. 벗이 찾아오면 의자 하나를 더 내놓고, 나그네들이 방문하면 의자 세 개를 다 내놓았다고 합니다. 소로의 의자는 의미심장한 메타포입니다. 한 개의 의자는 자기 성찰을, 두 개의 의자는 우애를, 세 개의 의자는 환대를 의미합니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소로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기 성찰, 우애, 환대가 온전한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가치이자 태도라는 사실을.

소로의 의자는 지구의 위기, 아니 인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당장 갖춰야 할 마음가짐이자 능력입니다. 그런데 소로의 의자에 앉혀야 할 ‘손님’이 더 있습니다. 벗과 이방인 말고 둘이 더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기술과 천지자연을 위한 의자를 마련해야 합니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을 위한 의자, 인간의 활동에 의해 붕괴 직전인 지구 생태계를 위한 의자. 과학기술과 천지자연을 환대의 의자, 우정의 의자, 성찰의 의자에 앉혀야 합니다.

친구와 이방인도 그렇지만 과학기술과 천지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때 필수적인 것이 민주주의의 회복과 강화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공화정을 대신하는 과두정,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선거 또한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가짜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를 돠찾아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본래 모습은 한마디로 ‘민중의 자기 통치’입니다. 루소가 말한 자유인이 곧 민주 시민일 것입니다. 루소는 스스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준수하는 인간이 자유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루소의 자유인이 민주시민이고, 민주시민은 곧 예술가적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가야말로 작품을 통해 스스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키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주민, 소비자 수준에 머물고 있는 민중이, 자기 각성을 통해 시민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민중이 스스로 입법자가 되어 자기를 통치하는 예술가적 인간으로 재탄생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 시대 문학의 역할, 작가의 임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독자를 작가로 거듭나게 하는 문학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문학입니다. 작가는 의미의 유일한 생산자 위치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독자는 작품의 수동적 수용자라는 자리에서 올라서야 합니다.

자신을 통치하는 민중이 민주시민이듯이, 작품을 거울삼아 자기 삶을 성찰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독자, 즉 작가로 재탄생하는 독자는, 국민-소비자에서 민주시민으로 거듭난 민중과 동일인일 것입니다. 이 예술가적 민주시민이 지구 차원에서 연대한다면, 그때 지구시민이 탄생할 것이고, 지구시민들이 곳곳에서 지혜를 모아 지속가능한 평화를 구가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자를 작가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관건일 터인데 과연 그런 방법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작가가 절반만 쓰는 것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독자가 쓰도록 작품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만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일찍이 바슐라르가 창조적 독서를 언급했고, 지난 세기 중반에는 수용미학이 독자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남미에서는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란 시인이 상호텍스트성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습니다. “시는 배타적으로 어느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본래 익명이고 집단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시의 주어는 대부분 일인칭 ‘나’이지만, 그 시가 진정 좋은 시라면 시의 주어 ‘나’는 독자 자신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모든 진정한 시의 주어는 ‘인류’일 것입니다. 시의 주어가 인류라면 그 시의 공간은 당연히 지구-우주일 것입니다.

4. 리비히의 최소량의 원칙

너무 낙관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데 독자를 작가로 거듭나게 하는 게 과연 위기를 극복하는 실질적 대안이 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학의 위상, 활자 매체의 위력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학의 역할은 분명히 있습니다.

리비히의 최소량의 원칙이라고 아실 텐데요. 19세기 초중반 유스투스 폰 리비히란 독일의 화학자가 식물의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 즉 질소, 인산, 칼슘을 발견한 것입니다. 리비히 덕분에 인공 비료가 생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리비히는 또 다른 놀라운 과학적 성취를 이뤄냈습니다. 다름 아닌 ‘최소량의 원칙’입니다. 식물에게는 필수 영양분이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 어느 한 요소가 최소 기준을 채우지 못하면 다른 요소가 아무리 많더라도 식물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리비히의 최소량의 원칙이 문학과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돨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문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학은 인간과 세계의 성장(경제 성장과 다른)을 위해 적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 성분입니다.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다른 조건들이 다 갖춰진다 해도 문학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면 그 인간과 세계는 탈이 나도 크게 날 것입니다. 문학이 없는 세계, 즉 인간과 생명과 천지자연을 옹호하지 않는 세계는 야만의 세계, 미래가 사라진 세계일 것입니다.

5. 끝을 시작으로, 마지막을 맨 처음으로

지금 우리가 모여 있는 이곳은 DMZ에서 아주 가깝습니다. 직선거리로 채 10km가 안 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비무장지대는 형용모순입니다. 무장에 의해 통제되는 비무장지대는 의미가 없습니다. 군사력에 의해 통제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는 전쟁과 전쟁 사이가 아닙니다. 평화는 오직 평화에 의해서만 평화여야 합니다. 요한 갈퉁이 지적했듯이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만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그리고 ‘평화에 의한 평화’는 내가 먼저 평화일 때 가능합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내가 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금언은 진리에 가깝습니다.

나는 ‘모든 진정한 시인은 심오한 생태학자’라는,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의 말씀을 오늘 이 자리에서 오마주하고자 합니다. ‘모든 진정한 작가는 심오한 평화학자’입니다. 모든 진정한 문학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목표는 인류 평화입니다. 인류 탄생 이래 인류가 도달해보지 못한, 그래서 끊임없이 추구해야 마땅한 유토피아는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정한 문학의 주어는 평화를 희구하는 인류여야 합니다. 민족문학, 지역문학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를 추구한다면 그 문학이 어떤 언어로 쓰여졌든, 어떤 형식이든, 어느 시기에 발표되었든 세계 문학이자 인류 문학이고 최종적으로는 지구 문학입니다.

비무장지대 바로 앞에서 국내외 작가가 함께하는 이 평화문학축전이 세계의 끝을 시작으로, 시대의 마지막을 맨 처음으로, 산업문명의 맨 뒤를 맨 앞으로, 최후의 인간을 최초의 인간으로 바꿔내는 대전환의 촉진제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두서없는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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