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정상회의 복원 임박…"시진핑 노련한 현실주의자"
한‧일 끌어들여 반중 전선 이완, 북·러 견제하나
시, 한국에 "관계 중시, 정책·행동에 반영" 주문
러, 평화 이용 내세워 북핵 완성 도울 길 많아
왕이, 북한만 빼고 한·미·일에 러시아까지 만나
중국, 한·미·일 동맹화에 북·러 밀착 '설상가상'
북한, 핵무력 정책 국가 최고법인 헌법에 명시
한‧중‧일 정상회의 복원을 위한 3국 협의가 본격화됐다.
세 나라는 지난달 2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고위급 회의(SOM)를 열어 올해 3국 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는 외교부 정병원 차관보와 눙룽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외무심의관이 참석했다.
개최 시점과 관련해 "상호 편리한 가장 빠른 시기"(외교부), "조기에 편리한 시기"(중국 외교부)라고 발표했다. 3국 정상회의가 열리면 윤석열 대통령과 리창 중국 총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참석하게 된다. 이를 위해 이르면 이달 안에 3국 외교장관 회의를 열 가능성이 크다.
3국 협의체 재가동은 2019년 12월 중국 청두 3국 정상회의 이후 4년 만이다. 한‧일 관계 경색과 코로나 팬데믹 탓에 중단됐고, 한‧일이 미국 주도 반중 포위망에 가담하면서 설상가상이 됐다. 그러나 그간 냉담했던 중국이 긍정적 입장을 보이면서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정상회의 개최에 대한 3국 정상들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3국 정부 간 협력을 조속히 복원하고 정상화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한‧중‧일 협의체 복원…중국 태세 전환 '결정적'
한‧중‧일 최고위 협의체 복원은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와 관련해 시사하는 점이 많다.
최고위 협의체 복원은 마땅히 3국 모두의 노력을 전제로 하지만, 뭣보다 중국의 태세 전환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달라진 중국의 태도는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왕원빈 외교부 대변인의 25일 정례브리핑도 그중 하나다. 왕 대변인은 "중국, 일본, 한국은 이웃이고 중요한 협력 파트너다. 더 긴밀한 3자 협력이 3국 모두의 공동 이익에 이바지한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은 3자 협력 메커니즘을 중시하고 의장인 한국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도 했다.
한국 관련 언급이 긍정적 톤으로 바뀌었다. 중국이 '핵심 이익'으로 여기는 대만과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윤 대통령의 잦은 '개입'과 과도한 친일, 친미 행보를 놓고 관영 매체들은 물론, 중국 정부 차원에서도 날 선 말들을 던졌던 몇 개월 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중국의 기류 변화는 윤 정부의 '대화' 요청에 응한 데서 확인된다. 중국의 리창 총리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의 기간인 9월 7일 자카르타에서 윤 대통령의 면담 요청에 응했다. 이런 최고위급 만남은 작년 11월 윤석열-시진핑 프놈펜 회동 이후 10개월 만이었다.
보름 남짓 지난 9월 23일 윤 대통령은 항저우 아시안게임 축하 사절로 한덕수 국무총리를 현지에 파견했고, 시 주석은 한 총리를 만나줬다. 1992년 수교 이래 최악의 상황에 놓인 한‧중 관계 복원에 시동을 건 셈이다. 중국 외교부 발표문에는 없었지만, 시 주석이 먼저 '방한 문제'를 거론했다는 얘기도 있어 실제로 방한이 이뤄진다면 복원 속도는 더 빨라질 수 있다.
궁금한 점은 중국이 왜 태도를 바꿔 한‧중‧일 정상회의에 응하기로 했느냐다. 이렇다 할 설명이 없어 속내를 알 길 없지만, 중국이 처한 작금의 지정학적 상황을 살펴보면 자국의 전략적 이익에 바탕을 둔 '매우 현실적인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한·미·일 동맹화에 북·러 밀착 '설상가상'
중국을 둘러싼 지정학적 상황은 꽤 복잡하다. 크게 보면 두 줄기다.
하나는 인도·태평양전략에 맞춰 날로 강화되는 미국 주도의 대중 포위망 문제다. 경제에서 외교·안보를 거쳐 군사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이다. 동북아에선 8·18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로 상징되는 한·미·일의 군사동맹화와 첨단 반도체·기술 수출 통제를 포함한 대중 디리스킹(위험 제거) 가속화가 중국의 최대 고민거리다.
미국은 말과는 달리 행동으론 여전히 대중 포위망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일례로 미국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유엔총회 참석을 계기로 22일 뉴욕에서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4자 안보협의체) 외교장관 회의를 주재한 데 이어, 곧바로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도 열었다.
다른 하나는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이다. 한·미·일 군사동맹화에 대한 비상 대응의 성격이 짙지만, 지난달 13일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린 정상회담을 통해 확인된 북·러 양국의 군사협력 움직임은 한·미·일에는 물론이고 중국에도 달갑지 않은 상황 전개다.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세계 일류국가로 우뚝 서고자 하는 중국으로선 뭣보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이 중요한 만큼, 한반도의 비핵화와 현상 유지를 바란다.
자국을 겨냥한 한·미·일 군사동맹화에 거세게 반발하면서도 북·중·러 3국 결속과 동맹화를 통한 신냉전 대결 구도 형성을 중국이 꺼리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러, 평화 이용 내세워 북핵 완성 도울 길 많아
이런 와중에 북·러의 밀착은 현상을 뒤흔들 폭발력을 지니고 있어 중국에 여간 부담되는 게 아니다. ‘자주’를 내세우며 그 누구의 통제도 거부하는 북한이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핵무력을 완성하는 시나리오는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지각변동을 촉발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안보리 대북 결의를 위반하면서까지 '위성기술과 재래식 무기 교환'과 같은 대북 군사협력을 실행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평화적 이용'이란 명분을 내세우면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완성을 도울 길은 얼마든지 있다.
북핵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S. 헤커 박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 핵폭탄 연료 생산 △ 무기화 △ 지휘·통제 체제를 포함한 운반 체계 등 핵무기 프로그램의 세 분야 모두에서 러시아가 북한을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현실성이 큰 시나리오로 안보리 결의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우회해 민간 차원의 핵 원조란 명분으로 한 이중 용도의 기술 제공을 제시했다.
헤커 박사는 "러시아가 북한의 실험용 경수로 완성과 IRT-2000 재가동을 도울 수 있다. 우라늄 측면에선 전력 생산을 위한 경수로 연료라면서 몇 톤의 저농축우라늄(LEU)을 제공하고 북한은 그것을 손쉽게 무기급으로 농축을 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위성 발사 등 우주 프로그램과 로켓 관련 도움도 민간 부문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봤다.
한편 북한은 9월 26~27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9차 회의에서 "핵무력강화정책의 헌법화" 문제를 상정하고 "전폭적인 지지찬동 속에"(조선중앙TV 보도) 채택했다. 작년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법령으로 채택한 핵무력정책을 이젠 국가최고법인 헌법에까지 명시한 것이다.
한‧일 끌어들여 반중국 전선 이완, 북·러 견제하나
모스크바-평양의 밀착에 중국은 극도로 말을 아껴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북·러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2일 마오닝 외교부 대변인이 정례브리핑에서 "북한 지도자의 러시아 방문은 북러 사이의 일"이라고 논평했을 뿐이다. 다음날 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러시아와의 관계는 북한의 최우선 과제"라고 말한 데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내민 카드가 한‧중‧일 정상회의 재개다. 3국의 최고위 협력체를 복원함으로써 한·미·일의 반중 전선을 이완시키는 한편, 자칫 통제 불능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북·러의 결속 움직임에도 견제 메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일을 끌어들여 한‧미‧일 결속을 견제하는 한편, 북‧러에도 한반도와 동북아의 현상을 뒤바꿀 행동, 즉 '레드 라인'을 넘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로 들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미‧일과 북‧러 양쪽을 조율해가면서 주도권 확보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하나의 돌로 두 마리 새를 잡으려는 중국의 계산이 작용했음 직하다. 올해 의장국이 한국이고, 취임 후 윤 대통령의 과도한 반중 행동으로만 보면 한‧중‧일 정상회의 재개를 거절할 법도 하지만, 이를 수용하고 나아가 "조기 개최"에 응한 데서 중국이 처한 상황의 절박성과 함께 이런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국익 위주 실용 외교의 한 단면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나친 친일·친미, 반중 행보로 국격을 추락시키고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본 탓에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나머지 타개책의 하나로 뒤늦게 한·중 관계 복원에 나선 윤 정부나, 후쿠시마 원전 해양 투기와 관련한 중국의 반대를 누그러뜨리려는 기시다 일본 정부의 의도도 한 몫씩 했다.
왕이, 북한만 빼고 한·미·일에 러시아까지 만나
이런 맥락에서 한‧중‧일 최고위 협의체 복원과 시 주석의 방한 관련 언급은 특히 북한에 주는 메시지로도 볼 수 있다. 최근 몇 달 사이 종횡무진을 하는 중국 외교 외교사령탑인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의 움직임에서도 대북 견제 메시지가 드러난다.
왕이는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회의가 열렸던 자카르타에서 7월 14일 박진 외교장관, 하야시 요시마사 당시 일본 외무상과 각각 만난 데 이어, 8월 29일 박 장관과 장시간 전화 통화를 했다. 여기서 한‧중‧일 협의체의 조속한 재가동을 포함한 관계 복원에 의견을 모은 듯하다.
김정은 위원장의 러시아 극동 방문과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관련 내용이 9월 4일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알려지고, 실제로 13일 정상회담이 열리자 왕 부장은 동분서주했다.
16~17일에는 지중해 섬나라인 중립국 몰타에서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긴급 회동했고, 곧바로 모스크바로 날아가 18~21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 장관,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국가안보회의 서기에 이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푸틴 대통령도 만났다.
지난 두 달여 동안 왕 부장은 유독 북한만 빼고 한·미·일에 러시아까지 동북아 관련국을 모두 만난 것이다. 그의 이런 움직임이 앞으로 북·중 관계에 어떻게 투영될지 주목된다.
시, 한국에 "관계 중시, 정책·행동에 반영" 주문
시 주석은 이달 베이징에서 열리는 '일대일로'(BRI,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 10주년 정상포럼에 참여하는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11월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할 것으로 보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작년 11월 발리 회담 이후 1년 만에 재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 윤석열-시진핑 회동도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좋은 게 좋다'는 게 시 주석의 스탠스는 아니다. 중국 관영통신 신화사에 따르면 시 주석은 23일 한 총리 면담에서 "한국이 중국과 함께 중·한 관계를 중시하고 발전시키겠다는 것을 정책과 행동에 반영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우호 협력의 큰 방향을 유지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중·한 경제는 밀접하고 산업망과 공급망이 깊이 융합돼 양국이 상호 이익 협력을 심화해야 계속 성과를 낼 수 있다"고도 했다.
한국을 상대로 대만과 남중국해 문제 등 '중국 핵심 이익'을 존중하고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화, 디리스킹 등과 같은 냉전적 사고와 진영 대결을 삼갈 것을 주문하는 것으로 읽혔다.
상하이 대외경제무역대학의 잔더빈 한반도연구센터 주임은 중국 당국을 대변하는 관영 글로벌 타임스 기고(9월 18일)를 통해 “한국의 일부 집권 엘리트는 자신들도 한반도 긴장 고조의 공범임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그 대신에 북·러 관계 개선을 미·일이 닦아 놓은 신냉전의 도로를 따라 한국을 가속적으로 몰아대는 구실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 주석과 중국공산당과 관련해 전 세계 미군과 동맹국 군의 작전을 지휘하는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이 5월 2일 <포린어페어즈> 대담에서 했던 평가는 편견은 있겠지만 음미할 만하다.
"시진핑 주석은 매우, 매우 거칠고 단단한 사내고 노련한 현실주의자다." "중국공산당은 아주 무자비하나 비용과 이익, 리스크를 명확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자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