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학살 기록 없다는 일본정부 주장은 거짓"
다나카 센슈대 교수 “학살기록 공문서 있다”
도노무라 도쿄대 교수 “공문서로 학살 확인”
마쓰노 관방장관은 “찾지 못했다” “조사중”
한국정부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일본정부 두둔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많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거나 “불을 지르고 있다”는 근거없는 유언비어 때문에 일본인들 손에 살해당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지금까지 일본정부는 관련 기록이 없다며 학살사실 자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동 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 등 전문 연구자들은 당시 조선인 학살이 벌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며, 그것을 기록한 정부 공문서들을 포함해 다수의 기록들도 남아 있다면서, 일본정부가 이를 외면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나카 센슈대 교수 “학살기록 공문서 있다”
9월 1일 <아사히신문>은 다나카 마사타카 센슈(專修)대 교수(조선 근대사)가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사실)을 보여 주는 공문서는 존재한다”며, 국립국회도서관과 국립공문서관 등에 그것이 보관돼 있다고 말한 사실을 보도했다.
다나카 교수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이 방화하고 있다”는 따위의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가 퍼지자 내무성이 단속을 강화하도록 전국에 통지했으며, 단속 중에 도쿄 고토구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조선인을 찔러 죽였다는 사실이 기록된 문서가 남아 있다. 그밖에 내각 총리대신 명의로 “(일본)민중이 조선인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것이 (중략) 외국들에 보도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시한 문서도 남아 있다.
다나카 교수는 “이런 문서들을 작성할 수밖에 없는 사태에 이를 정도로 학살은 각지로 퍼져 나갔다”고 본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 경무국 보고서에는 조선인 시신에 대해 신원을 알 수 없도록 처리한 상황도 기록돼 있다.
마쓰노 관방장관 “찾지 못했다” “조사중”이라며 회피
하지만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지난 8월 말 기자회견에서 “정부 차원에서 조사해 본 바로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이런 일본정부의 자세에 대해 다나카 교수는 “유언(비어)으로 발생한 인권침해의 과거를 회피하려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당시 지진이 일어난 직후부터 조선인 학살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일본정부는 계속 “조사중”이라 얼버무리며 진상규명과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도쿄대 대학원 도노무라 마사루 교수(일본 근현대사)도 “조선인 학살이 없었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라며,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서도 있는데, 정부는 어디까지 조사를 해 봤는지 의문이 남는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 설명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인 학살을 둘러싼 논란은 관동 대지진 직후부터 벌어졌다. 1923년 12월 일본국회에서, 정부가 지방에 내려 보낸 전문을 토대로 조선인 학살의 사실 인정을 둘러싸고 논의가 이뤄졌으나, 일본정부는 그때도 “조사 중”이라며 분명한 입장 표명을 피했다.
도노무라 도쿄대 교수도 “공문서 통해 확인 가능”
하지만 국가 중앙방재회의의 ‘재난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조사회’가 2009년에 정리한 관동 대지진 보고서에는 “무기를 지닌 다수자가 비무장의 소수자에게 폭행을 가해 살해함으로써 학살이라는 표현이 타당한 사례가 많았다. 살상의 대상이 된 것은 조선인들이 가장 많았다”고 기재돼 있다.
그 근거로 도쿄도 공문서관 소장의 ‘관동 계엄사령부 상보’를 들면서, 그것을 통해 군이나 경찰에 의한 조선인 살상 등을 확인할 수 있다고 도노무라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이 내용에 대해서도 마쓰노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해당 기술은 유식자(有識者·지식인)가 집필한 것이고, 정부의 견해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고 대답했다.
학살에 대해 국회의원이 2015년 이후 모두 8차례 질의서를 제출했으나, 정부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을 찾지 못해,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답변만 계속하고 있다.
일본정부 여전히 “기록 찾지 못했다”
일본정부가 조선인들에 대한 범죄행위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거나, 조사 결과를 왜곡, 말살, 무시해 놓고는 그로 인한 공백을 근거로 ‘기록을 찾지 못했다’며 사실 확인과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정부의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자세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강점기에 일관되게 유지됐으며, 2차 대전 패전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정부 그런 일본정부 두둔
윤석열 정부 들어 ‘제3자 변제’ 방식으로 ‘해결’했다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고,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 투기에 대해서도 일본정부의 그런 자세는 바뀐 적이 없다. 그럼에도 윤 정부는 그런 일본정부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런 자세를 바꿈으로써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정부를 두둔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스스로를 일본정부 입장에 합치시키는 방식으로 문제해결을 떠넘기거나 피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