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우크라 평화안,서방-비서방 '깊은 골’ 드러내

"베트남 국민에 물어보라. 얼마나 많은 침략 받았나"

교전중지·한국식 DMZ설치·유엔관리 주민투표 제안

우크라 "러시아 쫓아내기전 이상한 중재 원치 않아"

EU 외교수장 "한국과 우크라 필요 탄약 지원 논의"

2023-06-05     이유 에디터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제20차 아시아안보회의 '샹그릴라 대화' 폐막. 2023 06 04 로이터 연합뉴스

현재 전선에서 교전 중지, DMZ(비무장지대) 설치, 분쟁 중인 지역들에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과 유엔 관리하에 주민투표 실시. 인도네시아가 공식 제안한 우크라이나 평화안이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국방부 장관은 3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제20차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이같은 내용의 평화안을 제안한 뒤 적대행위 중지 촉구 선언문을 채택하자고 호소했다.

프라보워 장관은 "나는 샹그릴라가 자발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즉각적인 평화협상 개시를 촉구하는 선언을 채택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특수군사령관을 지낸 프라보워 장관은 내년 인도네시아 대선에서 선두 주자다.

 

아시아다자안보회의에서 3일 연설하는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국방장관. 2023 06 03. EPA 연합뉴스

교전 중지·한국식 DMZ 설치·유엔 관리 주민투표 제안

로이터 통신과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그의 평화안은 현재 상황에서 교전을 중지하고, 쌍방의 전선에서 각각 15㎞씩 군대를 후방으로 이동시킨 후 한반도에서와 유사하게 DMZ을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돈바스를 비롯한 분쟁 중인 지역들에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상황을 관리하는 한편,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바램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유엔 관리 아래 주민투표를 시행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의 우크라이나 평화안 제안은 거센 반발을 불렀다. 미국의 로이드 오스틴, 중국의 리상푸, 한국의 이종섭을 포함해 41개국에서 국방장관과 고위 관료, 안보 전문가 약 600명이 참가한 대규모 다자안보회의 석상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함으로써 파장은 더욱 컸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서방 국가들로부터 비판이 쏟아졌다. 올레그 니콜렌코 우크라이나 외교부 대변인은 그 같은 평화안을 일축한 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군대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10개 항 평화안'을 지지할 것을 인도네시아에 촉구했다.

 

지난 5월 24일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에서 기자회견하는 FRL·RVC 부대원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우크라 "러시아 쫓아내기 전 이상한 중재자 원치 않아"

니콜렌코 대변인은 "러시아가 침략 행위를 저질렀고, 우크라이나 영토를 점령했다"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주민투표를 치러야 할 어떤 분쟁 지역들도 없다"고 주장했다.

회의에 참석한 올렉시 레즈니코우 우크라이나 국방장관도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를 쫓아내기 전에 "우리는 그런 이상한 방안을 내놓는 중재자들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도 "군사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이지, 굴복의 평화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카샤 올롱그렌 네덜란드 국방장관도 가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립은 선택지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여기 있는 모든 나라는 자국의 주권이 존중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의 거센 비판은 역으로 인도네시아의 기습적인 제안에 그만큼 충격을 받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미국과 유럽이 '글로벌 사우스'(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의 개도국, 저소득국) 국가들을 '러시아 침공' 비난 대열에 끌어들이고자 전방위 설득에 주력하는 와중에 기대와는 달리 인도네시아가 찬물을 끼얹고 나섰기 때문이다.

보기에 따라선 뜻밖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지난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각각 찾은 뒤 평화협상 재개를 위해 푸틴과 젤렌스키 두 정상의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어서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주요 20개국(G20) 의장국이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오른쪽에서 5번째)이 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세션에 참석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고 대러시아 제재 강화를 호소하기 위해 전날 일본을 방문했다. 2023.05.21. AFP 연합뉴스

인니 '우크라 평화안' 두고 서방과 비서방 '깊은 간극'

미국과 유럽의 고민은 글로벌 사우스 나라들이 보는 인도네시아의 존재감이 남다르다는 점이다. 올해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의 의장국인 만큼 프라보워 장관의 평화안 제안은 10개 회원국 전부는 아닐지라도 아세안의 지배적 견해를 대변했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 일과 관련해 파이낸셜타임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서방과 글로벌 사우스의 깊은 간극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동남아 최대 경제국인 인도네시아가 러시아의 침공을 공식 비난한 적은 있지만 이날 프라보워 장관의 발언은 '비(非) 서방' 국가들 사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상반된 정서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게 FT의 해석이다.

실제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일부 동남아 국가는 유엔의 우크라이나 지지 결의안 초안에 기권 또는 반대했고, 다른 개도국들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 동참에 미온적이었다.

최근 들어 서방 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유럽의 전쟁이 아니라 글로벌 전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에 대해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들의 반대 기류가 강화되는 양상이다.

브라질의 한 고위 외교정책 보좌관은 서구 강대국들은 '푸틴의 안보 우려'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러시아를 상대로 한 서방 진영의 거친 스탠스를 비판했다고 FT는 전했다.

중국 대표단은 인도네시아의 평화안 제안을 환영하고 '유럽의 비판'을 비판했다. 회의에 참석한 추이텐카이 전 주미 중국대사는 "인도네시아와 같은 우리 친구들의 엄청난 노력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유럽의 안보 상황 관리가 효과적이지 못하고 부실하다고 비판했다.

 

미군 병사들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155mm 포탄을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베트남 국민에 물어보라. 얼마나 많은 침략을 받았는지"

자신의 평화안 제안에 대한 유럽의 반발과 비판이 이어지자, 프라보워 장관은 맞받아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침략자와 침략당한 자를 똑같이 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일부의 대응도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서구 진영을 향해 뼈있는 말을 던졌다. 그는 한반도에서 남북한은 DMZ를 통해 50년간 평화를 유지해왔다고 언급하며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과 엄청난 파괴가 발생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 아시아인은 어쩌면 우크라이나가 겪은 것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분쟁과 전쟁을 겪었다. 베트남 국민, 캄보디아 국민, 그리고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물어보라. 얼마나 많은 침략을 받았는지"라고 반문했다.

한편 보렐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3일 샹그릴라 호텔에서 이종섭 장관과 회담을 마친 뒤 트위터를 통해 "우크라이나가 필요로 하는 탄약 등에 관해 논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합뉴스에 따르면, 국방부는 "EU 측에서 우크라이나의 대러 상황 개선을 위해 다양한 무기체계와 기타 지원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 그중 탄약이 중요하다는 일방적 입장 표명만 있었다"며 "우크라이나 탄약 지원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어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