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농복합안 과반 지지, 국민의 뜻으로 볼 수 없는 이유

도농복합안은 양당제 강화안으로 반개혁이다

2023-05-29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도농복합형 선거제도가 과반수(59%)의 지지를 받은 공론화 시민참여단 설문조사결과로 국회정개특위가 득의만만할 것 같다. 반대로 나는 이 설문조사결과가 눈에 가시처럼 아프다. 공론화과정 내내 우려했던 결과가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전면 공개된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도농복합안은 숙의과정이 끝난 후 찬성 59%, 반대 36%로 안정적 과반수 지지를 확보했다. 그것도 숙의 전 48% 찬성이 숙의 후에 59%로 높아졌다.

도농복합안은 국힘당이 제안하고 김진표 국회의장이 미는 안으로 알려졌다. 농촌지역은 지금처럼 소선거구제를 하되 2개 이상 소선거구를 가진 중대규모 도시는 2~4인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바꿔서 거대양당의 나눠먹기를 제도화하자는 내용이다. 도시지역구 출신 민주당 현역의원들에게도 경쟁완화효과가 있어서 나름 매력적이다. 다당제 정치개혁을 주창해온 민주당이 국민의 뜻을 따른다며 마지못해 올라타는 척 연기하기에 딱 좋은 조사결과가 나온 셈이다.

도농복합안이 배척받았다고 판단했던 근거

나는 지난번 글에서 당시 공개된 5개 핵심문항 조사결과를 검토한 후 도농복합안이 ‘실질적으로’ 또는 ‘사실상’ 배척되었다고 결론 맺으며 안도한 바 있다. 두 가지 근거가 있었다. 하나는 지역구의원을 뽑을 때 소선거구 선호의견이 56%, 중선거구 선호의견이 40%, 대선거구 선호의견이 4%로 드러난 조사결과였고 다른 하나는 전국단위 정당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제가 58%의 지지를 받은 반면 권역단위 정당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제는 40% 지지에 그친 조사결과였다.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시민참여단 선거제도 개편 공론조사에서 참여자들이 분임 토의를 하고 있다. 2023.5.6 연합뉴스

도농복합안은 도시중선거구와 농촌소선거구, 권역단위 병립형비례대표제로 구성돼 있다. 세 개의 구성요소 중 ‘지역구의원을 소선거구에서 뽑을 것이냐 중선거구에서 뽑을 것이냐’는 숙의 전에는 43% 대 42%로 아무 차이가 없었으나 숙의 후에는 56% 대 40%로 소선거구제 선호가 중선거구제 선호를 크게 눌렀다. ‘전국단위냐 권역단위냐’도 숙의 전에는 38% 대 45%로 권역단위 찬성의견이 앞섰으나 숙의 후에는 58% 대 40%로 전국단위 찬성의견이 크게 앞섰다. 이런 조사결과에 힘입어 나는 시민참여단이 숙의 후에 도농복합안을 사실상 배척했다고 해석했다. 돌이켜봐도 잘못된 해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내가 지난번 글을 쓸 때 짐작했던 바와 달리 전면 공개된 설문조사는 도농복합안, 대선거구비례대표제, 현행연동형비례대표제 등 선거제도 개편방안에 대해서도 추상적으로나마 의견을 물었다. 예를 들어 도농복합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문항은 도농복합안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도시에서는 여러 개 선거구를 합한 선거구에서 세 명 이상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농산어촌에서는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을 선출하자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숙의 전 48%, 숙의 후 59%가 찬성의 뜻을 밝혔기 때문에 국민의 과반수가 도농복합안을 지지한다고 주장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게 들어가면 그런 말이 안 나올 만큼 도농복합안에 대한 학습숙의자료에 문제가 많았다.

나눠먹기 비난 우려해 중선거구 크기부터 고무줄이다

중선거구가 몇 명을 뽑는 선거구인지부터가 불분명하다. 숙의자료집은 오락가락한다. 한 번은 2~4인까지 뽑는 선거구로, 다른 한 번은 2~5인까지 뽑는 선거구로 설명한다. 설문조사에서도 지역선거구의 바람직한 크기를 물을 때는 중선거구를 2~5인 선거구로 제시했으나, 도농복합안 찬반을 물을 때는 “도시에서는...3명 이상의 국회의원을 선출”한다며 아예 상한선을 언급하지 않았다. 설문조사문항이 무슨 이유로 3명을 하한선으로 설정했는지, 왜 5인을 상한선으로 제시하지 않았는지, 과연 도시에서 3인 이상 ‘중대선거구’를 할 생각이었는지, 의문투성이다. 명색이 전문가그룹이 어떻게 이런 오락가락 고무줄 정의를 거르지 않고 내보냈는지 의문이다.

힌트가 없지는 않다. 통상적으로 중선거구는 2~4인 선거구를 의미하는데 숙의자료집이나 설문조사문항은 굳이 2인은 빼고 5인은 넣는 모습을 보였다. 2인을 놓고 오락가락한 이유는 2인 중선거구를 포함시킬 경우 양당의 의석 나눠먹기 방안이라는 비난이 쏟아질까 걱정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인 중선거구를 무리하게 집어넣는 이유도 나눠먹기 비난에 대한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5인 선거구부터는 대선거구로 보고 비례대표제로 다섯 명을 선출한다. 현실적으로도 제3당이 치고 들어올 여지가 있는 5인 중선거구를 거대양당이 입법할 리 없지만 5인 중선거구의 가능성을 풍겨야만 양당 나눠먹기 용도만은 아니잖냐고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런 추론이 사실이라면 국회정개특위와 전문가그룹은 도농복합안 구하기에 나섰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5인 선거구는 대선거구로 봐야 맞다

일반적으로 5인 선거구를 대선거구로 분류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2,3인 중선거구제에서는 유권자가 후보 1명에게 한 표를 주고 상대다수득표 순으로 당선자 2인 또는 3인을 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만약 3인 중선거구에서 1등이 40%, 2등이 30%, 3등이 20%를 득표해서 당선됐다고 가정할 경우 유효투표의 10%만 사표가 되는 셈이라 대표성이 대폭 높아진다. 반면에 득표율 40%도 국회의원 1인, 득표율 20%도 국회의원 1인을 내기 때문에 표의 결과적 등가성이 떨어진다. 만약 4,5인 선거구에서도 2,3인 선거구처럼 상대다수득표 순으로 당선자를 뽑는다면 10% 미만 당선자가 나올 수 있어서 표의 등가성은 더 떨어진다.

4인을 뽑는 중선거구에서는 다소 무리하더라도 상대다수득표 순으로 당선자를 정할 수 있지만 한 선거구에서 5인 이상을 뽑을 경우에는 표의 비등가성 문제가 극심해져서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5인 중선거구에서 1등은 40%로 당선된 반면 5등은 8%로 당선된 경우 1등 당선의원과 5등 당선의원 간에는 소속정당이 같건 다르건 민주적 정당성에서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반면 5인 대선거구에서 비례대표제로 당선된 다섯 명의 의원들은 그렇지 않다. 당이 달라도 비례대표의원은 1인당 (정당)득표수에서 차이가 없어서 민주적 정당성에서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당이 같으면 비례대표 순번차이가 나겠지만 상위순번과 하위순번이 한 팀으로 표를 받은 데다 다양한 전략적 고려로 순번이 결정되기 때문에 순번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정당성에서 차이가 없다.

그래서다. 5인 선거구부터는 표의 등가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비례대표제로 당선자를 뽑는 게 바람직하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2~4인 선거구를 중선거구로 분류하고 5인 선거구부터 대선거구로 분류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숙의자료집과 설문조사문항은 5인 선거구도 중선거구로 삼아 상대다수득표 순으로 당선자를 선출할 것처럼 설명한다. 중선거구제에 따라붙는 거대양당의 나눠먹기 선거제라는 비판을 물타기하고 도농복합안 찬성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는 의혹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중선거구제 59% 찬성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다.

적절한 정보제공과 학습숙의 없이 내려진 깜깜이 판단이다

도농복합안과 관련해서 시민참여단이 제공받은 정보는 정말 빈약했다. 지금도 2개 이상 소선거구로 나뉘어서 2인 이상 국회의원을 내는 도시에선 중선거구제가 가능하다. 이런 도시리스트와 도시별 국회의원 수, 그리고 이런 도시출신 지역구의원의 총수와 정당별 분포 정보는 기본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특히 ‘3인 이상’ 도시에서 중선거구제 실시 찬반을 설문조사에서 물을 요량이면 현재 3인 이상 국회의원을 뽑는 도시가 어디이며, 도시별로 몇 명이 뽑히고 정당별 의원분포는 어떤지, 3인 이상 도시의 총 의원 수는 몇 명이고 정당별 분포는 어떤지를 알려줘야 당연하다. 숙의자료집과 전문가그룹은 이런 기본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시민참여단은 설문조사문항이 예정하고 있듯이 2인 도시중선거구가 과연 안 만들어질지, 4,5인 중선거구를 만들어낼 의지가 있는지, 실제로는 2,3인 중선거구로 지역구의원의 90%이상을 뽑는 게 아닐지 같은 질문들에 대해 조금도 학습ㆍ숙의하지 못한 채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시민참여단은 적절한 정보나 맥락이 주어지지 않은 깜깜이 상태에서 “도시에서 3명 이상을 뽑고 농촌에선 1명만 뽑는 선거제도”에 찬반의견을 밝히라고 요구받았다. 설문조사는 달랑 이 문항만 던지고 찬성이유나 반대이유를 더 캐묻지 않았다. 다른 개편방안들과 비교할 때 어떤 점을 장점으로, 어떤 점을 단점으로 생각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도농개편안과 다른 개편안들을 다 내놓고 선호순위를 적어보라는 문항도 없었다. 특히, 도농복합안으로 과연 양당제 극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예시한 사항들은 중선거구제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하나같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공론화과정에서 정보제공과 학습숙의, 설문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중선거구제를 포함한 도농복합안에 59%가 찬성했다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떤 이유로 찬성했는지 특정하기 어렵다. 요컨대 시민참여단의 59% 찬성의견은 도농복합안의 구체적 모습과 의미, 효과를 제대로 알지 못한 깜깜이 상태에서 나온 결과다.

양당제고착효과에 대한 정보제공과 학습숙의가 없었던 게 치명적 결함이다

가장 결정적인 결함은 숙의자료집이 도농복합안의 3대 구성요소가 모두 양당제 고착 또는 강화효과를 갖는다는 점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제공하지 않는 데 있다. 도농복합안은 인구 30만 이상 중대규모 도시에서 2~4인 중선거구제를 실시함으로써 양당의 의석 나눠먹기를 보장하는 선거제도라는 점에서, 나머지 1인 국회의원 도시지역이나 농촌지역에서는 지금처럼 소선거구제를 그대로 유지해서 양당 후보 중 하나의 당선을 보장하는 선거제도라는 점에서, 또한 47석 비례대표제를 권역단위로 실시함으로써 영호남 취약지역에서 양당의 나눠먹기를 보장하는 선거제도라는 점에서, 철저하게 양당제 고착장치다.

만약 도시중선거구를 2~5인을 뽑는 중선거구로 바꾸기로 여야가 합의할 경우에도 현실의 입법단계에서는 지역구의원의 90% 이상을 2,3인 중선거구에서 뽑는 방식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거대양당이 제3당에 의석을 내줄 수 있는 5인 중선거구를 아예 없애고 4인 중선거구도 몇 군데서 시늉만 낼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수도권의 2,3인 도시중선거구에서 거대양당은 최소한 한 석씩을 나란히 획득하며 양당제를 고착하게 될 것이다. 설령 4,5인 중선거구를 미끼삼아 서너 개 둔다고 해도 제3당이 끼어드는 건 쉽지 않다. 선거법상 중선거구제로 실시되는 기초의회 선거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공천탈락에 반발해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거대양당출신 후보들을 제외한 순수 제3당 출신 당선자는 지난 2022년 기초의회선거에서 1%도 당선되지 못했다. 거대양당의 벽이 그만큼 높다.

이렇게 볼 때 도시중선거구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양대 축으로 삼는 도농복합안은 100% 양당제 고착, 강화로 귀결될 게 틀림없다. 한마디로 도농복합안은 김진표 국회의장이 그토록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해온 양당제 정치를 온존시킨다. 그럼에도 숙의자료집은 도농복합안의 양당제 고착가능성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는바, 이런 치명적 하자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미스테리다. 전문가 질의응답시간에서도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아서 도농복합안을 찬성한 59%는 양당제 고착효과를 제대로 모른 채로 찬성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랬다면 59%가 아니라 99%가 찬성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수치일 뿐이다.

만약 이번 선거제개편의 목적이 국회전원위에서 발언한 많은 국회의원들이 그토록 강조해온바, 소선거구에 뿌리를 둔 양당제의 적대적 공생정치를 극복하는 데 있다면 도농복합안은 그 목표를 역주행하는 양당제 고착 선거제도로서 조금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 그럼에도 숙의자료집에 중선거구제, 특히 2,3인 중선거구의 경우 거대양당의 나눠먹기 효과가 확실해서 양당제를 더 고착시킬까 우려된다는 언급이 아예 빠진 부분은 공론화 첫날을 맡은 전문가그룹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치명적인 흠이 아닐 수 없다.

 

2024 정치개혁공동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23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선거개혁 원칙과 방향에 따른 국회 논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23.3.23 연합뉴스

투표효능감을 중시한 유권자 정서가 찬성의견을 이끌었다

그래도 공론화 시민참여단의 설문조사결과를 깡그리 불신하는 것은 동료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 있다. 굳이 합리화하자면 도농복합안에 대한 시민참여단의 59% 지지율은 사표를 많이 만들고 불비례성이 높은 소선거구제는 극복해야겠는데 정당투표 중심의 대선거구 비례대표제 또는 더 광역단위 비례대표제로 바꾸는 건 왠지 꺼려지는 소박한 유권자정서의 산물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국회의장자문위는 도농복합안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두 가지 장치를 동원했다. 먼저 지역소멸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역대표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가 농촌지역의 소선거구제 유지옹호논리로 개발됐다. 다음으로 영호남지역주의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47석 비례의석을 지금처럼 전국단위 정당득표율로 나눌 게 아니라 권역별 정당득표율에 따라 나눠야한다는 논리가 동원됐다.

둘 다 웬만큼 설득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숙의 후 설문조사에서 권역단위 비례대표제보다 전국단위 비례대표제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70%에 달했지만 이들의 대다수도 도농복합안 문항이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 없이 찬성을 누를 수 있었다. 내 손으로 우리지역대표를 뽑고 갈아 치우는 투표효능감을 중시해서 소선거구제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이들 중에도 도시중선구제를 차선책으로 찬성한 이들이 많았다. 중선거구에서도 소선거구처럼 유권자가 후보 1인을 찍기 때문에 나름 투표효능감이 있지만 대선거구로 가면 정당(명부)투표만 할 뿐이라 투표효능감이 떨어진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학습과 숙의시간이 충분했다면 소선거구제나 그 연장으로서 중선거구제가 제공하는 유권자효능감이 과연 그로 말미암은 사표, 불비례성, 양당제, 적대적 공생정치, 국가의제 실종, 정치 불신 등 사회비용을 감내할 만큼 가치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볼 수 있었겠지만 이번 공론화는 선거제의 다양한 측면을 제대로 학습숙의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특히 첫날 주제를 담당했던 전문가그룹이 작성한 숙의자료와 발표내용, 질의응답이 밋밋하고 불충분했다. 도농복합안은 둘째 날에 다른 대안들과 비교하며 함께 다뤄졌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실제로는 첫날 이것만 따로 다뤘기 때문에 그럴듯한 선입관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표성으로 소선거구제, 책임성으로 대선거구제를 배척했다

도농복합안에 대한 59% 지지를 이끌어낸 마지막 요인은 전문가그룹의 선거제도 3대원칙 이해 및 설명, 적용 방식이다. 그동안 선거제개편 3대원칙의 하나로 꼽히던 다양성 원칙 대신 책임성 원칙이 등장했다. 책임성 원칙은 정당과 대표자에게 공히 적용 가능한 개념이지만 숙의자료집은 ‘누가 나를 대표하는지를 알 수 있는지, 그와 근접거리에서 소통하며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를 구체적 기준으로 제시함으로써 책임성원칙을 개별의원 책임성으로 국한했다. 이렇게 해석된 책임성 개념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뽑았는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알기 어려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와 그 지역구인 대선거구제를 동시에 밀어내게 된다.

실제로도 숙의자료집은 책임성 원칙이 대선거구와 비례대표제에 전혀 친하지 않다고 설명했고 전문가들도 질의응답시간에 같은 취지로 설명했다. 시민참여단의 입장에서는 대표성 원칙 때문에 사표를 양산하는 소선거구제를 배척하고 책임성원칙 때문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할지 알기 어려운 대선거구 비례대표제를 배척하고나면 자연스레 중선거구가 남았을 것이다. 만약 정당책임성도 함께 짚어줬더라면 대선거구 비례대표제도 일장일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됐을 것이다. 숙의자료집은 개별의원 책임성을 내세움으로써 소선거구제와 중선거구제를 은근슬쩍 옹호했다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숙의자료집은 대표성 개념도 국민재현성으로 정의했으나 막상 선거제 평가기준으로 사용할 때에는 사표최소성 개념으로 사용했다. 전문가그룹의 중립성뿐 아니라 전문성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시민참여단은 농촌지역은 소멸위험을 막고 지역대표성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소선거구를 유지하되, 도시지역은 소선거구제의 폐단을 극복하면서도 책임성=유권자효능감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중선거구로 바꾸자는 도농복합안을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 사이의 중간타협책으로 생각하고 지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도시선거구의 크기를 소선거구와 대선거구의 중간인 중선거구제로 개편하는 것에 발 맞춰서 비례대표제도 대선거구와 전국구의 중간인 권역단위로 개편하자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설명해도 시민참여단이 도농복합안에 내장된 양당제 강화효과를 학습하지 못하고 도농복합안에 손을 들어준 것은 치명적 잘못이다. 이는 시민참여단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전적으로 전문가그룹이 적정한 학습숙의시간과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회정개특위와 전문가그룹의 설명책임을 요구한다

도농복합안에 대한 숙의 후 지지율이 59%까지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지지율은 충분한 학습과 숙의로 뒷받침된 게 아니다. 설문조사결과를 종합적으로 해석해보면 오히려 ‘나 홀로’ 튀는 조사결과로 봐야 한다. 두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도농복합안의 양대 구성요소인 도시중선거구와 권역별비례대표제에 대해 각각 안정적인 과반수 반대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다. 양대 구성요소는 반대하지만 전체 그림은 찬성한다는 것이니 이상하지 않은가.

둘째, 도농복합안 찬성의견은 비례성 강화라는 설문조사결과의 분명하고 일관된 흐름에 배치된다. 비례성 강화 흐름은 최소한 다음 4개의 설문조사결과에서 확인된다.

첫째, 현행 연동형비례대표제 유지나 강화의견이 과반수(52%)로 병립형 회귀의견(41%)을 확실하게 누른다. 둘째, 소수민심도 용이하게 비례대표 될 수 있도록 권역단위보다 전국단위 비례대표제를 과반수(58%)가 선호한다. 셋째, 비례대표의석 확대에 압도적 과반수(70%)가 찬성하며 비례대표의석 축소의견(10%)이 쏙 들어갔다. 넷째, 의원세비와 보좌진인건비 감축분만큼 의원정수를 늘리는 데 과반수(55%)가 찬성한다. 그렇다. 숙의 후 설문조사결과로 확인된 국민의 뜻은 의원세비와 보좌진을 줄여서 의원정수를 늘리되 모두 비례대표 의석으로 채우고 현행 소선거구와 결합된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살리라는 것이지 어떻게 봐도 도농복합안을 시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숙의자료집의 3대원칙에 비춰보더라도 현행 소선거구 혼합식 전국단위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도시중선거구제-농촌소선거구제-권역단위 병립형 비례대표제 복합안(도농복합안) 중 어느 것이 나은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하다.

국민재현성으로 해석된 대표성의 관점에선 다양한 직능후보나 소수집단 후보를 정당명부에 포함시킬 수 있는 현행 전국단위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농복합안의 도시중선거구제나 권역단위 비례대표제보다 우월하다. 사표최소성으로 해석된 대표성의 관점에선 지역구선거에서 사표가 대폭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하는 도농복합안의 도시중선거구제가 지역구선거를 모두 소선거구제로 치르는 현행 혼합식 연동형비례대표제보다 낫다. 그렇지만 도농복합안의 권역단위 비례대표제는 현행 전국단위 비례대표제보다 사표가 많이 발생해서 그만 못하다. 요컨대, 숙의자료집이 규정한 대표성의 관점에서는 현행 혼합식 연동형비례대표제가 월등한 반면 일반적인 사표최소성의 관점에서는 두 제도가 일장일단이 있어서 엇비슷하다.

개별의원 책임성에 관한 한, 모든 지역구의원을 소선거구에서 뽑는 현행 혼합식 선거제도가 도농복합안의 도시중선거구제를 확실하게 압도한다. 정당책임성에 관해서도, 별도의 정당투표를 통해 원칙적으로 모든 의석에 정당책임성을 물을 수 있는 현행 연동형비례대표제가 별도의 정당투표를 통해 비례대표의석 47석에만 정당책임을 물을 수 있는 도농복합안의 병립형 비례대표제보다 우월하다. 끝으로 정당득표율과 정당의석수의 비례성에서는 현행 연동형비례대표제가 당연히 도농복합안을 압도한다. 한마디로, 현행 소선거구 혼합식 50% 연동형비례대표제는 숙의자료집을 만든 전문가그룹이 선거제 판단기준으로 삼은 3대원칙의 관점에서도 도농복합안의 모든 요소에 우월한 게 틀림없다.

나는 선거제 공론화과정의 학습숙의를 책임진 12인의 전문가그룹에게 이 글에서 제시한 결론과 논거에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답해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 또한 국회정개특위에도 위에서 살펴본 다양한 반대논거에도 불구하고 도농복합안이 과연 국민의 뜻이라고 생각하는지, 나아가서 그 방향으로 입법을 추진할 생각인지 설명책임을 다해주기를 정중하게 요청한다. 국회정개특위와 전문가그룹은 향후 활성화될 숙의민주주의적인 공론화과정의 신뢰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도 내 질문에 답할 의무가 있다.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