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이념에 대하여, 또는 철학적 사유의 근원에 대하여

[형이상학 강의 ③]

2023-05-14     김상봉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1. 놀라움이 철학적 물음의 시작이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과학적 인식과 철학적 지혜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를 배웠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두 가지 모두 원인과 근거에 대한 앎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인식이지만, 과학적 인식이 삼라만상의 특정한 부분을 탐구하는 인식이라면, 철학적 지혜는 전체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렇다면 그 전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리고 한갓 세계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우리 인간이 또는 여기 있는 내가 무슨 능력이나 권리로 그 전체를 인식할 수 있느냐, 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은 이 문제에 들어가지 않고 잠깐 돌음길을 돌아가려 합니다. 우리는 철학이 모든 것의 원인을 묻는 학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의 원인이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것일 때, 그리스인들은 그런 원인을 아르케, 곧 근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철학은 그런 근원에 대한 물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생각해봅시다. 세상만사가 원인이 있고 근원이 있다면 철학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근원을 묻는 철학의 근원은 또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해 우리는 다양한 방식과 관점으로부터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정해진 입구도 출구도 없는 학문이어서 어디서 시작되는지, 그 근원을 한 가지로 말하기 어려운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물음은 너무도 많은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는 물음으로서, 정해진 답이 없는 물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저 자신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를 모두 도외시하고 늘 그랬듯이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소개하려 합니다.

그는 먼저, 사람이 철학적 사색에 들어가게 되는 주관적 동기가 문제라면, 그것이 놀라움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학문이 제작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으로 철학을 했던 사람들을 돌아보아도 분명하다.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지만 처음으로 철학하기 시작했던 까닭도 그들의 놀라움 때문이다. 처음에 그들은 수많은 이상한 일 중에서도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로부터 조금씩 더 앞으로 나아가 보다 더 거창한 문제들에 관해 당혹감을 느꼈는데, 이를테면 달이 보여주는 특이한 현상이나 해와 별에 관한 현상 그리고 더 나아가 만물의 탄생에 대한 당혹감이 그런 것이다.” [『형이상학』, 1권 2장, 982b11]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어떤 놀라움이 철학의 기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그런 것일까요? 아마도 옛사람이라면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라고 노래했던,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를 떠올렸을 법도 합니다. 아니면 새봄이 오면 마치 죽었던 것처럼 앙상한 나무 가지에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매년 경험하는 그 현상에 대해 경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생명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얼마나 신비한 것인가요.

 

생각하는 인간. 사진 픽사베이

하지만 도회지의 빌딩 숲 속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와 학원에 매여 있어야 하는 오늘의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봄에 피어나는 꽃이나 무지개가 과연 얼마나 가슴을 뛰게 하는 신비한 대상일 수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청소년들에게는 차라리 매일 한 번쯤은 손에 쥘 수도 있을 티브이나 자동차의 리모컨 같은 것이 더 좋은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은 주말에 쉬면서 티브이를 볼 때 으레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고 소리를 크게 또는 작게 만들어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부모님들이 자동차를 운전하러 가면서 리모컨으로 자동차의 문을 여는 것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전에는 열쇠로 자동차의 문을 잠그고 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열쇠를 돌리면 문 안의 기계장치에 의해 문이 잠기고 열리는 것이지요. 그런 기계장치는 원칙적으로 접촉에 의해 힘이 전달되기 때문에 문에 빗장이 걸리고 풀리는 원리에 따라 작동합니다. 그런데 리모컨은 그런 접촉에 의존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리모컨이란 리모트 컨트롤의 줄임말이니까, 말 그대로 멀리 있는(remote) 것, 다시 말해 접촉하지 않는 것을 움직이는 기기(機器)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고 리모컨은 어떻게 멀리 있는 기계에 작용을 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마 여러분은 빛이나 전자파 같은 것을 쏘아 멀리 있는 기계에 작용을 가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물을 것입니다. 하지만 빛이나 전자파 같은 것이 어떻게 공간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느냐고 물으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사실, 물리학자들은 아직도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전자파가 일종의 파동이라면, 물결이 물이라는 매개물질에 의해, 그리고 소리가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듯이, 전자파를 전달해주는 어떤 매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매질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리모컨이 어떻게 멀리 있는 물건에 작용을 가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친숙하게 대하는 사실인데, 까닭을 알 수 없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당혹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철학적 사유의 출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철학적 사유의 근원을 놀라움이라고 말한 것은 플라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역시 ‘놀라워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자의 마음 상태이며, 놀라움이 아니라면 철학의 다른 근원은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정준영 옮김, 『테아이테토스』, 155D]

매일 보는 일인데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놀라움을 느낍니다. 그 놀라움은 긍정적인 의미의 경탄일 수도 있지만, 당혹감일 수도 있습니다. 더러는 너무도 친숙하고 가까이 있는 일인데, 또한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멀리 있는 일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라는 물음 속에서 그렇게 친숙한 나 자신이 아득히 낯선 존재로 멀어집니다. 그렇게 가까움과 멀리있음 사이에서 우리는 문득 알 수 없는 신비감 속에서 어떤 놀라움과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당혹감 속에서 묻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 물음이 철학적 사유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니 철학으로 통하는 블랙홀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놀라운 현상들이 어떤 식으로든 철학적 사유를 촉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서 인용한 글에서 최초에 철학을 시작했던 그리스인들이 놀라워했던 보다 더 거창한 대상이 바로 달과 해 그리고 별에 관한 것이라고 전해줍니다. 일식과 월식 그리고 행성의 역행 운동 같은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을 사로잡았던 가장 결정적인 놀라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하면, 이런 놀라움은 아직은 과학적 인식의 근원이지, 철학적 지혜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철학이 과학과 신학 사이에 놓인 다리와 같은 것이라면, 과학적 탐구의 근원이 철학적 사유의 근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적 지혜가 과학적 인식과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라면, 같은 놀라움이라도 철학적 사유를 촉발하는 놀라움은 과학적 사유를 촉발하는 놀라움과 달라야 할 것입니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에 기대에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그런 철학적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전형적인 경우가 바로 만물의 탄생에 대한 당혹감입니다. 여기서도 문제는 만물, 즉 ‘모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놀라움과 당혹감이라도 그것이 모든 것에 관한 것일 때, 그것이야말로 철학적 놀라움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2. 철학과 자유의 이념

이런 놀라움 속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무지입니다. 무지는 정신의 어둠입니다. 눈이 어둠 속에서 빛을 찾듯이, 정신은 무지의 어둠 속에서 앎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추구되는 앎은 정신의 밝음을 위한 것일 뿐, 다른 실용적 목적을 위한 앎이 아닙니다. 이처럼 철학적 앎, 곧 지혜가 앎을 위한 앎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자기 아닌 다른 것을 위한 앎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앎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적 지혜의 이런 성격을 자유인의 존재에 빗대어 자유로운 학문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앞의 강의에서 본 바와 같습니다. 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자유인이듯이, 철학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므로 자유로운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철학이 자유로운 학문이라는 말은 단지 이 학문의 자기목적적인 성격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로 동원된 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본질과 근원을 나타내는 어떤 지평 개념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지평이란 쉽게 말하자면 철학이 탄생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장소가 지리적 장소가 아니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어떤 정신적 상황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저는 자유라는 것이 철학이 탄생한 시원을 가리키는 어떤 지평 개념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지평은 사물이 놓여 있는 시-공간적 위상 또는 더 쉽게 말하면 배경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장소와 달리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지평 속에 놓여 있는 산과 들 그리고 집 같은 사물입니다. 그러니까 지평은 그 속에서 구체적 지형이나 사물이 존재하고 나타나는 어떤 배경입니다.

그런데 제가 자유라는 것이 철학의 지평개념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에서 철학이라는 학문이 철저히 자유의 이념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단지 그리스에서만이 아니라 서양 철학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자유의 이념은 이 학문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생명과도 같은 것으로서 서양 철학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자유에서 시작해서 자유에서 끝난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닙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독일의 철학자 헤겔(G. W. F. Hegel)이 인류의 역사를 자유의 진보와 확장의 역사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역사의 목적을 자유의 실현이라고 본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무나, 아무런 문맥에서나, 되는 대로 자유를 입에 올리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조차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떠드는 시대가 우리 시대입니다. 그러니 헤겔이 자유를 역사의 궁극 목적으로 보았다는 것이 놀라울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논리적 사유의 근거를 물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오직 자유만이 구속의 근원일 수 있다. 논리학의 근본 문제, 즉 사유의 법칙성은 그 근저에서는 인간 실존의 문제, 즉 자유의 문제로 밝혀진다.” [하이데거, 김재철 옮김, 『논리학의 형이상학적 시원근거들』, 43쪽]

논리학이란 쉽게 말하자면, ‘A는 B와 같다. B는 C와 같다. 그러므로 A도 C와 같다.’처럼 순전히 형식적인 생각의 법칙을 따지는 학문입니다. A, B, C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논리학자는 묻지 않습니다. 논리학은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A]와 다른 하나[B]가 동일한 제3의 것[C]과 같다면 그 둘[A와 B]도 서로 같아야 한다는 것을 사유의 법칙으로서 제시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그런 논리학의 근본 문제가 다른 것이 아니고 자유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도대체 논리학이 자유와 무슨 상관인지는 더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논리학을 두고 그것의 근본 문제가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것을 두고 자유를 말하지 못하겠습니까? 피히테는 자유의 개념을 절대시한 나머지 심지어 존재보다 자유가 앞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존재의 개념은 결코 첫 번째 근원적 개념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파생적 개념으로, 그러하되 활동성에 대한 대립을 통해 파생된 개념, 그리하여 오직 부정적인 개념으로 고찰된다. 관념론자에게 유일하게 긍정적인 것은 자유이다. 존재란 그에겐 앞의 것의 한갓 부정일 뿐이다.” [『지식론에 대한 제2서론』, Fichtes Werke, Bd. I, p.499]

여기서 피히테는 자유는 활동에 존립하지만 존재는 그것의 부정인 까닭에 자유보다 앞서는 근원적 개념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양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윤리적 가치를 말할 때도, 아름다움이나 숭고와도 같은 미학적 가치를 말할 때도 그리고 존재를 말할 때도, 자유의 이념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칸트가 자연의 법칙과 다른 도덕 법칙을 말할 때, 그것을 자유의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은 명시적으로 자유를 입에 올린 것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때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아름다움의 본질로서 자유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의 동상. 사진 픽사베이

칸트는 아름다움을 다른 무엇보다 관심에 매이지 않는 즐거움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화가가 빵과 사과를 앞에 놓고 정물화를 그릴 때, 그가 너무 배가 고파 탁자 위의 빵과 사과를 보면서 참을 수 없는 식욕을 느낀다면, 그는 식욕이라는 관심에 얽매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상의 아름다움을 차분히 관조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겠지요. 화가가 자기가 그리는 대상을 순수하게 아름다운 대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다른 어떤 관심도 없어야 합니다.

미적 체험을 방해하는 이런 관심 가운데는 도덕적 관심도 포함됩니다. 칸트는 베르사유 궁전을 보면서 우리가 그 건축물이 전제군주가 인민의 고혈을 짜내어 지은 건물이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면, 그 건축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관조할 수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경복궁을 보면서 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하여 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고 백성을 수탈해서 지은 건물이라는 생각에 계속 사로잡혀 있다면 도덕적 불쾌감이 심미적 만족감을 방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칸트는 우리가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서 느낄 수 있으려면, 육체적 욕망뿐만 아니라 도덕적 관심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어떤 관심에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로운 마음 상태에서 우리가 느끼는 심미적 대상에 대한 쾌감을 가리켜 칸트는 무관심적인 만족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저런 관심에 얽매이지 않는 것, 그것도 일종의 자유입니다. 자연적 욕망의 강제에 얽매이지도 않고, 도덕적 당위라는 다른 종류의 강제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냥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가 느끼는 충만한 기쁨이, 칸트가 말하는 심미적 만족감입니다. 자유가 다른 무엇보다 강제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자유로운 만족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칸트는 이것을 명시적으로 자유로운 만족감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의 이념은 칸트 미학의 체계를 이루는 특정한 벽돌이 아니고 그 체계가 놓여 있는 지평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서양 철학에서 이처럼 자유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일종의 지평개념으로서 철학 체계를 지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넘치도록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여러 가지 덕목들을 나열하면서 가장 먼저 용기를 내세우고, 그 용기 가운데서도 다시 시민적 용기를 으뜸가는 미덕으로 칭송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국가가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동체였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노예에게 필요한 덕목은 용기가 아니라 예절입니다. 그러므로 계급 사회에서는 예의범절이 으뜸가는 윤리적 덕목으로 칭송됩니다. 그리고 예의란 으레, 권력 관계에서 상위에 있는 사람에게 하위에 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규범입니다. 그러나 자유인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덕목은 그런 예의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유인이 용기가 없다면 있던 자유도 빼앗기고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것과 훌륭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내가 자유를 잃고 노예로 전락한다면, 나의 그 모든 좋은 것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내가 지닌 내적 탁월함도 외적 자산도 모두 내가 자유를 잃지 않는 한에서 나에게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인에게 으뜸가는 가치는 자유 그 자체를 지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 자유인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덕목이 용기, 그것도 시민적 용기입니다. 여기서 시민적 용기란 안으로는 독재자로부터 그리고 밖으로는 침략자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니까 윤리학에서도 자유는 어떤 특정한 덕목으로 제시되지 않으면서 모든 덕목의 근저에 놓여 있는 어떤 지평 개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정은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똑같은 의미와 가치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햇빛 아래 설 때, 내 뒤로 생기는 그림자는 나 자신의 신체와 똑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신체는 집안으로 들어와도 그대로 있지만, 아까의 그 그림자는 사라지고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나의 신체는 진짜로 있는 것이지만, 그림자는 의존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연필을 봅시다. 그것은 갈색입니다. 그런데 연필의 색깔은 연필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연필은 검은색이든 흰색이든 연필로 존재하지만, 연필의 색은 연필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우리는 연필은 진짜로 있는 것이지만 색깔은 어떤 것에 의존해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진짜로 있는 것을 실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런 실체에 의존해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을 속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실체의 특성을 가리켜 분리되어 자기 스스로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실체의 분리가능성이란 자립성입니다. 그런데 자립성은 스스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것 역시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윤리학이나 미학뿐만 아니라 존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에서도 이처럼 자유는 명시적으로 말해지지 않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지평 개념으로 전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속성처럼 남에게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부수적인 존재는 기생적이고 노예적인 존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에서 실체와 속성의 구별은 더도 덜도 아니고 자유로운 존재와 노예적 존재의 형이상학적 대비인 것입니다.

형이상학이 자유로운 학문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도 우리는 이런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갓 유비(analogy)로 쓰인 말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 말은 좁게는 그리스 철학, 넓게는 서양 철학 전체의 근본적이고도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 이념이 유비의 형태를 빌려 자기를 드러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유적. 사진 픽사베이

하지만 여러분은, 자유의 이념이 그렇게 중요한 관심사였다면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념을 유비의 형식으로 말했는가, 하고 되물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앞서 본 대로 하이데거나 피히테처럼 왜 자유를 명시적으로 철학의 근본 개념으로서 제시하지 않았는지 물을 것입니다. 그 까닭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자유는 보편적 사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땅 위에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특수한 권리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유의 이념이 보편학으로서의 철학이 직접적인 탐구 주제로 삼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언제나 전체에 관계하는 학문이어야 하므로, 인간의 삶에서 부분적 사실에 지나지 않는 자유를 보편적 탐구의 주제로 제시하는 것이 부적절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인들은 자유가 모든 인간에게 확장될 수 있는 보편적 사태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 다른 모든 노예적 삶의 방식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존재의 차원에서든 윤리의 차원에서든지 간에 어떤 완전성이 문제가 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 다른 어떤 존재방식보다도 탁월하다는 믿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그 암묵적 전제가 바로 그리스 철학의 사유 지평이었던 것입니다.

3. 전체 속에서 실현되는 자유

철학은 전체를 생각하는 학문입니다. 자유가 철학적 사유의 지평이라는 말은 전체에 대한 사유가 자유로운 정신으로부터 태동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철학의 역사는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입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전체를 굳이 인식하지 않고서도 잘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철학이나 형이상학에 대해 아무런 관심 없이 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굳이 고개를 들어 전체를 파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삶은 잘 굴러간다고 느끼니까, 철학이니 형이상학이니 하는 어려운 이야기로 골머리를 썩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은 왜 굳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되는 전체에 대한 탐구, 게다가 탐구한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에게는 온전히 허락되어 있지도 않은 그런 형이상학적 지혜에 그리도 몰입했던 것일까요? 그 까닭은 전체에 대해 무지한 사람은 그 전체 속에서 자기 자신의 자유를 결코 지킬 수도, 실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란 무엇입니까? 소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고, 자기 자신에 의해 있으며, 자기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자유인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형성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아무리 자유로운 존재라고 할지라도 그는 자기 자신의 삶을 전체 속에서 형성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자입니다. 남입니다. 그 낯선 전체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나의 욕구와 의지가 전체의 질서와 충돌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의 의지는 전체의 질서나 법칙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전체의 부분인 까닭에 전체를 능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부분보다 크다”는 [유클리드, 이무현 옮김, 『기하학원론-평면기하』, 상식 5] 유클리드적 상식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내가 아무리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의지와 욕구를 전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욕구를 결코 실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의지가 전체의 질서 및 법칙과 합치하는 한에서만 나는 그런 전체 속에서 나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전체의 주인이 되는 한에서만 온전한 의미에서 나의 주인도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체를 지배함으로써 실현하는 자유야말로 완전한 자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전체를 창조한 제작자가 아니라면, 내가 전체를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내가 신이라면 모를까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전체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전체의 법칙, 전체의 운동 원리를 인식함으로써 나는 그 법칙과 원리에 따라, 전체와 충돌하지 않으면서 그 속에서 나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전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언제나 온전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인과 근거의 인식은, 인식된 대상에 대해서는 그 대상에 대하여 내가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어떤 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작동원리를 알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뜻대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는 것이 힘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보다 넓고 강한 지배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초기 새로운 자연 인식의 방법을 제시했던 데카르트는 “우리가 불과 물, 공기와 별과 하늘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다른 것들의 힘과 작용을 인식함으로써 ...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피력했던 것입니다. [데카르트, 이현복 옮김, 『방법서설』, 220쪽] 물론 데카르트는 여기서 자유에 대해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전체를 인식하려는 욕구의 이면에는 그 전체의 주인이 됨으로써 온전한 자유를 실현하려는 욕구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자유란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에 존립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남의 방해 없이 나 자신을 스스로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나의 존재가 전체 속에서 실현되는 한에서 나의 자유로운 자기 형성은 오직 내가 세계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한에서만 온전히 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나의 능동적 자기 형성에 존립하듯이, 내가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것 역시 나의 세계 형성에 존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자유가 전체의 주인이 되는 것에 놓여 있다면, 나의 자기 형성은 곧 내가 전체 세계를 형성하는 것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갓 전체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 개인이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것은 욕망이 있다고 해서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가 그 욕망을 그냥 실현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설계도부터 수많은 준비도 필요하고 또 내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능력도 요구되듯이, 자유로운 자기 형성을 위해서도 많은 준비와 능력이 요구됩니다. 하물며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주[宇宙]란 말은 커다란 집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의 작은 집을 짓기 위해서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면, 우주라는 집을 지으려 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자유로운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도 준비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자유로운 삶이 자기 형성에 존립하고, 또 자기 형성이 세계 형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자유로운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세계 전체에 대한 온전한 앎입니다. 전체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삶은 설계도 없이 집을 지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전체에 대한 인식이 철학이라면, 철학 없이 사는 삶은 남이 지어놓은 집 한켠에 세 들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셋방살이 하는 사람이 집의 주인이 될 수 없듯이, 철학 없이 사는 삶이 자유로운 삶일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 우리는 전체에 대한 굳건한 전망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4. 진리의 공공성과 전달가능성에 대하여

그러나 자유인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전체를 아는 것도, 형성한다는 것도 모두 그 자체로서는 불가능한 과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 전체를 형성하는 수고를 하는 것보다 남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그 질서에 순응해 살아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앞의 비유를 다시 들자면, 이는 자기 스스로 집을 짓기보다는 남이 지어놓은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구분한 것에 따르면 그런 삶은 시민의 삶이 아니고 거류민의 삶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김재홍 옮김, 『정치학』, 1075a6] “거류민”(metoikos)이란 남의 나라에서 손님으로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은 더부살이입니다. 또는 기생적 삶입니다. 거류민은 자기가 지금 거주하고 있는 나라의 시민권이 없으므로 그 나라를 스스로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민은 거류민과 달리 자기가 사는 나라의 일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나라를 더불어 형성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자기가 사는 나라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활동이 바로 시민적 자유의 실현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민이 자기 나라를 형성할 때, 누구도 자기 혼자 나라를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도, 세계도,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세계가 나 혼자 사는 세계이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는 오직 사물적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나는 마치 목수가 나무를 다듬어 집을 짓듯이, 이 세계를 형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사는 나라와 온 세상에서 나 혼자가 아니라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삽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형성할 때도, 세계를 형성할 때도,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형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나의 자기 형성은 우리 모두의 세계 형성이 되어야만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누구도 고립된 홀로주체로서 자기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도 세계도 언제나 남과 더불어 형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의 서로주체성입니다.

이처럼 더불어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전체에 대한 인식은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세계를 홀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형성해야 한다면, 세계인식 역시 모든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 누구는 아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르고 또 알 수도 없다면, 그들이 더불어 무엇인가를 형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의 말을 수동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이런 인식의 단절이나 격차가 고착되면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의 세계 형성은 무산되고 말겠지요.

우리가 알아야 형성할 수 있다면, 같이 알아야 같이 형성할 수 있습니다. 같이 알기 위해서는, 모든 앎이 공공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즉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내가 아는 것과 똑같은 경로를 거쳐 똑같이 이해하고 알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식과 진리의 공공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진리가 특별히 심오한 것이어서 보통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철학자들 가운데는 일부러 남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글을 쓰는 것이 버릇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정말로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들 사이의 인식의 단절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의 공동의 세계 형성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고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떤 인식이 그 자체로서 아무리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그 인식의 생성과정을 배우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똑같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방식, 그런 언어로 그 인식을 표현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식의 공공성 또는 전달 가능성입니다. 물론 사칙연산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붙들고 그 자리에서 미적분의 원리를 이해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단계적으로 미적분의 원리가 어디서 시작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최종적인 원리로 정립되는지 그 사유의 과정을 따라체험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원리를 구성해야 한다는 요구가 바로 진리의 공공성과 전달가능성에 대한 요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식과 진리의 공공성의 원칙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정치체제가 소수자 지배체제로부터 민주적 지배체제로 이행하면서 학문의 근저에 놓여 있는 하나의 암묵적 전제로 정립됩니다. 소수가 지배하고 다수가 그에 복종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지식도 계급적 단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적 사회에서는 지식도 민주적으로 유통됩니다. 그런데 서양에서 철학과 과학이 처음으로 태동한 그리스 사회는 다른 어떤 사회와 시대보다 급진적인 민주주의가 꽃피었던 곳이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철학,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필로소피아라는 말은 철학이 그리스 정신문화의 존재를 처음으로 규정해 주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단지 그뿐만 아니라 필로소피아라는 말은 우리의 서양적-유럽적 역사의 가장 내적인 근본 특징을 규정해 주기도 한다. 흔히 듣게 되는 〈서양적-유럽적 철학〉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동어반복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철학이 그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적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은 그 본질의 근원에 있어서, 스스로를 전개하며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그리스 정신문화를, 그것도 오직 그리스 정신문화만을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신상희 옮김, 『동일성과 차이』, 77쪽]

하이데거는 어떤 의미에서 “철학이 그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적”인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 물음에 대해 한 가지 답만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학문의 형식이 문제라면, 다른 모든 특징에 앞서 진리의 공공성이야말로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가장 본질적인 고유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서양 학문이 모든 학문 일반의 보편적 형식이 된 것도 그것의 공공성과 보편적 전달가능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접근가능하게 열려 있으려면, 인식이 누구에게나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식을 누구에게나 이해가능한 방식으로 기술하고 표현하려면, 그런 인식을 표현하는 학문적 언어가 [예를 들어 수학적 언어처럼] 이런저런 문화적 차이와 무관하게 이해가능한 명증적이고 보편적 개념어로 이루어져 있어야 합니다. 서양 과학과 철학은 처음부터 그런 보편적 개념어를 통해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학문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근원에는 심오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진리가 아니라 모두가 이해하기 쉽고 명증적인 진리를 요구했던 자유인들의 공동체가 있었던 것입니다.

5.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

하지만 여러분은 되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자유를 위해서라 하지만 사람이 자기 하나 주인노릇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미 그 자체로서 법칙과 질서를 가지고 굴러가는 이 세계를 사람이 무슨 수로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일까?’ 당연히 내가 혼자 찰흙을 주무르듯이 세계를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개인으로서의 내가 전체 우주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직 창조주로서의 신이 있다면 그럴 수 있으리라고 가정할 수 있는 일일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자연의 법칙이 인간의 이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아니 더 나아가 자연의 법칙이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소외된 낯선 타자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이성이 집어넣은 것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칸트는 자연법칙이란 지성이 자기 자신의 본질적 법칙을 통해 자연의 근저에 놓은 법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법칙에 자연이 따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켜 미신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모든 편견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편견은 지성이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법칙을 통하여 자연의 근저에 놓은 법칙을 자연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즉 미신(Aberglaube)이다.”[칸트, 『판단력 비판』, §40]

이런 호연지기, 놀랍지 않습니까? 물론 여기서 지성이란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보편적 이성에 속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순수한 이성은 모든 인간이 참여하고 있는 존재의 보편적 이치 또는 로고스일 것입니다. 하지만 뭐라고 부르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존재의 보편적 원리에 이미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압니까? 인간이 신이 창조한 세계와 역사의 구경꾼이 아니라 그 창조의 역사의 동역자일지. 아니 더 나아가 이 세계가 무한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맡겨진 형성의 과제일지.

사람들이 자기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것만 걱정하는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전체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철학하는 마음입니다. 맹자는 그런 마음을 가리켜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호연지기가 무엇인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을 올곧게 기르고 해치지 않으면, 호연지기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맹자』 공손추 상, 2절] 호연지기의 기(氣)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운 큰 마음입니다. 아무도 자기 한 몸 육체로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다릅니다. 내 몸은 세계 속의 한 부분이지만, 나는 그 무한한 세계를 마음 속에서 생각합니다. 그런 한에서 세계는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칸트가 자연의 법칙이 지성이 부여한 법칙이라고 말한 것도 자연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생각되고 또한 그 생각 속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나도, 세계도, 하나님도 없습니다. 있다 해도 지금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그런 세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와 세계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나와 전체의 관계가 객관적으로 어떠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나와 전체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철학이란 전체를 생각하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금언이 소크라테스의 삶과 정신을 가장 잘 요약하는 말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은 어떤 의미로든 또한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철학은 전체 속에서 나를 생각하고 나 속에서 전체를 생각하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나 속에서 전체를 그리고 전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적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철학적 사고방식의 근저에는 자유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러 사람들은 비판적 사고방식이 철학적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진리와 거짓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만사를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비판적 사고방식 자체는 철학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과학자들 역시 거짓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비판적 사고방식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학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을 철학답게 만드는 고유한 사고방식은 다른 데 있습니다. 철학이 전체를 생각하는 학문이라면, 철학적 사고방식이란 언제나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 없이 비판적 사고에만 몰입하게 되면, 철학은 결국 남의 말꼬리나 잡는 소일거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남의 말꼬리나 잡는 것이 자기의 알량한 재능을 뽐내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우리의 삶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거짓을 폭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을 멀리하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짓을 비판하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라서, 거짓을 비판하는 일에 몰입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거짓의 바다에서 익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는 부분이 아니라 오직 전체에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언제나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이야말로 철학적인 마음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철학을 배워야만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는 자기 자신 안에, 그의 가장 고유한 역사 속에 철학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논리학의 형이상학적 시원근거들』, 39쪽] 그보다 먼저 칸트 역시 형이상학은 인간 이성에 뿌리박고 있는 일종의 “자연적 소질”(Naturanlage)과도 같은 것이어서, “이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사변적 단계까지 확장되면, 형이상학이 어떤 종류이든지 간에 모든 시대에 있었고 또 앞으로도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그것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B21]

그러므로 사람이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배우지 않더라도 인간은 본성적으로 전체를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전체를 생각하는 존재인 까닭은, 함석헌이 말했듯이, 인간은 “나는 나다 하면서도 또 자기를 의미 있는 전체 속에서 발견을 하고야 안심입명을 하지, 그렇지 않고는 못 산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 1. 인생과 역사] 그런데 여기서 전체란 그냥 만물의 잡동사니가 아니라 “의미 있는 전체”입니다. 또는 전체의 의미, 또는 의미로서의 전체입니다. 그 의미가 바로 앞에서 우리가 말했던 까닭입니다. 원인입니다. 근거입니다. 전체의 원인과 근거를 묻는 것은 전체를 의미로서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전체의 의미를 파악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전체 속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안심입명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까닭이 곧 힘이다. 사람은 정당한 까닭만 있으면 하나님과도 겨뤄대려 한다. 하나님이 전능한 것은 그 까닭이 전적(全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체다. 그 전체 앞에 내가 살기를 요구하고 자유를 주장하려면 그 전체를 부정할 만한 자신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전체에 나를 완전히 합치시킬 사랑이 있든지 해야 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36. 역사가 지시하는 우리의 사명]

절대자는 전체입니다. 그 전체는 또한 까닭의 전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은 전적인 까닭입니다. 철학은 까닭을 전체로서 사유하는 학문입니다. 또는 전체의 까닭을 묻는 학문입니다. 그것은 그 전체 속에서 나를 알기 위함입니다. 다시 소월의 어린이로 돌아가면,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를 듣는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앎은 단순한 정보의 수납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전체에 대한 앎은 또한 나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갓 인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은 단지 머리로 하는 공부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머리와 함께 가슴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 사랑이 있다면, 이제 그 사랑이 여러분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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