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총리의 방한과 일본의 전략적 노림수
기시다 총리가 5월 6~7일 한국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한·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번 일본총리의 방한은 지난 3월 16~17일 윤 대통령의 일본방문에 대한 답방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일부 언론들은 12년만에 한·일 셔틀외교가 복원됐다는 데 그 의의를 부여했다. 하지만 한·일 셔틀외교는 2011년 2월 교토에서 마지막 개최되었으나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자 일본측이 이에 항의하면서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던 것이다.
한·미 정상회담과 한·일 정상회담의 상관성
이번 기시다 총리의 방한은 오는 5월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 확대정상회의에 윤 대통령의 참석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 이전에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어떤 협의를 했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앞당긴 감이 없지 않다. 히로시마에서는 작년 11월 13일 프놈펜에 이어 두 번째 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려 인도·태평양 전략과 한·미·일 안보협력에 관해 논의할 예정이다.
지난 4월 26일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윤 대통령의 대승적 조치를 환영한다면서, 한·미·일 3국 협력에 관한 미국의 속내를 밝혔다. 공동성명은 △「한·미·일 프놈펜 공동성명」에서 약속한 북한 미사일 경보정보 실시간 공유의 진전 △대잠수함전, 해상미사일방어훈련의 정례화 △해양차단훈련, 대해적훈련의 재개 △재난대응, 인도지원 관련한 추가훈련의 검토 등 한·미·일 안보협력의 강화 방안을 담고 있다.
5월 7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공동기자회견문에는 △외교안보당국 간 안보대화 △NSC간 경제안보대화 △재무장관회의의 본격 가동 △미래세대의 교류 △반도체 공급망 공조 △첨단과학기술 분야 공동연구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시찰단 파견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을 담았다. 하지만 회견문에는 별도로 역사문제에 대한 내용을 담지는 않았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기시다 총리는 1998년 10월의 김대중-오부치 한·일 공동선언을 포함한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면서 “당시 엄혹한 환경 속에서 수 많은 분들이 매우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며 개인 생각을 피력하였다. 하지만 이는 한국인 강제동원피해자들을 특정하지도 않았고 사죄의 내용을 담지도 않았다.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강제동원피해자와 관련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군함도 등재조건 위반, 사도광산 등재시도를 시정하지 않고 있어 진정성 없는 입발림이자 눈속임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의 새로운 지전략 구상과 한반도 분단구조의 현상유지
우리가 주목할 것은 기시다 총리의 방한이 단순히 한·일 셔틀외교의 복원 차원이 아니라 일본의 대외전략 추진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2006년 제1차 아베 내각의 출범 이후 일본은 새로운 지전략(geo-strategy)으로 ‘지구본을 부감하는 외교’를 내세우며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다. 아베 총리는 2007년 4월 인도 의회 연설에서 ‘태평양과 인도양의 교류’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고, 2012년 12월 2차 내각의 출범 직후 ‘민주주의 안보 다이아몬드’ 개념을 내놓은 데 이어 2016년 8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발전시켰다.
일본 내 지정학에 기반한 대외전략의 역사는 제국주의 초기로 올라간다.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1890년 12월 일본국회 시정연설에서 주권선-이익선 개념을 제기했다. 이 개념이 확장되어 1940년 8월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외상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공식 슬로건이 되었다. 1945년 패전 뒤에 일본 내에서 지정학 논의가 중지되었다가 1990년 말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지정학 연구가 부활하였다.
새로운 지정학 논의에서 일본의 대외전략은 미·일 동맹을 축으로 대국간 틀 형성을 우선하는 가운데, 한·일 관계는 그 하위개념으로 상정하고 있다. 최근 일본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의 기치 아래 △미국과의 동맹을 기축으로 △영국·호주와의 준동맹국화 △동남아시아·태평양 도서 국가들과의 우호협력강화라는 큰 그림을 갖고 지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와세다대 이종원 교수에 따르면, 최근 일본의 한반도 정책은 △한·일 관계의 ‘재조정’ 또는 ‘격하’ △한반도 유사(급변사태, 전쟁 등)에 대한 적극 관여를 통한 영향력 확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견제와 대비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의 한반도 정책은 ‘두 개의 코리아’ 즉, 분단상황의 현상유지에 맞춰져 있다. 북한에 대한 한국의 영토고권을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2015년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ACSA)이 체결 직전에 무산되었고, 작년 12월 ‘적기지 반격능력 보유론’을 발표하면서 북한영토 공격 시 한국정부와 협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북대화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일본은 한반도 문제의 발언권을 얻기 위해 미국을 설득해 6자회담에 참가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정작 회담 때는 의제밖의 납치문제를 들고나오면서 ‘2·13합의’에서 약속한 중유 20만 톤을 끝내 주지 않아 6자회담 결렬의 빌미를 제공했다.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아베 총리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북한선수단의 참가 명분이 된 한‧미 군사연습 연기를 취소하라고 했다가 내정간섭 발언이라고 면박당했다. 같은 해 3월 북‧미 정상회담이 결정되자 아베 총리가 급히 미국으로 달려가 납치문제 선해결을 요구하며 회담에 제동을 걸려다가 트럼프 대통령한테 거절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의 한반도 관심사는 한국의 국력에 걸맞는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기보다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발언권 확보를 통해 분단구조의 해체와 같은 현상변경을 견제하고 북한·중국의 핵미사일 위협을 대비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한·일 안보협력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일본의 전략적 의도도 모르는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 정상회담 직후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국제사회에서 (한·일) 공동의 리더십을 구축하자"고 말했다. 순진한 말을 듣고 기시다 총리는 속으로 비웃었을지 모른다.
이 같은 일본의 한반도문제에 대한 입장 때문에, 국내 일본전문가들 사이에서 ‘일본이 한반도 문제에 도움을 줄 순 없어도 훼방 놓을 수는 있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이다. 윤석열 정부에 들어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파탄나고 한국의 국익에 반하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져 가는 것을 보면, 일본의 전략적 의도와 훼방자 역할이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미 동맹에 기초한 실용외교와 ‘안미경세(安美經世)’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과거사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현안과 미래관계에 대해 한발짝도 내딛어선 안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제3자 변제안’을 내놓았을 당시의 ‘물컵 나머지 반’ 논리를 뒤집었다. 기시다 총리가 끝내 과거사에 대한 사죄 발언을 하지 않자 이제 와서 과거사가 정리되지 않더라도 협력이 필요하다며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은 것이다. 이는 오는 5월 히로시마 G7확대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릴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군사안보협력의 구체 방안을 내놓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과거 해상 수색·구조훈련(SAREX) 위주로 이뤄지던 한·미·일 3국의 군사안보협력이 한·미,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 핵·미사일 억제를 빌미로 해상차단훈련(PSI)과 군사정보공유, 미사일방어경보훈련, 대잠수함 훈련 등으로 확대된 데 이어 미 핵전력이 참가하는 3국 연합훈련의 확대까지 거론되고 있다. 더군다나 윤 대통령은 '워싱턴선언'에서 밝힌 한·미 핵협의그룹(NCG)에 일본의 참여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도 “핵억제력에 대한 협의와 2+2를 포함한 한·미·일 확대억제 협의체 등 여러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밝혀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일, 한·미·일 군사안보협력은 단지 과거사나 중국 등 주변국의 반발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지전략에 따른 그릇된 한반도 태도 때문에 어느 정도 제한된 범위를 넘어서기 어렵다. 일본이 한국의 고유영토인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있고, 북한에 대한 한국의 영토고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한·일 ACSA도 체결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과 자위대의 상호 주둔이 필요한 호혜접근협정(RAA)의 체결은 언감생심이며, 또한 RAA가 체결되지 않은 한·미·일 NCG나 미사일방어(MD)의 추진은 어불성설이다.
이제 막 집권 1년을 넘긴 윤석열 정부는 미·중 전략경쟁 속에 무모한 한·일, 한·미·일 군사안보협력을 추진하기보다는 우리의 생존과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지전략을 먼저 수립해야 한다. 한국의 지정학적 특성은 대륙국가나 해양국가가 아닌 연안국가(Rim State)라는 점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되는 속에서 기존의 ‘안미경중’(安美經中,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은 한계가 있겠지만, 중국과의 관계를 축소시키기보다 다른 지역으로 확대하는 ‘안미경세’(安美經世, 안보는 미국, 경제는 세계)로의 발상전환이 중요하다. 우리 외교사의 큰 흐름을 볼 때, 현 단계 한국의 바람직한 지전략 방향은 한·미 동맹에 기초하되 특정 진영에 속하지 않으며 가치와 국익의 균형을 맞추는 실용외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