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주어 없음'으로 빠져나가려다…'나경원 시즌2' 실패
대통령실‧국힘, 주어 빼고 오역 주장하며 사실 호도
인터뷰 원문 공개되면서 윤석열 망언만 다시 부각
"국제 망신…사고 치고 거짓말로 응수하다 들통나"
"일본 총리도 감히 못할 역대급 망언, 매국노 증명"
"왜 매번 외국 언론에 대고 중요 사안 이야기하나"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100년 전 일' 망언을 두고 여권이 '오역' 시비를 걸며 빠져나가려다 제대로 덜미를 잡혔다. 제 꾀에 걸려 넘어진 꼴이다. 나경원식 '주어 없음' 시즌2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윤석열 대통령의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 보도를 둘러싸고 여권이 '번역 오류' 문제를 제기하자 인터뷰를 한 당사자인 WP 기자가 원문 녹취록을 공개해 정면 반박했다. WP 도쿄‧서울지국장인 한국계 미셸 예희 리 기자는 25일 자신의 트위터에 "번역 오류의 문제와 관련해 인터뷰 녹음본을 다시 확인해 봤다"며 "여기에 정확한 워딩이 있다"고 윤 대통령 발언 녹취록을 첨부했다.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어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하는데 100년 전에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의 주어부가 "저는"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확인된 것이다. 앞서 대통령실이 공개한 윤 대통령의 해당 발언은 "지금 유럽에서는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돼 있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의 주어가 명시돼 있지 않았다.
이에 국민의힘 유상범 수석대변인은 전날 논평을 내고 "대통령실이 공개한 한국어 인터뷰를 보면 윤석열 대통령은 유럽의 미래지향적 협력을 강조하며, 주어를 생략한 채 해당 문장을 사용했다"면서 "해당 문장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로 해석해야 한다. 바로 뒤에 '이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것이 상식적"이라고 강변했다.
주어가 '윤 대통령'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큰소리친 것이다. 이어 "그런데 민주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며 또다시 핏대를 세웠다. 대통령 발언의 진상을 확인하지 않고 선전‧선동에 앞장섰다"면서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오역을 가지고, 민주당은 실제 발언은 확인하지도 않고 반일 감정을 자극하고 나선 것"이라고 단언했다. 유 대변인은 "제발 이성을 찾으라"는 충고까지 했다.
주어가 생략됐다는 당 대변인 논평은 악명 높은 전례가 있다. 지난 2007년 제17대 대선 과정에서 BBK 주가조작 사건이 쟁점으로 떠올랐을 때 이명박 후보가 "BBK라는 투자자문 회사를 설립했습니다"라고 광운대 특강에서 직접 발언하는 장면이 담긴 결정적 동영상이 폭로됐다. '이명박이 BBK 실소유주'임을 증명하는 스모킹 건이었다.
그러나 나경원 당시 새누리당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BBK를 설립하였다고만 언급되어 있지 '내가' 설립하였다고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내가 설립했다'라고 광고하는 것은 명백히 허위"라고 주장했다. 정당 논평사의 '레전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우리말은 영어와 달리 주어를 일일이 넣지 않고 생략하는 경우가 매우 흔한 데다, 이 경우는 맥락상 주어가 이명박 본인이라는 게 너무나도 분명하다는 점을 판사까지 지낸 공당의 대변인이 몰랐을 리 만무했다.
이런 철면피한 대응을 본받아 새누리당의 후신인 국민의힘에서도 검사 출신 대변인이 똑같은 수법을 써보려 했지만, 이번엔 주어가 확실히 들어간 녹취록 원본이 공개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유상범 수석대변인 외에도 김정재 의원 등 국민의힘 여러 인사가 비슷한 주장을 했으나 발언을 정정하거나 사과한 이는 아직 아무도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해당 인터뷰를 두고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는 25일 국회 본청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일본 총리의 말인 줄 착각하고도 남을 만큼 매우 무책임하고 몰역사적인 인식을 드러냈다"며 "일본 제국주의에 무참하게 침탈당한 우리의 아픈 역사도 모자라, 100년 전 우리 민족에게 행한 과오에 대해 진정한 반성도 뉘우침도 없는 일본을 향해 '절대 무릎 꿇지 말라'고 애걸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고 따졌다.
이어 "대통령이 빗댄 유럽의 역사 역시 생략과 왜곡 그 자체"라면서 "오늘날까지 독일의 사과는 계속되고 있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사죄한 것은 그 자체가 역사가 됐다. 그 바탕 위에 오늘날 유럽공동체가 존재함을 대통령은 진정 모르는 것이냐"고 개탄했다.
박성준 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에서 "국민의힘은 '번역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오역'이라며 가짜뉴스라고 호도하고 있다. 이번에도 대통령은 제대로 말했는데, 국민이 못 알아먹는다고 말하는 것"이라며 "'바이든-날리면' 발언 때는 전 국민을 듣기 테스트시키더니 이번에는 읽기 테스트라도 시키겠다는 것이냐"고 비꼬았다.
박 대변인은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윤 대통령의 정확한 발언 내용을 공개한 걸 거론하며 "이게 무슨 국제 망신인가? 방미 일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고나 치고 거짓말로 응수하다가 이제는 그 거짓말도 들통나 버렸다"면서 "대통령실과 여당이 뭐라고 변명과 억지를 늘어놓아도 윤 대통령의 친일 본색을 더 이상 숨길 수는 없다"고 질타했다.
민주당 정책위원회와 대일굴욕대책위원회, 강제동원 국회의원 모임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의 생각 따위는 개의치 않겠다는 불통 대통령의 무책임하고 자학적인 역사 인식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며 "뺨을 맞고 뒤통수를 맞아도 여전히 일본의 선의를 기대하고 있는 무능한 대통령은 허울뿐인 대일 굴욕외교에 대한 집착을 그만 내려놓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정의당 위선희 대변인도 국회 소통관 브리핑에서 "국민을 폄훼하고 국격을 실추시킨 망언"이라며 "망상에 가까운 생각으로 우리 국민을 무턱대고 과거에만 얽매여 안보나 한일협력에는 생각 없는 국민들로 매도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즉각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진보당 역시 대변인실 논평을 통해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대국민 사기를 중단해야 한다. 국민을 우롱했던 '바이든-날리면' 사태의 재판"이라며 "더 이상 거짓과 변명이 아니라 윤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사죄하라"고 했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대통령은 후보 시절 왜 '일본의 사과를 반드시 받아내겠다'고 했나? 국민을 속인 건가?"라고 묻고 "아무리 선출된 권력이라도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일본에 대해 면죄부를 줄 권리까지 국민들이 위임하지는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왜 우리 국민, 우리 언론과는 소통하지 않고 매번 외국 언론에다 대고 대한민국의 역사, 안위와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거냐"며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발언에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하고 철회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성명을 내고 "광복 78년이 지나도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본에게 한국의 판결을 존중해 배상하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국민의 요구"라며 "대한민국 대통령보다는 일본 총리가 더 어울릴 법한 망언 중의 망언이 아닐 수 없다"고 분노를 표시했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경남본부도 성명에서 "일본 총리도 감히 하지 못할 역대급 망언으로 뼛속까지 종미, 친일, 매국노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행동'은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미·일과 북·중·러 사이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대결이 한국 시민의 의지와 무관하게 격화되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며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전쟁을 불사'할 권한을 위임한 바 없다. 무력 충돌의 위기를 높이고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한국과 미국 사이의 그 어떤 합의도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