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기지국가’로 끌려가는 한국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전으로 마무리되면서 미국의 일본기획은 본질적으로 더는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로 확정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의 점령기간은 1945년에서 1953년까지였으니 1948년에 끝난 우리보다 길었다. 이 과정을 통해 일본은 미국에 의해 국가적 무장해제의 절차를 밟았고 이른바 평화헌법 체제로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그건 얼마 안 가서 이름뿐인 허울이 되고 말았다.
1950년 한국전쟁은 일본을 미국의 기지국가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동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초점도 바로 여기에 집중되었다. 물론 이보다 앞서 냉전정책의 요구에 따른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으로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진기지의 역할을 부여받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지국가 일본의 존재는 점차 일본 내부에서 격렬한 저항을 샀다.
일본 우익의 힘을 키운 일본의 기지국가화
그 절정이 바로 1960년대를 휩쓴 미일 군사동맹 조성에 대한 ‘안보투쟁’이었는데, 전학공투회의(全学共闘会議·전공투)가 이끈 이러한 반전(反戰) 반제(反帝)투쟁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쇠퇴하고 말았다. 그 전개과정은 우여곡절과 함께 매우 복잡했으나 결과적으로 일본의 우익들이 보다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미국의 일본 기지국가 전략은 오늘날까지 관철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역시 미국의 이러한 군사기지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제국의 투덜거림(Imperial Grunts)>이라는 기묘한 제목의 책을 쓴 로버트 카플란(Robert Kaplan)은 전 세계를 어떻게 군사기지화하고 있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NORTHCOM, SOUTHCOM, EUCOM, CENTCOM, PACOM 등의 약어는 모두 전 지구적 미 기지사령부 체제를 보여주는 것으로 미국이 세계 도처에 자신의 군사기지 본부를 세워놓고 있는 것을 알게 한다. COM은 Command를 뜻하는 것으로 명령, 지휘, 사령부 등의 의미를 가진다.
아메리카 제국의 이러한 지정학적 지배전략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보다 거대한 압박으로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한미일 군사동맹체제의 공식화는 이미 실질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한국은 미국의 전쟁기획이 만들어내고 있는 명령체계(COM)의 부속기관 내지 명령 수행기구가 되고 있는 참이다. 윤석열 정권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무기공급 문제나 중국의 양안(兩岸)문제 개입 의지표명 모두 이와 같은 미국의 요구 또는 명령, 지휘에 충성하는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전쟁과 제국(War and Empire)>을 쓴 폴 애트우드(Paul Atwood)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가적 초기 단계에 이미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대량살육의 경험과 체제를 통해 오늘의 미국이라는 제국이 성립되고 있음을 주목하라고 한다. 살해를 서슴지 않고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국가적 체질이 길러져 왔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은 적을 ‘창조’하고 이를 명분으로 전쟁을 수행하면서 방어전이라고 주장하고 단 하루라도 전쟁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 제국이라는 전쟁기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 전쟁체제 구축한 전쟁기계 미국
미국이 세계적 전쟁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서였고 이를 기반으로 필리핀과 쿠바를 각기 아시아와 남아메리카의 식민지이자 기지국가로 확보했다. 태평양의 하와이 역시 미국에 복속되었다. 이로써 이른바 ‘열도의 제국(Empire of Archipelago)’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구도가 1905년 태프트-카츠라 비밀협약에서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넘기는 국제적 조건이었고, 이후 일본이 태평양 해군사령부가 있는 진주만(하와이) 공습을 통해 미국이 주도하는 아시아-태평양 체제에 도전하면서 전쟁이 개시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이 전쟁으로 무너졌고 일본의 식민지 체제는 종식되었다. 그러나 친미 통치세력을 내세워 식민지를 간접지배하는 미국에 의한 신식민주의 전략은 이로써 본격화되었다. 일본의 항복은 미국의 지휘체계 안에서 생존하겠다는 의미가 되었고 그에 따라 일본은 미국의 기지국가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는 일본으로서는 기사회생의 기회가 되어 군사주의의 복구와 함께 미국의 전쟁기획에만 도전하지 않으면 매우 탄탄한 전쟁국가 조성이 가능해지는 발판이 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기지국가인 동시에 자신의 기지를 내놓고 가지게 된 셈이다.
본격적인 기지국가화, 우리의 생존권 문제
그러나 우리는 이와 전혀 다르다. 우리는 분단되어 있고, 적대적 군사대치의 지휘체계가 우리 손에 있지 않고, 전쟁국가로 팽창할 의사나 의지가 전혀 없는 나라다. 만일 그런다면 그것은 주변 열강들과 군사적 대치도 불사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니 곧바로 공격 목표가 되는 자해조치에 불과해진다. 그런데 바로 그 ‘자해조치의 구조’가 지금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최대의 위험이 되고 있다.
미국이 중국·러시아와 벌이고 있는 패권체제 대치선 중심에서 지금 우리가 자칫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걸 막아내는 것이 정부의 임무이자 책임인데 윤석열 정권은 도리어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우리 모두를 끌고 들어가려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반대 또는 퇴진투쟁은 이제 정치적 당위성의 차원을 넘어 생존권 자체의 사안으로 집약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이 이토록 미국의 군사적 목표에 몰두하는 것은 내부 권력기반의 취약성을 어떻게든 보전하려는 것이며 그에 따라 맹동적 모험주의를 불사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쟁기획 자체가 한국을 본격적으로 총체적 기지국가로 밀어붙이고 있는 매우 결정적인 요소다. 이 두 요소의 결합이 우리를 어떤 나락으로 굴러 떨어뜨리게 할지 캄캄한 어둠이 드리우고 있다.
전쟁기계인 제국 미국에 대한 저항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저항의 시도조차 포기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단 그렇게 되고 나면 전쟁기계의 작동 속도와 강도는 멈출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거대한 압박에 맞서는 저항투쟁은 오늘날 우리의 생존권 투쟁의 가장 본질적 사안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기지국가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미래와 직결되고 있다.
자주로 지켜야 할 생존권
미 CIA의 도청범죄에 대해 찍소리도 못하는 국가의 주권은 언제 침해되거나 박탈되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된다. 우리의 목숨 또한 불에 타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필사적이 되어야 한다. 누가 우리를 죽이려 드는데 무슨 다른 고려가 필요하겠는가.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민족과 국가는 제국의 종이 될 뿐이며, 유사시 용병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우리와는 아무런 적대관계도 없었던 베트남 전쟁에 개입해 들어간 역사는 미국의 지휘 아래 놓인 우리의 기지국가로서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서 자행한 처참한 민간인 학살의 연장선에서 1980년 5월 광주항쟁에 대한 살상진압이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화될 총체적 기지국가화는 우리에게 군사적 파시즘의 일상화를 강요하게 되리라는 것은 뻔하다. 윤석열 정권과 그 세력들의 영구집권계획도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김석범의 작품 <화산도>에는 조국으로 돌아온 남승지가 직면한 현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일장기 대신 내걸린 서울 미군정청의 성조기는 내려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남승지는 퍼뜩 깨닫는다.
“조국에 찾아온 ‘해방’이 실은 환상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해방자’인 줄 알았던 미국이 일본 제국의 강력한 후임자였던 것이다.”
미군정청의 성조기는 아직도 버젓이 휘날리고 있으며 우리의 환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제국의 점령과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이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지금 우리를 살린다. 자주는 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