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중 스마트 외교 추구하는 일본, 반중 날 세우는 한국
강화되는 기시다 정부의 친중 독자외교
정상회담 뒤 외상, 외교, 국방 줄줄이 방중
중국과 디커플링 반대 G7도 일본과 같은 배
다가온 한미 정상회담, 결전이냐 투항이냐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일본 총리, 대중국 정책에서 바라는 건 전쟁이 아닌 외교”
<이코노미스트>가 22일 기사에 붙인 제목이다. ‘대만 문제’와 관련해 힘에 의한 현상변경 반대를 천명하고 첨단 반도체 제조장비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등 미국의 대중국 대결정책에 적극 동조하는 듯 보이는 일본이, 기시다 후미오 정권 출범 이후 오히려 친중 독자외교 노선에 힘을 실어가고 있는 현실을 짚어낸 기사다.
‘쿨’한 기시다 외교
10여 년 전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로 일본과 중국 배들이 충돌하는 사태로까지 양국 간 분쟁이 격화됐을 때, 일본에서는 위기의식과 함께 애국주의적 반중 감정이 들끓었으나 동맹국인 미국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쿨’했다. 그런데 지금 일본과 미국의 대중국 감정과 대응은 그때와 완전히 뒤바뀌었다. 요즘 미국은 10여 년 전의 일본처럼 초조와 안달 속에 누가 더 중국에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지 경쟁하듯 중국을 경계하고 성토하는 애국주의가 요란하다.
지난 20일 <이코노미스트> 등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총리와 회견했을 때 이런 상황에 대해 일본이 군사적으로 어떻게 대응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기시다 총리는 그 질문이 겨냥한 의도에 말려들어 ‘적기지 반격능력’이니 ‘방위비 5년 내 배증’ 같은 최근에 확정한 조치들을 거론하는 대신 “선제적 외교가 우선돼야 한다”고 대답했다.
오는 5월에 G7의 올해 의장국으로서 히로시마에서 G7 정상회담을 열기로 돼 있는 기시다 정부는 중국에 대해 “할 말은 하고,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하겠다”면서도 여러 사안들과 공동의 문제에 대한 협력을 위해 “확고한 대화”의 자세를 유지할 것이라며, “건설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거듭 강조했다. 중국과의 관계를 더 악화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기시다의 이런 자세는 지난 1월 그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일본이 ‘쿨’하거나, ‘쿨’해지려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두고 기시다 정부가 중국에 대한 “스마트한(현명한) 관여”를 추구하고 있다는 후한 점수를 줬다.
더 강화된 일본의 친중 독자외교 노선
일본은 미중 간 경쟁과 알력이 지금 너무 뜨거워졌다고 보고 있고, 이를 자국 이익에 대한 위험요소로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말려들지 않으려 한다. 이를 보여주는 분명한 표지들로, 중국과 소통하며 공동이익을 찾으려는 기시다 정부의 일관된 외교 노력을 들 수 있다.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 때 기시다 후미오-시진핑 첫 회담이 열린 뒤 재개된 두 나라 간 외교는 조용하고 착실하게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양국 외무국방 장관들 회담(2+2회담)이 열렸고, 3월 말엔 양국 군사당국 간에 핫라인이 개설됐다. 그리고 이번 달 2일엔 하야시 요시마사 외상이 일본 외상으로는 3년 만에 처음으로 베이징에 가서 친강 외교부장과 중국외교의 총사령탑인 왕이 정치국원을 만나고 리창 총리까지 예방했다. 같은 날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도 베이징에서 왕이 위원을 만났다.
일본 국회 쪽도 기시다 정부의 이런 대중국 접근에 동조하고 있다. 일본 국회에는 미국 공화당 매파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이 주도해서 만든 ‘중국특별위원회’와 같은 호전적인 중국대응정책 전담기구 같은 것을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국회는 장기간 운용해 온 일중의원연맹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집권 자민당은 최근에 친중파 니카이 도시히로 전 자민당 간사장을 일중의원연맹의 새 회장자리에 앉혔다. 일찍부터 ‘킹 메이커’로 알려져 온 니카이는 기시다를 총리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니카이는 2015년에 중일 관광문화 촉진을 내걸고 3000명이나 되는 방중단을 이끌고 베이징에 가서 시진핑 주석과 회담을 한, 일본 정계의 대표적인 친중파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중의원연맹의 전임 회장이 하야시 요시마사 현 외상이다. 2021년 11월 하야시가 외상이 된 뒤 공석이던 의원연맹 회장 자리를 자민당 내 유력 파벌 ‘니카이파’의 영수이자 친중파 자민당 실세 니카이에 맡긴 것인데, 친중파 하야시를 외교담당 각료로 발탁한 것부터 그렇거니와 역시 친중파인 니카이를 연맹 회장자리에 앉힌 것은 기시다 정부의 일관된 친중 독자노선 강화 방침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미국과 같지만 다른 일본
그러나 이것이 기시다 정부가 중국을 경계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기시다는 틈만 나면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전”을 촉구하면서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일본은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계속 보내 왔다. ‘적기지 공격능력(반격능력)’ 보유를 공언하고 향후 5년간 방위비를 지금의 2배로 늘리는 등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중국의 의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돼 있다. 일본 정치인들은 중국이 위협이 된다는 걸 믿게 하려고 굳이 애쓸 필요도 없다.
아베 신조 정부 이후 기시다 정부에 이르기까지 군비 증강과 QUAD, AUKUS 등 지역 안보협의체 결성, 나토 등 유럽과의 안보제휴 강화 등 군사안보 분야에 막대한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는 일본정부의 최종 목표가 군사적, 경제적으로 급속히 힘을 키워가고 있는 중국의 지역질서 재편 의도에 대처하고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본이 친중적 독자외교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은 모순돼 보이지만, 이는 중국과 특히 경제적으로 깊숙이 얽혀 있는 일본의 지정학적 현실을 고려한 실용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가 스마트하다고 한 접근방식이다.
일본이 중국의 위협 문제를 매우 신중하게 다루는 이유를 <이코노미스트>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미국에게는 대만에 관한 전쟁 얘기는 세상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추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당장 가장 가까운 방공호가 어디 있는지를 걱정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미 급한 미국 의원들과는 달리 일본이 그런 과열 분위기를 조절(통제)하려 애쓰는 이유다. 미국 정치가들처럼 흥분해서 떠들거나 과잉대응을 해서 대만해협에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미국은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대만, 중국과 근접해 있는 일본은 당장 전쟁 재난을 어찌 모면할지 걱정부터 해야 한다는 얘기다. 기시다가 “미중관계 안정은 국제사회에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이처럼 미국과 일본이 같은 편에 서 있더라도 서로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기시다 정부의 이런 메시지가 통하고 있다고 본다. 지난 18일 나가노 현 가루이자와에서 열린 G7 외무장관 회의 뒤에 발표된 공동성명은 중국에 “솔직하게” 관여하면서 중국과 “함께 일하자”고 촉구했는데, 이는 중국에 손을 내미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에는 기시다 정부의 생각이 반영됐다고 이 잡지는 풀이했다.
미국 프랑스 독일도 중국과 함께간다
일본 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20일 도쿄를 방문한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미국이 중국과 디커플링(탈동조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닛 옐런 미 재무부장관도 같은 날 중국과의 “건설적이고 공정한” 관계를 추구한다며, “우리는 중국 경제와 우리 경제를 탈동조화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중 경제의 완전한 분리는 두 나라 모두에 재앙적이 될 것”이라며 “세계의 다른 나라들도 불안정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반도체 관련법, 인플레 억제법(IRA) 등으로 중국 견제 내지 봉쇄 정책을 강화하면서 한국의 관련기업들의 탈중국을 부추기며, 거기에 따르지 않을 경우 제재를 가하겠다는 노골적인 차별정책을 펼쳐 온 미국조차 그러하다는 것은 전기차 배터리 생산과 관련한 미국 자동차업체들과 중국 배터리 생산업체들 간의 담합과 합작 움직임 등에서도 드러났다.
미국만 그런 게 아니라 얼마전에 중국을 방문해 환대받은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도 그렇고, 비슷한 시기에 안나레나 베어복 외무장관이 베이징을 다녀간 독일정부도 마찬가지다.
베이복 장관은 지난 19일 의회에서 “중국이 내부적으로는 더 억압적이 됐고, 대외적으로는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며 “이제 (중국이) 체제 경쟁자의 성격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했지만, 바로 직전의 중국방문 때 친강 외교부장과의 회담 뒤 대중국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디커플링과 망 단절에 찬성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결전이냐 투항이냐
이는 정권 초기부터 “중국을 통한 수출호황은 끝났다”(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는 등의 얘기를 비롯해 ‘탈중국’ 움직임을 드러내 놓고 강화해 온 윤석열 정부의 대중국 정책과는 크게 대비된다.
<이코노미스트>의 견해를 빌리자면, 위협적인 상황이 발생할 경우 당장 가장 안전한 방공호가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야 할 정도로 중국과 지근거리(일본보다 더 가까운)에 있는 한국의 집권세력이 지구 반 바퀴나 떨어져 있는 미국 등 서방국들보다 훨씬 더 추상적으로 중국 또는 중국의 위협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석열 정부는 반중정서와 대결의식으로 들떠 있는 미국에 밀착하면서도 나름의 친중 독자외교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쿨'한 일본과 달리, 미국보다 오히려 더 단선적인 '친미' 노선에 앞장서면서 중국(그리고 러시아)과 대립각을 세우는 듯한 외교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런 그들은 자신들의 내밀한 논의까지 도청해 최고기밀정보로 분류해 보고한 미국 정보기관의 불법행위조차 '선의'에 바탕을 둔 우호적 행위로 여기는 도착적인 증상을 보였다. 중증이다.
지난 18일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19일 보도)에서 나온 대만해협 긴장상황과 관련한 질문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답변에 대해 중국이 유독 예민하게 반응한 것도 일본 기시다 정부나 서방 주요국들과는 동떨어진 윤석열 정부의 대중국 접근자세나 정책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은 “이런 긴장은 힘으로 현상을 바꾸려는 시도 때문에 벌어진 일이며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대답했다. ‘힘에 의한 현상변경 반대’는 미국, 일본뿐만 아니라 독일 등 유럽연합(EU) 국가들도 판에 박은 듯 동원하는 ‘중국의 대만침공 반대’의 정형화된 레토릭(수사)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정부로부터 유독 “말참견”이니 “불장난하면 타 죽을 것”이라는 등의 험한 말을 들은 것은, 한국을 내려보려는 중국의 오만과 허세 탓도 있지만, 이웃 일본을 비롯한 서방 주요국들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 및 태도와 윤석열 정부의 그것이 다르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정부가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말참견’ 발언에 대해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초치해 “강력히 항의”한 것 자체는 정당했다고 할 수 있으나, 애초에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이코노미스트>가 얘기하는 ‘스마트한 관여’ 외교가 이럴 때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잡지를 비롯해서 외국 매체들로부터 일본 기시다 정부의 외교가 ‘스마트’하다는 평을 듣게 만든 주요 항목들 중에는 윤석열 정부와 과거사문제를 ‘잘 처리한’ 것도 포함돼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비롯한 피해 당사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한국민들에겐 기가 찰 노릇이다. 이 때문에 <이코노미스트>의 ‘스마트’ 판정기준을 전적으로 신뢰하긴 어려워 보이지만, 일본에겐 어쨌든 기시다 외교가 매우 스마트하게 비칠 것이다.
굴욕적인 대일 교섭에 이어 대중국 외교에서도 초점을 잘못 잡아 뻐걱거리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가 이제 미국과의 중대한 ‘결전’을 앞두고 있다. 결전이 아니라 예고된 투항이라는 냉소가 많지만,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