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피해자들에 배상" 고 곽귀훈, UN인권상 후보 추천

일본 정부 배상 역사적 판결 이끌어낸 주인공

피폭자들 위한 인권 투쟁하며 일제 만행 공론화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했어도 신념 안 꺾어"

"선생은 윤 정부에게 '당당한' 외교 요구했을 것"

대일 굴욕·무능 외교 심각한 상황서 교훈 삼아야

2023-04-22     이승호 에디터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먹지 못한 채로 숯덩어리처럼 굳어버린 도시락밥이 히로시마 평화공원내 원폭자료관에 전시돼 있다. 2016.5.11. 히로시마=연합뉴스

지난해 12월 31일 밤 11시 58분, 경기도 광주의 한 요양병원에서 곽귀훈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도 원폭 피해자였던 선생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폭자 권리를 찾는 데 평생을 바친 투사였다. 선생은 특히 일본 정부가 한국 등 다른 나라로 이주한 일본 원폭 피해자들에게도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역사적인 판결을 이끌어낸 주인공이었다. 향년 98세.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지난 14일 선생을 UN인권상 후보로 추천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일본의 시민단체 피스보트가 먼저 한국의 원폭피해자협회·민족문제연구소에 ‘동반 추천인’으로 함께해달라고 제안했다. 당연히 한국의 두 단체도 뜻을 모았다.

곽귀훈 선생의 UN인권상 추천 소식은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낭보가 아닐 수 없다. 윤석열 정부의 대일 굴욕외교로 국민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일본에 맞서 싸운 선생의 이야기가 힘과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는 “곽귀훈 선생은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신념을 꺾지 않고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을 위해 마침내 일본의 배상 판결을 받아낸 분”이라며,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 행태에 대해서는 “수십 년 넘게 진행돼 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양심과 신념을 짓밟는 행위”라고 말했다.

조 이사는 또 “선생이 살아계시다면 윤석열 정부에 대해 ‘당당하게 하라’고 요구했을 것”이라며 “정부가 정정당당하게 (대일) 외교에 임해야 하는데 피해자들의 인권이나 신념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상식을 짓밟았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시민단체가 먼저 나서 추천했다면 더 좋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는 “곽 선생이 일본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는 좀 덜 알려진 분이라 그렇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런가하면 촛불행동 김민웅 상임대표는 선생의 ‘대일 투쟁’에 대해 “윤석열 정부가 종군위안부, 강제동원노동자 등의 배상 문제를 왜곡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외교 무능에 대한 교훈이 될 만하다”고 말했다.

 

생전의 곽귀훈 선생.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숨어 살던’ 피폭자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고 일제의 만행을 공론화하다

곽귀훈 선생은 1924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인 1944년 9월 전주사범학교 5학년 재학중 ‘징병 1기생’으로 강제징집됐다.

선생은 일본에 끌려가 히로시마 서부 제2부대에서 훈련중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1945년 8월 6일이었다. 부대는 원폭 투하 지점에서 2㎞ 거리에 있었다. 선생은 목숨을 건졌지만 상반신에 극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해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본의 쇼와 천황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또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폭자로서의 전쟁이었다.

1945년 9월, 선생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해 말 교편을 잡아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러면서 피폭자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일본의 책임을 묻는 작업에 착수했다.

선생은 1950년대 말 한국일보에 <히로시마 회상기>를 연재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로서 쓴 피폭 수기다. 당시 한국 사회는 원폭 피해자를 외면하는 풍조가 있었다. 선생의 수기는 ‘숨어 살던’ 피폭자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고 일제의 만행을 공론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폭피해자협회 결성, 그리고 일본 법정에서 재판 투쟁

1967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결성, 한국인 피폭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국내외에 알리는 운동을 시작했다. 특히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피해 보상을 촉구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보상은 끝났다”며 선생의 요구를 무시했다. 다행히 뜻을 함께하겠다며 일본의 시민운동가들이 손을 내밀었다.

1972년,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재판 투쟁을 통해 일제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고발했다. 역사의 진실을 법정 기록으로 남기자는 의미도 있었다. 법정 투쟁은 일제 청산의 과정이자 성찰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힘겨운 싸움이었다.

 

미군 당국이 공개한 히로시마 원폭 투하 1시간 후 버섯구름의 모습. 이 작전에는 2대의 항공기가 참여했으며 한 대는 폭탄 투하 임무, 다른 한 대는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AP 연합

손진두 씨의 투쟁 “원폭증(原爆症) 치료 책임은 일본에 있다”

1978년, 와중에 일본에서 희소식이 날아왔다. 한국인 피폭자 손진두 씨(1927~2014)가 피폭 피해자 법정 투쟁 끝에 승소했다는 소식이었다. 

일본 오사카부에서 태어난 재일 동포 손 씨는 히로시마 피폭 피해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원폭 후유증으로 1948년 오사카에서 세상을 떴다. 손 씨는 가족과 함께 1951년 한국으로 강제 송환됐다. ‘외국인 등록령’ 위반, 다시말해 외국인으로 등록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손진두 씨는 치료를 위해 1970년 12월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체포됐다. 손 씨는 수감 상태에서 “원폭증(原爆症) 치료에 대한 책임은 일본에게 있다”며 1971년 후쿠오카현에 피폭자 건강수첩 교부를 요구했다. 후쿠오카현은 1957년에 제정된 원자폭탄 피해자의 의료 등에 관한 법률을 들어 ‘치료 대상은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에 한정된다’고 거부했다. 이에 손 씨는 1972년 10월 후쿠오카현과 후생성을 상대로 피폭자 건강수첩 신청 각하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이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일본 시민 사회가 손진두 씨 지원 운동에 나섰다. 양심적 일본 시민들은 전국시민회를 출범시키고 손 씨의 일본 체류와 치료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 이후로 6년에 걸친 손 씨의 ‘재판 투쟁’이 이어진다.

1978년 3월 30일, 일본 최고 재판소는 “원폭의료법은 피폭에 따른 건강상 장애의 특이성과 중대성으로 인하여 그 구제 대상은 내외국인을 구별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동법은 국가 보상의 의미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판시했다. 손 씨의 승소였다. 이 판결은 일본 외에 거주하는 피폭자도 치료 대상으로 하는 피폭자 원호법 제정의 근거가 된다.

 

한 원폭 희생자가 원폭 투하 하루 뒤인 1945년 8월 7일 히로시마 검역소에 누워 있다. AP 연합

‘통달 402호’ 행정명령…“일본 벗어나면 권리 박탈”

손진두 씨가 승소한 뒤로 한국인 피폭자도 건강수첩과 건강관리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제한적 권리였다. 일본을 벗어나면 권리가 박탈됐다.

근거는 ‘통달 402호’라는 행정명령이었다. 권리를 유지하려면 매번 일본에 가서 건강수첩을 재발급받아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반복됐다. 통달(通達)은 ‘국가(일본)가 지방자치단체에 대해 발하는 명령’을 뜻한다.

원폭지원법에 규정한 피폭자의 권리는 ‘국적’을 불문하고 주어지는 것인데 행정명령을 이유로 한국인 피폭자에게 차별을 두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었다.

‘곽귀훈 소송’의 시작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다”

동국대사대 부속 중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1989년 정년 퇴임한 곽귀훈 선생은 일본의 무책임을 따지며 본격적으로 피폭자 권리 찾기에 매진했다. 손진두 씨의 뒤를 이어 일본 정부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이른바 ‘곽귀훈 소송’이 시작됐다.

1998년 10월, 선생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라며 ‘재판 투쟁’에 나섰다. 선생은 “일본 정부가 원폭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원호 수당을 일본 밖에 거주한다고 못 받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오사카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피폭자 지위 확인 소송’이었다.

선생은 2001년 6월 1심과 2002년 12월 2심에서 모두 승소했다. 1심 재판부는 ‘일본국이 곽귀훈의 건강수첩 유효를 인정하고 미지급한 수당 약 116만 엔과 이후에도 수당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상고를 포기했다. 정의의 승리였다. 선생은 훗날 당시의 재판 투쟁에 대해 “소송은 ‘운동’ 차원에서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선생이 승소한 뒤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2003년 3월부터 일본의 원호법에 근거해 ‘일본 밖에 거주하는 원폭 피해자’ 5000여 명이 매년 1인당 400만 원가량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남북한 거주 피해자가 3700여 명(남한 2700여 명, 북한 1000여 명)으로 가장 많았고 미국과 브라질 거주자는 각 1000여 명, 200여 명이었다.

선생은 보관하고 있던 원폭피해자 소송의 성과와 원폭피해자 운동 관련 기록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2005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다. 2013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생의 회고록 <나는 한국인 피폭자다>를 펴냈다. 선생의 원폭 피해 경험과 재판 과정을 담은 귀중한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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