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占) 치는 왕(王)
인공지능 시대, 온 나라를 귀기(鬼氣)로 채우는 대통령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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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에 귀기(鬼氣)가 가득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터미네이터’판 공포가 영화 속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초현대사회인데, 점을 봐서 운을 따지고 기운이 좋지 않다고 액땜을 하는 수백, 수천 년 전 미신이 권력의 저 위에서 횡행하고 있는 느낌이다. 윤석열 대선 후보가 전 국민에게 생중계되는 TV토론장에서 ‘王’자를 쓴 손바닥을 훼훼 휘두르며 목청을 돋우지 않나, 청와대를 버리고 용산 국방부청사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는 데 미신적 믿음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나, 영국 여왕 장례식에 조문 가 놓고 정작 문상을 하지 않은 것도 악령이 씌울까봐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추측까지 나돌았던 판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기이한 장면은 청와대를 민간 개방하는 날, 한복을 입은 일군의 여성들 포함 이른바 국민대표라는 이들이 복숭아 꽃다발을 흔들며 청와대 대문을 열고 입장하는 광경이었다. 민속을 연구했다는 어떤 사람은 이것이 청와대에 깃든 잡신을 쫓아내려는 무속 행위일 수도 있으며 더구나 이런 행위에는 왜색 냄새까지 물씬 풍긴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건 영화 ‘곡성’이다. 지난해 말 윤석열-김건희 부부가 이태원참사 조문을 갈 때에도 김 여사의 앞이마 헤어라인에 귀신 퇴치용 숯검댕을 칠했느니 아니니 논란이 빚어졌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술과 미신적 상징물 횡행하는 초현대 한국 정치판
지금은 한 때의 에피소드처럼 가물가물 잊혀졌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광화문 취임식 때도 샤머니즘 기운이 가득한 ‘오방낭’ 나무란 것이 등장해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이 있다. 취임식을 기획한 최순실 씨는 애초 ‘오방낭’ 나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남대문을 오방색 대형 천으로 뒤집어 씌운 다음 식후행사로 제막하자는 아이디어까지 냈었다는 폭로도 있었다. 최 씨도 무속에 밝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정치가 무속과 가깝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정치인들은 변덕이 심한 유권자들 보다 신통한 점쟁이를 더 믿는다는 말도 있다. 예전 어떤 중진 국회의원은 매일 운세를 보는데, 오늘은 동쪽 방향에 운이 좋다는 점괘가 나오면 남쪽 대문 출입을 피하고 동쪽 담장에 사다리를 걸고 출근을 했다는 우스개 비슷한 소리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정치인은 큰 행사 때마다 넥타이 색깔, 속옷 색깔까지 점쟁이가 골라준다고도 한다. 꿈이 큰 정치인은 조상 무덤까지 옮기는 판국 아닌가.
조상 무덤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재명 민주당 대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이 대표가 페이스북에 자신의 부친과 모친을 합장한 묘소를 누군가 훼손했다면서 "(묘지 훼손과 관련해 주변 등의) 의견을 들어보니, 일종의 흑주술로 무덤 사방 혈자리에 구멍을 파고 흉물 등을 묻어 무덤의 혈을 막고 후손의 절멸과 패가망신을 저주하는 '흉매'(또는 양밥)라고 한다"고 하소연했다. 그때만 해도 이런 소름끼치는 행위는 틀림없이 이 대표를 저주하는 무속세력이 자행했을 거라는 의심을 했었다. 그런데 경찰 조사 결과 오히려 이 대표를 지지하는 문중의 몇몇 사람들이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 대표의 기를 보충해 준답시고 저지른 일이었다는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이 대표는 묘소를 훼손한 것이 문중 사람들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정치를 한다는 이유로 돌아가신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아 죄송하고 가슴 아프다"고 자책하며 범인들이 선의로 한 일이니 수사당국의 선처를 요청한다고 했으나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공적인 일에 무속을 끌어들여 사람들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와 판단능력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다. 윤 정권 들어 나라 정치가 날로 저질화하는 배경에는 술과 무속, 두 원인이 가장 크게 작동하는 것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윤 정권 저질화의 두 가지 요인은 술과 무속 아닌가
'천공'이란 자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느리고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시찰했다는 의혹 제기에 대한 수사도 이 대표 부모 묘소 훼손 사건 못지않게 빠르게, 철저하게 조사할 것을 기대한다. 이 대표 부모 묘소 훼손 사건의 경우 아무리 제1야당 대표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사인 간에 벌어진 ‘강상(綱常)의 도’에 관련된 사건이지만 천공의 육참총장 공관 시찰 의혹은 국정농단의 혐의가 짙기 때문이다. 이 의혹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대통령실 이전에서부터 국방부와 합참 이전, 대통령 관저 이전, 외무부 공관 이전, 육참총장 공관 이전 등에 이르기까지 혈세 수조 원을 탕진해가며 벌어진 국기문란 상황의 단서가 되지 않겠는가.
미신에 혹한 자들이 날뛰는 꼴을 지켜보다 보니 윤석열 대통령이 왜 신영복 교수를 극도로 미워하는지의 단서도 찾게 됐다. 국힘당 대표 선거를 앞두고 윤 대통령은 안철수 의원이 2016년 1월 신 교수 빈소를 조문해 “시대의 위대한 지식인께서 너무 일찍 저희 곁을 떠났다”고 존경의 뜻을 밝힌 사실을 뒤늦게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미리 알았다면 단일화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나는 윤 대통령이 이런 전언을 통해 ‘빨갱이’ 신 교수를 이용해 안 의원을 쳐내려 한 것인지, 안 의원을 이용해 신 교수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최근 주역을 포함한 동양철학의 대가 신영복 교수가 생전 점(占)에 대해 설파한 다음의 말씀을 알고 색다른 추측을 하게 됐다.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상’ ‘명’ ‘점’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 수상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 즉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해,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 판단이 어려울 때 찾는 것, 그리고 그 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경 홍범(洪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의난(疑難)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 대신에게 묻고, 그 다음 백성들에게 묻는다. 그래도 의난이 풀리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복서(卜筮)에 묻는다, 즉 점을 친다. 임금 자신을 비롯해 조정 대신,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지혜를 다한 연후에야 최후로 점을 치는 것이다.’
그래서 점괘와 백성들의 의견과 조정 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를 대동(大同)이라고 하였습니다.”(‘강의’ 2004 돌베개)
맨 나중 봐야 할 왕의 점을 맨 처음에 보는 이유
내 추측은 윤 대통령이 신 교수를 싫어하는 건 그가 아직도 ‘빨갱이’라고 오해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김건희 여사의 점에 대한 이해가 신 교수의 가르침과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신 교수가 고전에서 배운, 왕이 점을 보는 순서는 맨 나중인데 윤-김 커플은 맨 처음에 보는 것 같은 의혹이 있다.
만일 그런 내 관찰이 맞다면, 의난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고 했는데 윤 대통령은 스스로에게 물을 자질 자체가 없는 것 같고, 그 다음 조정 대신에게 묻는다고 했는데 전부 자기 주변 못난 인물들로만 자리를 채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그 다음 백성들에게 묻는다고 했는데 백성들의 소리를 전해야 할 언론들은 대부분 '딸랑이 짓'만 하고 제대로 된 몇몇 언론은 탄압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믿느니 천공이요, 스스로 남들보다 세다고 자랑하는 김 여사의 '신빨'이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