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위대, 대만 유사시 겨냥한 파병·장기주둔 채비
'원활화 협정' 호주·영국과 체결···필리핀과도 추진
정체 숨긴 모호한 명칭···사실상 ‘주둔군지위협정’
상호파병·지원병력 신속 전개에 장기주둔까지 상정
뒷배는 일본을 '동아시아 대리자'로 책봉한 미국
평화헌법 무력화·자위대 공격력 확대로 급속 진화
일본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다.
명칭만 보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원활화 협정’을 맺는데 각별히 공을 들이고 있어서다. 일본은 2022년 1월 호주와 최초로 이 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올해 1월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런던 방문 기간에 영국과 두 번째로 체결했다. 필리핀과는 이달 9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의 도쿄 정상회담 자리에서 협정 체결 방안을 검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정식 명칭은 일본 자위대와 호주 국방군(또는 영국군) 간의 ‘상호 접근 및 협력 원활화에 관한 협정’(AGREEMENT CONCERNING THE FACILITATION OF RECIPROCAL ACCESS AND COOPERATION)으로 돼 있다. 일본은 이를 ‘원활화 협정’(RAA·상호접근협정)이라고 부른다. 중대한 뭔가를 숨기고자 일본이 이런 모호한 명칭을 굳이 고집해온 게 아닌가 한다.
SOFA 이후 일본에 가장 중요한 안보협정
일·호 협정과 일·영 협정의 내용은 거의 똑같다. 본문과 총 29조로 구성된 이 협정은 일본 자위대와 상대국 부대의 상호파병을 허용하고 있다. ‘방문부대’(Visiting Force)의 ‘접수국’(Receiving State) 입국과 체류, 군사협력 행동 절차들을 상세히 담고 있으며, 방문부대 병력과 군무원의 접수국에서의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평시에 연합군사훈련을 뒷받침하는 법적 장치이지만, 유사시 상대국 지원 병력의 신속한 전개는 물론 장기주둔까지도 염두에 둔 인상이 짙다. 특히 협정 내용 대부분이 ‘주일미군지위협정’(SOFA·주둔군지위협정)과 유사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런 점에서 ‘원활화 협정’은 SOFA에 준하는 무게를 지닌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협정 체결 당시 일본과 호주가 ‘준동맹’으로 격상됐다거나, 일본과 영국이 “100여 년 만에 가장 중요한 국방협정을 맺었다”(영국 총리실)라고 평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야 이해가 가능하다. RAA는 일본이 1960년 1월 미국과 맺은 SOFA 이후 다른 나라와 맺은 가장 중요한 안보협정들이다.
파병 신속 허가, 비자 면제, 무기 반입 간소화
주요 규정을 보면 △ 병력 파견 절차(5조) △ 출입국 비자 면제(6조) △ 통관절차 및 관세 면제(7조) △ 운전면허·차량번호판(10조) △ 무기와 탄약 소지·휴대(12조) △ 무기와 탄약 수송·보관·취급(14조) △ 군사협력 활동 비용과 분담(18조) △ 환경·문화유산 보호(20조) △ 형사재판권(21조) △ 사건 사고(24조) △ 분쟁 해결(28조) 등이다.
먼저 병력 파견 절차를 보면, 파견국이 사전통보를 해야 한다. 이때 접수국은 “적절한 경우” 외교채널을 통해 파견국에 방문부대의 선박과 항공기의 항구와 비행장 접근을 “신속히” 허가하도록 돼있다. 그리고 가용한 시설과 구역에 접근하고 이동을 허가해 주어야 한다. 조세와 입항료, 통행료 또는 유사한 과징금 부과는 접수국 군대와 동등한 조건에서 이뤄진다. 방문 부대원의 출·입국 시 비자(사증)는 면제해준다.
무기와 탄약의 반입 절차도 간소화했다. 파견국이 사전에 무기와 탄약, 폭발물의 종류와 수량, 수송 일정 통보하면, 접수국이 정한 절차와 요건에 따라 파견국의 책임하에 수송, 보관, 취급이 가능하다. 또한 방문 부대원은 파견국의 명령에 따른 것이 인정되고 접수국이 군사협력 활동을 위해 허가한 상황에선 무기와 탄약의 소지·휴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방문 부대원과 군무원의 현지 생활을 위한 세세한 내용들을 담은 데서도 부대의 장기주둔까지 상정하고 협정을 만든 점이 다시 확인된다. 예를 들어 1인당 자동차 1대와 함께 개인이 쓰던 가구와 물품에 대한 면세 반입을 허용하고 있다. 또한 현지인 고용 규정이나, 방문부대의 헌병대 운영 규정, 그리고 기본세금은 양국 간 이중과세 회피 및 탈세방지 협약에 따라 처리한다는 규정도 장기 체류나 주둔할 때나 필요한 내용이다.
영·호 군사력은 역내로, 일본 자위대는 필리핀 진출?
일본이 RAA를 맺은 영국과 호주는 모두 미국 주도 앵글로색슨 안보동맹인 오커스(AUKUS) 회원국들이다. 그리고 필리핀은 대만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나라이다. 일본이 호주에 이어 영국 군사력을 동아시아 역내로 끌어들이고, 필리핀과의 RAA 체결을 통해 일본 자위대의 필리핀 진출을 꾀하는 것은 동맹 간 연대를 강화해 대중국 군사 포위망을 이중삼중으로 구축함으로써 중국의 침공 가능성 등 대만 유사시에 군사적으로 대비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앞서 일본은 지난해 12월 국가안전보장전략 등 안보 3문서를 개정해 국방예산의 대규모 증액 및 방위력 증강 계획을 마련하고 ‘반격 능력’이란 교묘한 말로 포장된 선제공격 능력을 갖추겠다고 대외에 선언함으로써 75년간 지켜온 ‘전수방위’(공격받을 때만 반격) 원칙을 버렸다.
나아가 앞으로 RAA를 통해 자위대의 파병을 추진하면서 ‘공격성’을 강화하고 있다. 한마디로 △ 군대 보유 금지 △ 전쟁 포기 △ 국가 교전권 불인정 등을 규정한 평화헌법 제9조를 공식으로 폐기한 것은 아니지만, 치밀하게 하나씩 무력화시켜 나가는 중이다.
지난달 13일 워싱턴D.C.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미일 정상회담이 있었다. 여기서 미국은 사실상 일본을 ‘동아시아 대리자’로 일종의 책봉을 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위협’인 중국에 맞서 글로벌 차원의 패권 경쟁에 주력하고,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인도·태평양전략에 따라 대중 군사 포위망 구축의 중심 역할을 일본에 맡긴 셈이다. ‘원활화 협정’이란 교묘한 표현에 정체를 숨긴 채 일본 자위대의 ‘공격력’은 급속도로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