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봉합' 서두르는 윤 정부…"5월 전 해결" 밀어붙인다
일본 5월 G7회의 전에 해결 목표…커지는 반발
윤 정부 ‘징용 해법’ 확정시 한국 사법주권 타격
피해자 이춘식 옹 “부끄럽지 않은 결과 바란다”
윤석열 정부가 일제 징용(강제동원) 문제의 조기 봉합을 위해 속도를 높이고 있다.
한편으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정부와 잇단 고위급협의를 진행하고, 다른 한편으론 피해자와 유족들을 만나 윤 정부가 마련한 ‘제3자 대위변제’ 방안을 설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은 1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모리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만났다. 회담은 당초 예정했던 시간을 넘겨 2시간 반 정도 진행됐다. 윤 정부가 사실상 확정한 ‘제3자 변제 방안’을 전제로 하되 한국 내 피해자와 유족을 설득할 ‘명분’을 찾고자 장시간 머리를 맞댔다고 하겠다.
두 사람이 찾고자 했던 것은 피고 전범 기업의 배상과 사과가 담긴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 이들의 불법행위에 면죄부를 주고 현 단계에서 문제를 봉합하고 일단락짓는 ‘묘수’였다.
‘피고 기업의 배상과 사과’라는 핵심이 빠진 부실한 방안인 만큼 당연히 피해자를 비롯한 한국 내 여론은 매우 부정적이다. 회담 후 조 1차관은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 측도 굉장히 지금의 동향, 특히 우리 언론 보도를 굉장히 민감하게 보고 있다”고 전했다.
조 1차관은 “아직도 협의를 더 해야 될 것”이라고 말해 양국 간 협의는 외교장관 레벨로 올라갈 전망이다. 지금으로선 박진 외교부 장관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뮌헨안보회의 기간인 오는 18일 뮌헨 현지에서 회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자리에서 윤 정부의 최종안과 일본이 내놓을 ‘성의 표시’에 대한 절충안을 어떤 형태로든 확정할 공산이 크다.
일본 5월 G7정상회의 전 징용 문제 봉합 압박
시한이 양국 간에 암묵적으로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길게 잡아도 일본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리는 오는 5월까지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제징용 문제를 일단락지으면 이 회의에 초청하겠다는 게 기시다 총리의 구상이다.
그렇게 되면,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한일관계를 선포하고, 한·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군사협력 등 동맹 수준의 3국 연대를 가속화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중국 포위망을 바짝 조이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협력이 절실한 미국이 바라마지 않는 일임은 물론이다.
그래서 반드시 지금 문제를 매듭짓겠다는 게 기시다의 생각이다. “이야기할 수 있는”(기시다) 윤 대통령이 2024년 총선 결과에 따라서는 조기 레임덕에 빠질 우려도 있는 만큼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그런 시각은 에토 세이시로 일본 자민당 외교조사회장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교도통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지난 10일 자민당 회의에서 윤 대통령의 한일관계 개선 의지가 강하다면서 “5월 G7 정상회의 전 단계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12일 외교부 주최 공개토론회에서 윤 정부가 내놓은 강제징용 해법은 한국 대법원의 2018년 확정판결에 따른 위자료(배상금)를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등 피고 기업이 아닌 제3자가 대신해서 원고인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갚겠다는 것이다.
그 재원은 행정안전부 산하 공익법인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1965년 청구권협정 수혜기업인 포스코 등 한국 기업들의 기부를 받아 조성한다. 강제징용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다 해결됐다는 일본의 “일관된 입장”을 완벽하게 배려한 방안이다.
윤 정부 ‘징용 해법’ 확정시 한국 사법주권 타격
이대로 마무리된다면 일본에 굴복한 윤 정부에 의해 한국의 사법주권은 무너지게 된다. 또한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이라는 불법행위에 따른 사죄와 배상 문제가 ‘돈만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단순한 채권과 채무 관계로 변질되는 것이 문제다. 당연히 반발이 뒤따랐다.
윤 정부가 ‘성의 표시’를 일본에 요청한 것도 예상보다 더 부정적인 한국 내 여론에 놀라서다. 그래서 나온 일종의 보완책이 △ 재단에 피고 전범 기업이 아닌 일본 기업의 자발적 기부 △ 피고 기업이 가입해 있는 게이단렌(일본 경제단체연합회)의 기부로 피고 기업의 우회적 출연 모양새 갖추기 등이다. 그러나 전범 기업들에 면죄부를 준다는 면에선 오십보백보다.
기시다 정부의 마지노선은 전범 기업의 배상과 사죄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기업이 자발적 기부를 해도 먼저 피해자에 대신 판결금(위자료)을 갚는 재단이 추후 전범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점을 명시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또한 일본 정부 차원이나 전범 기업이 새로운 사죄나 사과는 없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다만 아시아 국민들을 상대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했던 1995년 무라야마 담화나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정도는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박진 외교장관은 국회에서 수용할 용의를 밝힌 바 있다.
피해자 이춘식 옹 “부끄럽지 않은 결과 바란다”
윤 정부의 피해자와 유족 면담도 진행되고 있다. 실무책임자인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과 심규선 재단 이사장이 13일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의 광주 자택을 찾았다. 이 할아버지는 일본제철과 관련해 배상 확정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소송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는 SNS를 통해 “어르신은 그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결과를 바란다며 일본의 책임있는 사과를 강조했다”고 전했다. 양금덕 할머니도 “일본이 아닌 한국 돈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절대로 받지 않겠다”면서 전범 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 안에 대한 국회 차원의 반발도 이어지고 있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 38명은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 전범 기업의 직접적인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13일 발의했다. 강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피해를 입은 우리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고 일본의 눈치를 보는데 급급했다”며 일제 전쟁범죄의 청산 없는 한일관계 개선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광주지역 시민단체인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양금덕 할머니에게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자로 최종 추천했지만 행정안전부가 추천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상민 장관을 대전지검에 고발했다.
외교부의 행태도 도마에 올랐다. jtbc 보도에 따르면, 국가인권위원회가 작년 시상식 당시와 지난 1월 두 차례 외교부에 공문을 보내 협의를 요청했지만, 지금까지 인권위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양 할머니는 “왜 우리나라에서 그런 짓거리를 하나. 억울하고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