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상가 엥겔스를 깨우친 '동반자' 메리 번스
귀족 도련님에게 노동자들의 '찐' 현실 보게
20년 살고도 '부르주아 제도'라며 결혼 안해
동생 리지와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
그녀가 없었다면 〈공산당 선언〉도 없었을 것
세계적 저작 이끌고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역사책에 없는 진짜 혁명가
메리 번스(Mary Burns, 1821~1863). 이름 석 자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알아도,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긴가민가 하는 판에, 그의 '동반자' 메리 번스를 알 턱이 있나. 하지만 이 여성이 없었다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농담이 아니다.
1842년 12월 스물두 살 엥겔스가 아버지 회사 일로 맨체스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도련님이었다. 목에 힘주고, 노동자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런 젊은이. 하지만 1843년 어느 날, 그는 메리 번스를 만났다.
메리는 아일랜드계 노동자 집안 출신으로, 영국 맨체스터와 솔퍼드에서 평생을 살았다. 정규 교육? 그딴 건 애초에 없었다. 마르크스의 딸 엘리노(Eleanor Marx, 1855~1898)는 메리를 "거의 교육받지 못했지만 읽고 조금 쓸 수는 있었고, 예쁘고 재치있으며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회상했다. 계급 편견이 잔뜩 묻어나는 평가지만, 그래도 '재치있다'는 건 인정했다.
도련님의 눈을 뜨게 한 공장 소녀
메리가 엥겔스에게 한 일은 단순했다. '맨체스터의 뒷골목, 빈민가, 쥐들이 득실거리는 뜰을 보여줬다'. 화려한 건물이나 가로등 밝은 거리가 아니라, 진짜 노동자들이 사는 곳으로 데려갔다. 어떤 역사가들은 메리가 없었다면 엥겔스는 강도나 당했을 거라고까지 말한다. 동네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 부자 도련님이 빈민가를 혼자 돌아다닌다? 그건 지금도 위험하다.
1845년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황〉(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을 출간했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산업 노동자 계급을 연구한 책으로, 엥겔스가 1842년부터 1844년까지 맨체스터와 솔퍼드에 머물며 직접 관찰하고 당대 보고서들을 수집해 썼다.
이 책이 없었으면? 마르크스는 1844년 엥겔스와의 두 번째 만남 이후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마르크스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줬고, 결국 〈공산당 선언〉(1848)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메리 번스가 엥겔스를 맨체스터 빈민가로 안내하지 않았다면, 세계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결혼? 부르주아나 하는 거야
메리와 엥겔스는 20년을 함께 살았다. 하지만 결혼은 안 했다. 당시 관습은 결혼이었지만,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부르주아 제도인 결혼에 반대했고,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
이건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사실혼 관계'쯤 되는데, 1840년대 영국에서 이런 식으로 산다는 건 사회적 낙인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특히 엥겔스 같은 부르주아 집안 아들이라면 더더욱.
엥겔스는 낮에는 체셔 지역의 상류층과 사냥을 하고, 밤에는 메리에게 돌아왔다. 메리는 종종 그의 집에 '하숙인'으로 등재되었고, 때로는 가짜 이름을 쓰기도 했다. 이중생활이랄까, 계급 배신자의 고통이랄까. 그래도 엥겔스는 메리를 선택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여성
메리와 그녀의 여동생 리지(Lizzie Burns, 1827~1878) 둘 다 아일랜드 공화주의 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했고, 엥겔스와 리지가 함께 살던 모닝턴 거리 86번지 집은 페니언(아일랜드 독립운동 조직) 활동가들의 모임 장소이자 은신처였다.
당시 영국 정부가 페니언을 어떻게 봤는지 아는가? 테러 조직이다. 지금으로 치면 자기 집을 '위험인물들'의 아지트로 내준 셈이다. 메리는 단순히 엥겔스의 '애인'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독립적인 정치 활동가였다.
20년을 함께 하고도 무덤조차 없는 여성
1863년 1월 7일 메리 번스는 41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심장마비 또는 뇌졸중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무덤이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엥겔스와 20년을 함께 산 여성의 무덤조차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낸 위로 편지에 "메리가 매우 상냥하고, 재치있었다"고 썼다. 하지만 그 편지에서조차 메리는 부차적 존재로만 그려진다. 한 여성의 삶 전체가, 그저 '위대한 남성'의 주석처럼 취급됐다.
엥겔스는 이후 메리의 여동생 리지와 함께 살았고, 1878년 9월 11일 리지가 죽기 직전 그녀와 결혼했다. 평생 '부르주아 제도'라며 거부하던 결혼을 왜 갑자기 했을까? 리지가 중병에 걸렸고, 그녀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기 위해 엥겔스가 결혼했으며, 리지는 몇 시간 후 사망했다.
엥겔스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내 아내는 진정한 아일랜드 무산계급의 자식이었고, 그녀가 태어난 계급에 대한 열정적 헌신은 교육받고 예술적인 중산층 지식인 여성의 모든 우아함보다 나에게 훨씬 더 가치 있었고, 힘든 시기에 나를 더 도왔다".
역사는 누가 쓰는가
메리 번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녀의 사진도 전해진 것이 거의 없다. 엥겔스와 20년을 함께 살면서, 세계사적 저작에 영감을 준 여성인데도 말이다.
왜일까? 간단하다. 그녀는 가난했고, 여성이었고,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역사는 대개 부유하고, 남성이고, 교육받은 자들의 것이니까. 메리는 세 가지 모두에 해당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외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조차 메리 번스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위대한 사상가' 엥겔스의 '동반자' 정도로만 언급될 뿐이다.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
요즘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떤 훌륭한 정치인, 사상가, 운동가 뒤에는 대개 누군가가 있다. 조언을 해주고, 정보를 제공하고, 현장을 안내하고, 돌봐주는 사람들. 하지만 역사책에는 앞에 선 사람만 나온다.
메리 번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역사는 정말 '위대한 개인'이 만드는가, 아니면 이름 없는 사람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지는가?"
엥겔스 혼자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황〉을 썼다고? 천만에. 메리 번스가 없었으면 그 책은 탄생하지 못했다. 마르크스 혼자서 〈공산당 선언〉을 썼다고? 역시 천만에. 엥겔스가 없었고, 엥겔스를 깨우친 메리가 없었으면 그것도 없었다.
결론을 대신하여
메리 번스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아일랜드계 공장 노동자 출신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페미니즘이라는 말도 없던 시대에 결혼 제도를 거부했고,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한 사상가의 눈을 열어줬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계사를 바꿨다.
우리는 그녀의 사진도, 무덤도, 기록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을 읽을 때마다,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계급투쟁을 논할 때마다, 우리는 사실 메리 번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역사는 '기록할 힘이 있는 자'의 소유다. 메리 번스는 기록하지 못했다. 그래서 역사가 그녀를 잊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면 된다. 혁명은 언제나 이름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왔음을. 위대한 책들 뒤에는 위대한 현장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 현장으로 누군가를 안내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메리 번스. 1821년부터 1863년까지 42년을 살다 간 한 여성. 그녀의 삶은 짧았지만, 그 울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혁명은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거리에서, 공장에서, 뒷골목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곳으로 안내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