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㉕] 도 또는 길을 아십니까?
다석 류영모의 노자 ‘늙은이(老子)’를 본다. 1월(章) 가온데 열쇳말 몇 개를 골라서 뜻을 꿴다. 옴, 엄마, 마고, 할매, 한머니, 할머니 목소리에 눈을 떠야 한다.
1. 길(道)
길은 질그릇 할 때의 질(土)이다. 흙이요, 땅이란 이야기다. 그렇다고 그냥 허허벌판의 들은 길이 아니다. 가고 온 걷기의 흔적이 새겨져야 비로소 길이다.
학교길, 마을길, 어깨 걸고 걷는 길, 말없이 가는 길, 싸우는 길, 순례길, 그리고 저 밤하늘의 미리내(銀河水), 안드로메다까지 가볍게 훨훨 걸어가는 길을 꿍꿍하라!
길은 걷기의 흔적으로 이어진 길고 긴 실이요, 줄이다. 걷기 없이는 드러날 수 없다. 그 길도 누군가 걷지 않으면 맨 땅으로 돌아간다. 몽골 초원에 길이 나면 ‘상처가 났다’ 하고, 묵어서 풀이 돋으면 ‘낫고 있다’ 한다.
없는 땅에 있는 길이 솟고, 있는 길이 없는 땅으로 돌아간다. 길이란 그저 그렇게 ‘없있(無有)’에 ‘있없(有無)’이 돌돌돌 돌뿐이다. ‘없’에 ‘있’이 솟나고, ‘있’이 ‘없’으로 돌아도 그 땅은 ‘온뿌리(本來)’ 맨땅일 뿐이다. ‘없있∞있없’에 땅이 있으니 길은 그저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다.
‘있없∞없있’ 하나로 내고 낳고 돈다!
질(土)보다 더 오랜 길의 말뿌리는 골(谷․洞)과 굴(穴居)에서 살필 수 있다. 옛 사람들이 산골짜기에 떡하니 굴을 파고 살았다. 그때부터 쓴 말이다. 골에 굴을 파고 살면서 굴 안팎을 오간 것이 길이다.
골, 굴, 길(徑/路/道)로 쪼개지기 전의 원형 모음을 ‘하늘아(ㆍ)’라고 하면, 골과 굴과 길은 모두 하나로 ‘ᄀᆞᆯ’을 말뿌리로 가진다. 그래서 서로가 다 하나다. 똑같다. 그러니 길의 뜻은 ‘ᄀᆞᆯ’에 있다.
‘ᄀᆞᆯ’이 길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길이란 글자에 떡하니 가온(ㆍ) 하늘 숨이 콕 박혀 있으니. 가온데 자리는 깨달음 자리다. 마음이 탁 열려 후다닥 깨치는 순간 그대로 뻥 뚫려 하늘까지 이어지고 이어진다. 땅몸에 하늘 숨이 터진다.
땅하늘 사이에 마음 하나가 올곧게 휘돌아 솟구쳐 뚫리니 온갖 것이 다 알아진다. 이제, 여기 산 사람 하나가 산알(生靈)로 ‘산숨’을 쉬어 ‘늘숨’이 되는 찰나의 순간이다. 길이 열렸다!
2. 옳단 길(可道)
‘길’과 ‘이름’에 속지 말아야 한다. ‘옳단 길’은 죄다 인간의 길이다. 그건 이미 정해진 길이다. 새 길이 아니다. 참이 아니다. 이를 만한 이름이란, 또 이미 가 닿은 이름일 뿐이다. 이미 말한 이름, 이미 밝힌 이름, 이미 알린 이름, 이미 빠른 이름.
길을 일컬어 도(道)라 하는데, 사슴뿔 머리로(首:ㄱ) 처음을 놓지 말고 늘 꼿꼿이(ㅣ) 쉬엄쉬엄 가라는(辶:ㄹ) 거다. 머리는 그저 ‘첫하늘’이라는 돛일 뿐이다. 돛과 바람은 크고 큰 ‘얼나’여서 바람이 부는 데로 흐른다.
머리는 빈탕이다.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 같다. 선장은 없다. 쉬엄쉬엄 가는 발에는 머리가 없다. 인간 머리를 자꾸자꾸 쓰면 길이 안 보인다. 텅 빈 하늘의 흰 구름은 머리도 발도 없이 바람과 더불어 갈뿐이다.
이름은 명(名)이다. 어두컴컴한 저녁(夕)이 되면 누가누군지 분간이 안 되니까 스스로 ‘나는 아무개야’라고 말(口)하는 거다. 그게 이름이다. 이름은 스스로 부르는 거다. 다들 남으로부터 이름을 얻고, 이름을 내려고 한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어딘가에 자꾸 이르려고 아등바등한다.
그래서 거짓 이름이 된다. 제소리 제 이름이 아닌 거다. 닥치는 대로 하고자 할 ‘ᄒᆞ고ᄌᆞᆸ(欲望)’만 남는다. ‘ᄒᆞᆫ’을 넣은 건 ‘ᄒᆞ고ᄌᆞᆸ’이 쉬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 이름이 아니다. 그러니 ‘늘’을 봐야 한다.
인간들이 늘은 잘 모른다. 늘길(常道)을 떠올려 보라. 늘이름(常名)도 깊게 생각해 보라. 이성과 의지로 똘똘 뭉친 인간 머리를 비워야 ‘늘길’이 보인다! 뭘 하려고 하는 ‘ᄒᆞ고ᄌᆞᆸ’을 비워야 ‘늘이름’이 새롭다! 머리를 텅 비워야 땅하늘이 비로소 환히 보인다. 온갖 풍경 속으로 길이 뚫린다. 이름도 만찬가지다. 부르는 이름이 없어야 새 이름을 낸다.
늘은 삶과 죽음을 넘어서 있다. 늘은 때곳도 없다. 늘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어디에나 있다. 늘의 오늘, 이 하루를 깨달아 사는 것이 참삶이다. 늘의 하늘, 이 하늘을 깨닫는 것이 참나(眞我)다. 참나가 바로 늘이니, 늘을 살려면 참나가 돼야한다. 그러면 이름 따윈 필요가 없다. 이름 없는 참나가 얼나(靈我)다. 속알 가득 그윽한 얼나. 얼나는 얼이 큰 얼큰이다.
하늘로 머리 둔이여, 고디 곧장 줄곧 고디,
웋로 솟나 솟을 월만 잊지 말고 알고 갈거,
솟을 월 솟나서만이 참삶 볼가 ᄒᆞ노라.
_ 『다석일지-다석 류영모 일지(제1권)』(홍익제, 1990), 560쪽.
3. 없에 비롯, 있에 엄이
‘없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있에서 낳고 기른다’고 풀 수도 있다.
그런데 ‘없에’, ‘있에’를 보면 ‘서’가 안 붙었다.
‘없에’, ‘있에’는 ‘바로 거기’라는 뜻이다.
‘없’과 ‘비롯’이 하나라는 것!
‘있’과 ‘엄이’가 한 존재라는 얘기!
비롯은 ‘없에’ 있다. 엄이도 ‘있에’ 있다.
서로서로 일어서고 서로서로 이어지는 ‘서로서곧로서로(相卽相入)’이다.
서로를 세 번 반복해 말하는 ‘서로서로서로’의 한 가운데에 ‘곧’을 콕 집어넣는다.
‘서로서’ 곧 ‘로서로’ 일어 이어지는 것이라는 뜻!
‘없’은 텅 빈 한울, 한울에서 하나가 비롯, 그 비롯이 ‘있’, 엄이는 ‘있’을 낳는 한울!
‘서로서’는 ‘없’에 하나가 비롯고, ‘있’에 엄이가 함께 섰다는 것!
‘로서로’는 ‘로(緣)’가 일어나서 다시 ‘로’로 이어진다는 것!
이어이어 일어나니(緣起) 그물코가 따로 없다.
그러니 하나가 일어나도 다 서고(一卽多), 다 서도 하나가 빠지지 않는다(多卽一).
‘없에’, ‘있에’의 ‘에’가 곧(卽)이다.
‘없’이 곧 비롯, ‘있’이 곧 어미!
이름 따윈 없다.
‘있’이 온갖 잘몬의 이름이다.
이름 온 꼴이 바로 온갖이다.
4. 이 둘은 한끠 나와서
여기서 ‘이둘’은 ‘없있’이다. 있다없다, 없고있고 따위가 아니다. ‘없있’은 그냥 그 자체로 봐야 한다. 그것은 하나로 실체이면서, 현상이고, 개념이고, 바탈(本性)이다.
스스로 홀로 그 모든 뜻을 품고 품어서 서 있는 뜻말의 독립된 하나의 존재다. 이미 앞에서 밝힌바 그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하나로 ‘한끠(함께)’ 나왔다.
‘한끠 나와서’는 무슨 말일까?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그 ‘어디’가 무엇일까? ‘나와서’라 했으니 ‘없있’보다 먼저 있다고 생각되는 그 ‘어디’가 텅 빈, 바로 그 ‘빈탕’, 그 ‘엄이’의 ‘엄’이다. 신령한 ‘엄’의 골짜구니 빈탕에서 나왔다.
‘한끠’의 ‘한’은 하나요. ‘끠’는 께, 일시에, 동시에, 라는 뜻이다. ‘하나로 동시에 나왔다’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로 나와서 달리 이를 뿐이 아니겠는가!
‘감ᄋᆞ’를 ‘감다’, ‘돌리다’로만 봐서는 안 된다. ‘감’은 ‘검’과 같아서 신(神)이고 얼이고 하늘이다. 신령한 숨(氣)의 ‘검’이 감아 돌면서 솟나는 상태가 ‘감ᄋᆞ’다.
세 번째는 ‘감ᄋᆞᆷ’인데 ‘검’의 어원이 ‘ᄀᆞᆷ’인 것을 잘 살펴야 한다. ‘감ᄋᆞᆷ’은 ‘감암’, ‘검엄’으로 감긴 어미요, 신령한 암컷이요, 검붉은 하늘을 뜻한다.
감ᄋᆞ-감ᄋᆞ-감ᄋᆞᆷ. 이걸 찬찬히 보고 있으면 “감ᄋᆞ ֎ 감ᄋᆞ ֎ 감ᄋᆞᆷ”이 서로 사이로 돌면서 ‘ᄆᆞᆷ’에 가 닿는 걸 알 수 있다. 속곧맞이(忠)랄까? 마음(心) 가온데(中)를 뚫고 솟나는 꼴이다. 하나로 뚫린 마음이다. 뚫린 그것이 ‘ᄆᆞᆷ’이고 ‘검’이고 ‘ᄀᆞᆷ’이다.
5. 오래
마지막 말을 ‘오래(門)’라고 써 놓았다. 이 오래가 내고 낳는 어미다.
‘뭇 야믊의 오래’는 ‘감ᄋᆞ 또 감ᄋᆞᆷ이’ 들고나는 문이다. 하나로 들고나는 ‘뭇’이니 다 휘몰아가는 온통을 뜻한다. 또 그 하나가 ‘야믈다’고 했으니, 오묘하고 신묘한 온갖 무리가 하나로 들고나는 문이리라.
그 온갖 무리’의 구체적인 실체는 누굴까. 온 우주의 삼라만상이 다 그 온갖 무리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다. 그렇지만 그게 누구라고, 무엇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또 하나의 허상이거나 거짓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들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 그 첫 뿌리의 시작, 그 시작이 창조된 쉬지 않는 늘의 ‘없극(無極)’이 바로 그 문일 수 있다.
길은 때빔새(時空間)를 초월해 열려 있는 것이니 그 문은 언제나 있었고 지금 여기도 있다. 초월은 어디론가 사라진 그 어디가 아니라, 늘, 언제나, 지금이고, 여기라는 사실이다.
싯다르타에 깨달음이 크나 큰 기쁨의 회오리로 솟구쳐 쏟아져 내린 뒤 그는 그곳에 있으나 없었다. 없이 있는 그이가 가득 그윽했다. 수천수만의 보리수 가지가 춤을 추었다. 얼마 후 그는 일어나 마을로 시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은 고요 속에 있으면서도 참의 회오리 말숨으로 사람들을 휘감았다.
한 소년이, 그토록 자기를 찾아 헤매던 한 소년이 흰 소에 올라타자 ‘자기’는 어디에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 물이 흐르고 매화 꽃잎이 날렸다. 불현 듯 소도 없고 집도 없고 자기도 없었다. 존재로 가득한 소년은 모든 곳에 있었던 거다.
기쁨은 그렇게 온다. 그렇게 없이 있는 그이가 세상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이는 뭇 야믊이다. 무리로 온전한 ‘얼빛’이다. 그이는 이곳저곳 이제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그이가 곧 무리다. 그대도 그이도 다 무리 아닌 적이 없다. 늘 그렇다. 그래서 완전히 온전한 그이가 곧 무리여서 ‘야믊’이다. ‘어디에나’는 문이고.
예수가 그랬다. 흰 빛이 온통 그에게 쏟아졌다. 광야에서 얼빛 얼나로 솟난 그가 갈릴리로 갔다. 예루살렘에서 먼 갈릴리로. 예루살렘에 속하지 못한 이들이 살고 있는 그곳.
기록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눅4:18~19)” 한다고 썼다. 예수가 만난 이들은 스스로 버림받은 무리들, 밖으로 밀려난 무리들, 가난한 무리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무리들이었다.
그들이 뭇사람(衆人)이다! 그런데 왜 그들이 야믈지?
그 무리들은 허영도 명예도 권력도 없다. 그들은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가장 그들답게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 무리들의 하늘 모심이 지극하니 다 드러나고 다 드러나서 빛 무리로 환하다.
빛이 짙어져서, 왕성해져서, 그 빛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빛이 하나도 아니고 모두 다다. 폭발이다, 대폭발! 그것이 빅뱅이다!
문이라는 이름도 허상이다. ‘오래’가 문의 우리말이듯이, 더 먼 옛 이름은 ‘돌’이다. 가야에서는 돌을 문이라고 했다. 울돌목의 그 돌. 돌돌돌 휘돌아가는 것이 문이다. 무리들이 스스로를 드러내 돌리는 그 순간순간들이 뜨겁고 환한 문이다.
환한 빛무리 터지는 도리도리 밝돌!
씨알 무리 솟구치는 얼빛 대폭발!
우주 온씨알 낱씨알 다다다 하나!
하나로 틔우는 밝돌의 돌돌돌!
씨알 튼 밝돌!
환한 빛이 밝게 돌아가는 사이사이, 온갖 것들이 피고지고, 우주 별무리가 펼쳐지면서, 저 멀리 안드로메다 끝까지 펼쳐지는 그 사이사이, 하늘 못이 일어서며 이쪽저쪽이 뻥 뚫려 환하다. 감아 도는 검의 빛무리 소용돌이.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