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베스트팔렌이 있기에 마르크스가 있었네
상상하기 힘든 악필 원고 정리해 출판 협의
남편 대신 모든 실무와 감정적 부담 짊어져
귀족 출신이면서 노동과 빈곤의 불평등 비판
마르크스에 전한 노동 자료 <자본론> 토대
엥겔스와의 협력 관계에도 중요한 연결자
런던의 잿빛 거리는 늘 눅눅했고, 가난과 추위는 망명객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나 이 흐린 도시에 묘하게 빛을 띠는 여인이 있었다. 귀족의 기품과 난민의 현실을 동시에 지닌 사람, 시대의 격동과 사상적 격론 한가운데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킨 인물. 흔히 '마르크스의 아내' 한 줄로 축소되는 제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 1814~1881)이다. 그녀의 역할은 단순한 동반자를 넘어,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형태를 갖추는 과정의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귀족 규수이면서 불평등을 꿰뚫어 본 사상적 감수성
제니는 독일 트리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풍족한 교육과 문화적 자원을 누렸다. 문학, 언어, 철학을 두루 배웠으나, 그녀가 관심을 둔 것은 화려한 사교장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배층이 만든 규범을 의심했고, 노동과 빈곤의 불평등 구조에 강한 문제의식을 느꼈다. 이런 성향은 자연스레 한 청년 사상가에게 끌리게 했다. 바로 칼 마르크스(1818~1883)이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니는 안정된 귀족적 삶 대신, 격동의 세계를 선택했다. 그녀의 선택은 감정적 결단이 아니라 깊은 사유의 결과였다.
추방과 망명 끝에 도착한 런던의 잿빛 현실
결혼 후 부부는 여러 도시를 떠돌며 감시와 탄압을 받았고, 마침내 1850년대 초 런던에 정착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환대가 아니라 혹독한 생존이었다. 집세는 늘 밀렸고, 난방비가 없어 겨울이면 방 안에서도 입김이 서렸다. 아이들은 병치레를 달고 살았으며, 마르크스는 건강 악화와 실직 사이를 오갔다. 이런 조건에서 이론적 작업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위험한 구조였다.
바로 이 현실에서 제니의 힘이 빛났다. 그녀는 생활비가 모자라면 결혼반지와 가족의 유품을 전당포에 맡겼고, 겨울 외투를 팔아 아이들 약을 샀다. 그러면서도 마르크스의 상상하기 힘든 필체로 쓴 원고를 정리하고 베끼며,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편지를 보내고 출판 협의를 진행했다. 마르크스가 이론을 세웠다면, 제니는 그 이론이 세상에 도달하도록 하는 모든 실무와 감정적 부담을 짊어진 셈이다.
귀족적 품격과 현장적 감각이 공존한 존재
런던 사회는 제니를 만나면 늘 두 가지 인상을 동시에 받았다. 귀족의 품위와 망명자의 고단함. 그녀는 옷이 남루해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손에 굳은살이 배어도 말투는 품위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 뒤에는 날카로운 현실 감각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그녀의 따뜻한 태도에 마음을 열었고, 지식인들은 그녀와의 대화에서 예상치 못한 통찰을 발견했다. 어떤 방문객은 "마르크스를 만나러 갔다가, 오히려 제니의 분석에 더 감탄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제니의 집은 비좁고 어둡고 춥기까지 했지만, 그곳은 망명객들이 모여 현실을 토론하고 사상을 논하는 작은 정치 학교였다. 제니는 이 논의의 중심에서 사람들을 연결하고, 의견을 조율하며, 때로는 감정적 갈등까지 해결하는 사실상의 조정자였다.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성장한 숨은 배경
제니의 역할은 내조에 머물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와의 협력 관계에서도 제니는 중요한 연결자였다. 편지 전달, 의견 정리, 일정 조율 등은 대부분 제니가 맡았다. 그녀는 런던 노동계의 분위기를 세심하게 기록하고 정리해 마르크스에게 전달했고, 이는 <자본론>의 현실분석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오늘날 학계에서도 제니의 필체로 남은 자료를 연구하면서, 그녀가 단순히 원고를 베낀 것이 아니라 내용 이해와 의견 개입까지 했다는 사실이 점점 확인되고 있다. 그녀의 판단과 정리는 마르크스의 원고를 체계화하는 데 실질적 역할을 했다. 제니가 없었다면 마르크스의 방대한 사상적 구조는 훨씬 뒤죽박죽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쇠약해져도 꺼지지 않은 정신
1870년대 이후 제니의 건강은 심하게 악화했다. 폐질환과 관절통이 계속됐고, 장기적인 영양 부족으로 몸은 더 약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글을 쓰고, 사람들을 돕고, 마르크스의 작업을 살폈다. 삶은 고단했지만 정신의 긴장은 마지막까지 유지됐다. 1881년 그녀가 눈을 감자, 마르크스는 "내 삶의 절반을 잃었다"고 말하며 무너졌다. 제니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상실이 아니라 사상적 기반의 붕괴이기도 했다.
역사를 움직인 또 하나의 중심
제니 폰 베스트팔렌은 한 남자의 아내로만 기억되기엔 너무 큰 역할을 했다.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혁명을 선택했고, 가난 속에서도 품위를 지키며 현실과 이론을 잇는 다리가 되었다. 망명객들을 모아 사상적 흐름을 만들었고, 영국 노동운동의 한켠을 지탱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역사를 움직인 또 하나의 중심이었다.
제니는 단지 마르크스의 뒷모습에서 조용히 서 있던 인물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사상을 현실의 땅에 확실히 내려앉게 만든 숨은 동력 그 자체였다. 그녀의 삶은 '혁명은 말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