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와 세운상가의 기묘한 동거, 기막힌 악연

“슬럼화 이대로 둘 수 없다” vs “종묘 경관 해친다”

종묘는 장엄한 건축미 돋보이는 ‘동양의 파르테논’

세운상가군은 김수근 설계한 남북 1km 주상복합 건물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착공 1년여 만에 1967년 준공

2025-11-15     이희용 줌렌즈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역대 조선 임금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인근의 주상복합 건물 세운상가가 세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조선 왕조 시대와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를 대표하는 두 건축물이 이처럼 함께 주목받는 것은 세운상가가 준공된 지 58년 만에 처음일 것이다.

서울시가 세운상가 자리에 고층 건물을 짓겠다고 하자 문화체육관광부와 국가유산청(문화재청)은 종묘의 경관을 해친다며 한 차례 제동을 걸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서울시 조례를 개정하자 문체부는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6일 대법원이 문화재 관련 규제를 완화한 조례 개정이 적법하다고 판결했으나 승부가 끝난 건 아니다. 대법원이 고층 건물 건립을 승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흔히 불거지는 문제이긴 하나 세운상가 재개발은 오세훈 서울시장의 역점 사업이고,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어서 개발론과 보존론이 세게 맞붙었다.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국가유산청이 전면 격돌한 가운데 여야 정치권까지 가세해 판이 커졌다. 내년 6월 서울시장 선거를 앞둔 샅바싸움으로도 번져가고 있다.

 

2017년 촬영한 세운상가 건물군. 오른쪽 뒤로 보이는 숲 한가운데 종묘가 보인다. (서울시)

‘좌묘우사’ 원리에 따라 서쪽에 사직. 동쪽에 종묘 건립

종묘와 세운상가는 건립 시기나 건물의 용도가 판이하면서도 60년 가까이 기묘한 동거를 해왔다. 공통점은 가장 긴 건축물이라는 것뿐이다. 전반부에는 세운상가의 기가 종묘를 눌렀다면 후반부에는 세운상가가 퇴락하고 종묘의 가치가 부상했다. 지금은 세운상가가 덩치를 키워 재역전을 노리자 종묘가 맞서는 형국이다.

종묘는 “궁궐 왼쪽(동쪽)에 왕의 조상 신을 모시는 종묘(宗廟), 오른쪽(서쪽)에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사직(社稷)을 세운다”는 주례(周禮)의 ‘좌묘우사(左廟右社)’ 도성(都城) 조영(造營) 원리에 따라 지금 자리에 세워졌다. 태조 이성계가 개국 2년 뒤인 1394년 도읍을 한양(서울)으로 옮기고 이듬해 10월 완공했다.

초기에는 정전(正殿)만 두고 천자국은 칠묘제(七廟制), 제후국은 오묘제(五廟制)라는 원칙을 따랐다. 천자국은 개국 시조와 재위 중인 왕의 6대 조상, 제후국은 시조와 4대 조상을 모시는 것이다. 세종 때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을 지어 4대가 지난 왕과 왕비 신주를 옮겼다가 연산군 때 공덕이 큰 왕의 위패는 옮기지 않고 대대로 정전에 모시는 세실(世室)과 영녕전에 옮기는 조천(祧遷)으로 구분했다.

 

종묘 영녕전. 태조의 4대조 목조부터 의민황태자(영친왕)까지 16위가 모셔져 있다. (이희용 촬영)

불천위(不遷位) 신주는 차츰 늘어나 정전에는 19위가 봉안돼 있다. 태조·태종·세종·세조 등 대부분 후대 왕들의 직계 선왕이다. 1897년 고종이 칭제(稱帝)해 칠묘제를 채택함에 따라 생존 시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면서도 추존된 왕 가운데서는 문조(익종)가 유일하게 이곳에 모셔져 있다.

영녕전에는 추존 왕(목조·익조·도조·환조·덕종·원종·진종·장조)과 방계 왕(정종·문종·단종·예종·인종·명종·경종) 부부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가장 마지막으로 1973년 의민황태자(영친왕) 신주가 16실에 자리를 잡았다.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불리는 종묘 정전. 태조부터 순종까지 19위가 모셔져 있다. (국가유산청)

정전과 영녕전은 여러 차례 증축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다시 지어 지금은 각각 19칸과 16칸 규모를 갖추고 있다. 정전은 길이가 101m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긴 일자형 목조 건축물로 꼽힌다. 단순, 절제, 장엄의 건축미를 자랑하며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으로 불린다.

“창엽문 이름은 조선 왕이 28대로 끝날 것 예언”

종묘에는 고려 31대 공민왕 신당(神堂)도 들어서 있다. 종묘를 창건할 때 공민왕 영정(影幀)이 날아와 경내로 떨어져 모셨다고 한다. 이성계는 32대 우왕과 33대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창왕을 쫓아내고 공양왕을 추대한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왕을 공민왕이라고 생각해 그의 원혼을 달래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전 맞은편에는 역대 왕들의 공신 83명의 위패를 배향한 공신당(功臣堂)이 있고 정문 쪽으로 부속 건물들이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씨가 차담회를 열어 말썽을 빚은 망묘루(望廟樓)는 종묘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누각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씨가 차담회를 열어 말썽을 빚은 종묘 망묘루. (국가유산청)

종묘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됐고 종묘제례악과 종묘제례는 1964년과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목록에 올랐다. 1985년에는 정전과 영녕전이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됐다. 유네스코는 1995년 종묘를 세계유산에 등재한 데 이어 2001년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제례. (국가유산청)

종묘는 북신문(北神門)을 거쳐 창경궁과 언덕으로 이어졌으나 1931년 일제가 사이에 길을 내 나눠 버렸다. 이 길을 인근 관훈동에 살았던 성리학자 이이의 호를 따 율곡로라고 이름 붙였다. 2022년 터널을 만들고 위에는 녹지를 조성해 다시 연결했다.

종묘 남쪽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이라고 한다. 정식 이름은 창엽문(蒼葉門)으로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푸른(蒼) 잎(葉)’처럼 왕조가 오래 지속되라는 뜻을 담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창(蒼)자’를 파자(破字)하면 ‘十十’, ‘八’. ‘君’으로 28명의 임금이란 뜻이다. ‘엽(葉)자’도 ‘十十’, ‘世’. ‘十’, ‘八’이어서 28세로 풀이할 수 있다. 조선 왕조가 27대 왕에 영친왕까지 28대에서 끝날 것을 예언했다는 속설을 낳았다.

 

종묘 정전 전실 입구의 열주. (유네스코)

종로3가 집창촌 몰아낸 서울시의 ‘나비 작전’

창엽문 앞에서부터 종로, 청계천, 을지로 건너 퇴계로까지는 일직선으로 공터였다. 일제강점기 말 미군이 폭격할 때 도심에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가를 허물고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로 비워둔 것이다. 해방과 6·25를 거치며 피란민들이 세운 판잣집들이 담장까지 다닥다닥 붙어 들어섰다. 성매매 여성까지 모이는 바람에 종로3가의 줄임말인 ‘종삼’은 사창가를 뜻하는 은어가 됐다.

 

세운상가 건설공사를 시작하기 전 종묘와 창엽문 앞 광장 모습. (서울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곳에 초현대식 주상복합 건물을 짓기로 했다.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진두지휘했다. 박정희가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재임할 때 김현옥이 육군 제3항만사령관을 지내 인연을 맺었다. 5·16 쿠데타에 참여한 뒤 부산시장에 발탁돼 성과를 내자 1966년 4월 서울로 불러올렸다.

그는 서울시장 부임 직후 5개월 만에 독립문~구파발, 돈암동~수유리, 왕십리~광나루, 청량리~망우리 등 서울의 주요 외곽 간선도로를 확장한 것을 비롯해 3한강교(한남대교), 사직터널, 삼각지 입체도로, 강북강변도로, 북악스카이웨이, 여의도 윤중제, 광화문·명동 지하도와 114개 육교 등을 건설했다. 재임 중 완공은 보지 못했지만 삼청터널, 남산 1호·2호 터널, 마포대교도 착공했다. 그러나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4년 만에 물러났다.

세운(世運)상가도 김현옥표 불도저식 개발의 산물이었다. ‘세계의 기운이 모이라’는 뜻으로 직접 작명했다. 1966년 6월 박정희에게 개발 계획안을 승인받자마자 두 달여 만에 인근 판자촌을 철거하고 1년여 만에 준공했다. 건물주와 세입자, 인근 상인 등의 반발이 거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고 저항하면 경찰을 동원해 진압했다.

주변에 남아 있던 집창촌은 ‘나비 작전’으로 쫓아냈다. 김 시장이 건설 현장에 들렀다가 호객 행위를 하는 성매매 여성에게 손목을 붙잡히자 근절 방안을 직접 구상했다고 한다. 경찰과 공무원들이 이곳을 드나드는 남성의 신원을 확인해 공개하자 발길이 뚝 끊어졌다. 나비가 찾아들지 않자 꽃들은 전농동 ‘청량리 588’이나 하월곡동 ‘미아리 텍사스’ 등지로 옮겨갔다.

남북 1km 세운상가 건물군은 1967년~1972년까지 차례로 완공

세운상가의 청사진은 공간건축사사무소 대표 김수근이 그렸다. 자유센터와 타워호텔(반얀트리호텔), 경동교회,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KIST 본관, 벽산빌딩, 문예회관,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남영동 대공분실 등을 설계하고 여의도 종합개발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의 밑그림을 그린 한국 현대 건축가 1세대의 거장이다. 건축·예술 잡지 ‘공간(空間·SPACE)’을 펴내고 사옥에 소극장 공간 사랑을 꾸며 문화예술 공연도 펼쳤다.

세운상가에 이어 남북을 가로지르는 현대, 청계, 대림, 삼풍, 풍전, 신성, 진양상가의 건물군이 1972년까지 차례로 완공됐다. 종묘가 최장 목조건물이라면 세운상가 건물군은 1㎞에 이르는 국내 최장 콘크리트건물이었다. 1967년 11월 17일 세운상가 준공식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해 테이프를 끊었다. 이틀 뒤 준공 58주년을 맞는다.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김현옥 서울시장이 1967년 11월 17일 세운상가 준공식에 참석해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서울시기록관)

세운상가는 냉난방 장치, 수세식 화장실, 엘리베이터 등 최신 시설을 갖춘 데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서울의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상층부 아파트에는 연예인, 기업인, 외교관 등이 입주했고 하층부에는 수입 전자제품 매장과 음반 가게 등이 들어섰다.

당시 종로의 화신·신신, 명동과 남대문의 미도파·신세계 등의 백화점은 건물이 낡고 소매점 중심이었는데 세운상가는 새 건물에 도매상이고 정찰제여서 인기가 높았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사우나, 슈퍼마켓, 실내골프장도 입점했다.

김수근은 지상은 차도 겸 주차장으로 만들고 3층은 공중복도로 만들어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이어지는 입체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민자를 유치해 건설사별로 건물을 따로 짓다 보니 계획이 어긋났다.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는 끊어지고 차도는 사람과 뒤섞여 혼잡해졌다. 유리 지붕을 씌우고 옥상 정원을 만들려는 구상도 무산됐다.

 

1972년 세운상가 건물군이 완공된 직후의 사진. 맨 왼쪽이 세운상가이고 그 앞 건물 사이로 건설 중인 청계고가도로가 보인다. (서울시)

“잠수함부터 인공위성까지 못 만드는 게 없다”

원래 이 지역에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각종 기계, 부품, 공구 등을 판매하는 중고업체가 많았다. 전자상가까지 들어서니 잠수함부터 인공위성까지 못 만드는 게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1980년대 들어 PC가 보급되자 컴퓨터에 빠진 ‘세운상가 키즈’가 드나들고 TG삼보 컴퓨터, 한글과 컴퓨터, 코맥스 등이 기반을 다져 1차 IT혁명의 발상지가 됐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공연윤리위원회 심의가 엄격할 때여서 국내외 금지곡이 담긴 복제 음반을 구하려는 발길도 이어졌다. 도색잡지와 음란 비디오가 은밀히 거래되기도 했다. 1980년대 진양상가에 입주한 보안사령부(현 방첩사령부) 분실에서는 강제징집된 운동권 대학생 출신 병사들이 ‘녹화사업’이란 이름으로 프락치 강요 공작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용산전자상가가 들어서면서 IT혁명의 요람이라는 지위를 넘겨주게 됐다. 강남 개발의 여파로 주변 상권도 약화해 공동화되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낡아 슬럼화하고 상가에도 폐업 직전의 영세 자영업만 남았다.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나며 활기를 찾는 듯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레트로(복고) 열풍에 이끌린 젊은이들이 가끔 와서 사진을 찍고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박원순의 도시 재생과 오세훈의 도심 재개발

이명박 서울시장은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를 시작하면서 이 일대의 재개발을 추진했다. 북악산 자락 매봉에서 창덕궁과 종묘를 거쳐 남산까지 이어지는 녹지 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으나 보상비를 감당할 수 없어 고층 건물을 세우고 옆에 녹지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오세훈 시장도 이 시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2008년 정비계획을 발표한 뒤 현대상가를 철거했다. 그러나 문화재심의위원회는 서울시 계획이 종묘의 경관을 해친다면서 건물 높이를 낮출 것을 요구했다. 사업성이 떨어지자 재개발 계획은 동력을 잃었다.

2011년 취임한 박원순 시장은 오 시장의 계획을 백지화하고 기존 건물을 최대한 살리면서 환경을 개선하는 도시 재생사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골자는 공중보행교 부활, 서울옥상 개관, 스타트업 창작 개발공간 입주 등이었다.

 

2017년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조성한 다시·세운광장. (서울시)

박원순과 오세훈은 광화문광장을 두고도 엇갈린 정책을 펼치며 예산과 시간을 낭비한 적이 있다. 박 시장 프로젝트에 한국 건축계의 핵심 인사들이 포진한 김수근 사단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이 중 한 명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는 박 시장 시절 건축정책위원장을 맡아 ‘다시·세운’ 프로젝트와 서울역 고가도로 리모델링 사업 ‘서울로 7017’ 등을 주도했다. 일각에서는 “스승의 작품인 세운상가를 최대한 보존하려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2021년 복귀한 오 시장은 중단됐던 재정비 계획을 다시 추진했다. 서울시의회도 국민의힘이 다수당이 돼 오 시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지난 6월 정권이 바뀌며 상황은 또 달라졌다. 세운상가의 운명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종로 쪽에서 남산 쪽을 바라본 세운상가 지역 재개발 조감도. (서울시)

정파 간 승부 아니라 공론화 작업 거쳐 해법 찾아야

김현옥 시장이 세운상가를 건립할 때만 해도 인근의 종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기도 했지만 1980년대 이전까지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국립중앙박물관장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을 펴내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1993년이었다.

그 전까지는 종묘도 초중고생의 사생대회나 성씨와 문중 종친회 개최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4·19혁명 직후에는 종묘를 헐고 그 자리에 국회의사당을 세우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창엽문 앞에도 무허가 건축물과 시설물이 난립해 있다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1985년 종묘광장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한동안 주차 공간이 자리를 차지하고 노점상이 들어서 어수선했다. 2007년 성역화 작업에 따라 더운 물이 나와 훈정동(薰井洞)의 유래가 된 어정(御井)과 하마비를 복원하고 주변 경관을 말끔히 단장했다. 1995년에는 담장 주변의 무허가 시설물들을 걷어내고 순라길이라는 이름의 역사탐방로를 꾸몄다. 악취를 풍기던 동편 담장 옆 쓰레기 적환장(積換場)은 2006년에야 이전했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허민 국가유산청장이 서울시 조례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11월 7일 서울 종묘를 방문한 뒤 유네스코 세계유산 기념비석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왼쪽. 2025.11.7. 연합뉴스) 오세훈 서울시장이 11월 7일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옥상에서 열린 세운4구역 재개발 관련 현장 브리핑에 참석해 주변 전망을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 서울시)

종묘는 왕조시대의 유물이지만 신의 혼을 모신 경건한 공간이고,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자랑스러운 우리의 세계문화유산이며, 도심 속 허파 같은 소중한 녹지공간이다. 세운상가 역시 개발독재의 산물이지만 역사의 자취가 서려 있는 근대 문화유산이며 주민들 삶의 터전이다.

도심 공간을 어떻게 개발하고 보존하며 가꿔갈 것인지는 정답이 없다. 이해당사자들의 셈법에만 맡겨놓을 일도 아니고, 정파 간 승부나 타협으로 해결할 일도 아니다. 시대 정신에 따라 주민과 전문가들의 공론화 작업을 거쳐 해법을 찾는 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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