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네 말도 맞구나

편먹기가 일상인 사회에서 '나'로 살아가기

2025-11-11     부영건 고교 시간강사
'O 정반합'을 부른 동방신기. 이 노래는 너와 내가 대립을 넘어 합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 "절대절명, 그대들의 논쟁엔 논리가 없어, 누구도 듣지 못하면 열지 못하면 절대 해답을 찾을 수 없어. 난 가야 돼 가야 돼, 나의 반이 정 바로 정, 바로잡을 때까지. 정 반 합의 노력이 언젠가 이 땅에 꿈을 피워낼 거야."

개별성을 존중하지 못해 벌어지는 차별과 정신적 폭력은 나를 슬프게 한다. 그것 보단 아주 조금 덜하지만 개별성에 대한 성찰이 전무한 사람들에 대한 조소와 비웃음, 은근한 무시도 나를 슬프게 한다. 인어공주의 정체성이 변한 것에서 충격과 공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나는 공론의 장에 서있을 자리가 없다.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와 반 PC로 나뉘어서 서로의 멸망을 원하는 감정싸움의 가운데엔 여유가 없다. 사정없이 서로 물어뜯는 곳. 그 안에서 상호 이해나 그를 통한 전체성에 대한 인식은 소외되어 있다. 합을 만들 분위기가 아닌 데에 끼어들어 봐야 나만 양쪽에 물려 상처투성이가 된다는 것은 개인적 경험만으로 충분히 연대기적 역사를 이룰 정도다.

기계적 중립에 상처가 많은 나라다. 독재와 함께 대대로 비겁했던 사법부가 택한 전략이요, 말도 안 되는 부정 혹은 실각을 저지른 정당에 대한 옹호를 위해 언론들이 자주 꺼내든 카드. 하여 정-반-합에 의한 진전이야말로 이성적 발전에 가장 중요하게 쓰인 원리 중 하나인데도 합을 말하는 모든 사람을 배척한다. 그 안에서 어설펐던 나날을 포함한 나의 모든 합의를 위한 논리들은 그저 합을 말한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아직도 김어준의 k 값에 대한 통계적 의심을 전개한 글에 쏟아진 조롱과 멸시들을 기억한다. 그중에 단 하나도 논리적 반박은 없었던 것까지.

하여 누군가는 민주당까지를 비판 대상에 쉽게 올려놓는, 진영 논리가 희박한 나의 마음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뜨거운 심장을 가졌다 해도 나는 학자의 길을 걷고 학자의 마음을 닮고 싶은 인간. 진리나 논리의 정합성을 사랑하는 족속이다. 그 안에서 '인간'을 이해한 것만큼은 관대해질 수 있지만, 대놓고 편을 들라는 것은 '나'이기를 그만두라는 말과 같으니까.

억지로 하면 조만간에 마음에 병이 난다. 다만 당시의 감정적으로 나를 비난하던 민주당 지지자들에 대한 마음은 이제 미움보단 아쉬움 정도로 잦아들었다. 어려운 시기, 무능한 박근혜가 나라를 어지럽히던 와중에 분석을 중립적으로 해보자는 말이 얼마나 한가한 소리로 들렸겠는가. 그들은 절박한데, 몰려있는데.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이성을 요구하는 것만큼 잔혹한 일도 없는 법이다. 모든 심리극 스릴러가 그런 식의 전개를 강요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일단 개별성의 존중에 관한 문제로 돌아오면, 나는 최근의 논쟁 과정을 보면서 과거 로마시대의 콜로세움을 떠올리게 된다. 가장 절박한 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싸우고, 조금 여유 있는 자들은 한 발 떨어져 관망하며 불을 지피거나 희극적 요소를 관람한다는 점에서.

인터넷이라는 누구나 참여하기 쉬운 공론의 장이 생겨난 악영향이라고나 할까. 자발적으로 참여한 콜로세움이라는 점에서 양상은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거대한 구조 속에서 가장 고통받고 가장 마음이 힘들어진 사람들 혹은 아주 절박한 사람들이 이 전투에 참여한다. 직접 잡아서 신분을 강등시키고 싸움에 내보내는 것이나, 사회 속에서 소외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쌓인 감정을 풀 데가 없어 공론장으로 나오는 것이나 내 눈에는 같게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겠다.

이 싸움이 처참해지는 것엔 이런 이유도 있다. 그나마 최소한의 전투 교육과 훈련 과정을 거쳐서 싸움에 나서던 검투사들과 달리 이 싸움의 참가자들은 아주 처참한 논쟁의 방식으로 싸움에 나선다. 논증이라는 과정이 인간이 다루는 이상 온전히 이성적일 수는 없다는 좀 나아간 이야기를 할 것도 없다. 그냥 삼단 논법과 같은 그리스 시절에도 알려진 수사학이 부재하다. 대학의 이름값에만 교육의 시야가 고정된 사이에 공교육의 순기능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현상학적으로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최소한의 논리가 앞뒤가 맞지 않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 자체를 실패한 데서 나타난 다는 점에서 그 양상이 심각하다.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통합성이나 복합성을 인지하기는커녕 하나의 정체성이나 개별성에 사로잡힌 사고만을 고집하고, 한 편에선 개별성 자체를 무시하고 사회로서의 전체성이나 도덕성, 혹은 효율성에 대한 부분만을 고집한다. 그보다 심해지면 자신의 자아비대를 위해 무가치하거나 없는 관념 즉 우상을 만들어 몰려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의 세력이 우상의 실재를 증명한다고 믿는다. 원인과 결과가 뒤집힌 사이비적 신념으로 무장한채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공론장에 뛰어든다. 이 모든 과정이 참담하지만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이 모든 과정들이 희화화되고 웃음거리 소재가 되어 정치적 중립층 혹은 중산층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개그 소재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 내겐 가장 슬프다.

물론, 재미있다. 세상 잘 싸우는 UFC 선수들끼리의 싸움은 긴장감을 유발하지만, 세상 주먹 하나 휘두를 줄 모르는 이들의 난투는 기상천외한 웃음거리의 총집합임을 나도 가끔 느낀다. 요약 영상을 보다 무의식 중에 터져 나오는 실소와 폭소의 존재를 부정할 순 없다. 실패와 실수의 집대성 같은 느낌이랄까? 실수로 발 헛디뎌 웃음을 유발하는 영상보다 치명적인 데가 있다. 오죽하면 그런 실패들을 모아서 재미거리 삼고 읽어주며 유희 삼는 유튜브 채널까지 등장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웃음거리로 소비해 버리고, 아무도 그 아픔의 근원에 공감하지 않고 '알빠노?' 나만 즐거우면 됐지라고 말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 모두가 소외를 가속하고 소외된 세상을 당연히 여기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단순하게 하나일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행동이 모였을 때 어떤 광풍이 되어 갈지가 빤히 느껴진 다는 것.

작게 흔들리는 전자의 진동에서 상전이(phase transition)를 직감하고 성질 변화를 감지하는 고체 물리학자(였던)의 입장으로 바라보면 이런 인간들의 변화는 치명적이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소외와 이런 소외된 모습을 즐기는 행위들. 이건 곧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는 어떤 단초임이 감지된다. 모두의 개별성이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모두의 도덕적 논의가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다정함을 비웃는 세상. 결국 나와 세상 모두가 우스워져 버리는 미래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극한 소외의 시대.

그래 웃을 수야 있지. 이미 힘든 시대를 웃음으로 넘겨 보려는 마음까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안 그래도 우리는 흥과 해학의 민족 아닌가. 한 편으론 저런 상태인데도 주먹을 들게 된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그 엉성한 주먹질과 그에 비해 너무 과도한 분노를 보면 마치 모던타임즈의 과장된 행위 예술을 보는 느낌이 나는 것을 나도 이해는 한다.

그러나 웃고 난 뒤. 유튜브 쇼츠를 꺼버리고 잠자기 위해 눈감고 드러누운 5분 동안. 비릿하게 남아 있는 감각을 무시하지 말자. 희화화되어 버렸지만 사실 그도 한 사람의 인간이었음을 기억하며 올라오는 마음. 안타까움일 수도 있고, 동질감에서 비롯된 슬픔일 수도 있는 마음. 이 모든 과정들이 실은 거대한 세상 앞에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맞서 마음이 무너져 내린 사람들이 한데 뭉쳐져 빚어내는 희극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주 조금 나아질 수 있으니까.(사실 물리가 아니라 정확하게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냥 나도 네 웃음이 있는 그대로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할 테니 네 말도 맞는 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받아들여 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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