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핵무장론, 역주행하는 한반도 비핵화
“취지대로 되지 않았다고 그 시도가 잘못됐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지난해 12월 메르켈 전 독일총리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총리 시절 자신이 전쟁을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에 반대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이 고집부리는 바람에 결국 러시아의 침공이 이뤄졌다며 한 말이다. 같은 해 2월 19일 뮌헨안보회의에서 젤린스키가 우크라이나 비핵화를 담은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파기해 핵 재무장을 시사한 것이 푸틴 대통령이 침공을 앞당긴 원인이 되기도 했다.
최근 들어 북한의 잇단 미사일 발사와 재래식 도발이 이어지자, 윤석열 정부 내에서 지난 정부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시도를 평가절하하며 독자적 핵무장을 주장하는 발언이 나왔다. ‘비핵화는 애당초 불가능했다’거나 ‘위장된 평화쇼에 놀아났다’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평화협상을 비난하더니, 급기야 윤 대통령과 여권 일부에서 독자적인 핵무장을 언급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당초 취지대로 한반도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시도가 잘못됐던 건 아니다. 오히려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내걸며 한반도 비핵화의 진전을 방해했던 세력들에게 비난이 돌아가야 한다.
이들은 미국 초강경파와 일본 극우세력과 합세해, 북한에 빅딜 아니면 노딜 중에서 양자택일하라며 압박하면서 북한의 합리적 안보 우려를 고려한 단계적 비핵화를 스몰딜으로 폄하하고 반대했다. 북한 핵위협의 제거 시도를 방해했던 자들이 이제 와 북한 핵위협을 내세워 한국의 핵무장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핵무장론은 곧 한반도 비핵화 정책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전술핵 재배치, 독자 핵무장 주장은 한반도 비핵화 정책의 포기 뜻
지금 북한의 핵위협은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북한은 핵탄두의 양적 증가와 투발수단의 다양화를 통해 기존의 확증보복에서 비대칭 확전으로 전환하면서 핵태세의 성격이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북한의 핵탄두 보유량은 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가 20~80개, 미 의회조사처(CRS)가 20~60개, 한국국방연구원이 80~90개로 추정했다. 핵무기를 운용할 북한전략군은 총 13개 여단이 편성되어 있으며, 각 여단은 3개 발사대대, 1개 연료차 대대, 1개 경비대대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현재와 같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제동을 걸 장치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러시아가 한반도 비핵화와 안정을 지지하며, 북한의 핵실험이나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시험에 대해 유엔안보리 제재 결의에 찬성표를 던져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 위기처럼 진영 간의 대립이 첨예화하면서 북한이 유엔안보리 결의를 위반해도 중·러는 상임이사국 지위를 이용해 추가제재 결의안뿐 아니라 안보리 의장 비난성명에도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처럼 북한의 핵위협이 엄존하고 대북 국제공조도 금이 간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핵 대 핵’ 대응방식에는 미국의 확장억제력 제공, 나토식 핵공유, 주한미군 전술핵 재배치, 독자적 핵무장이 있다. 앞의 셋은 모두 미국이 결정권을 갖고 있으며 독자적 핵무장조차 미국의 암묵적인 동의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다.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재도입이나 나토식 핵공유 프로그램에 따른 핵무기의 한반도 배치는 중국이 자국을 겨냥한다며 크게 반발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전술핵 재도입이나 독자적인 핵무장은 한반도 비핵화 정책의 폐기를 의미해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시키는 꼴이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자체적인 핵무기 개발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걸림돌이 산재하다. 독자 핵개발을 위해서는 우선 핵무기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자동적으로 유엔안보리에 제소되어 제재를 받게 된다. 우리나라의 전력생산 가운데 원자력 의존도(2021년 기준)는 29.0%로 석탄의 35.6%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고 핵연료(MOX) 전량을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어, 경제제재를 받게 될 경우 한국사회는 전력 부족과 공장 가동중단으로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만에 하나, 미국이 묵인해서 한국이 독자적인 핵무장에 성공한다고 해도, 핵보유국끼리 전면전 가능성이 낮아지나 국지전의 위험성은 높아진다는 ‘안정-불안정 패러독스’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비대칭확전 핵태세를 확립한 북한은 작년부터 ‘9.19군사합의’를 위반하며 해안포 사격을 실시하고 소형무인기들을 군사분계선 이남으로 보내는 도발을 자행했다.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 맞서 강대강 대응을 시사했지만, 자칫 국지전, 더 나아가 핵무기를 동원한 전면전으로 비화할 위험성이 있어 대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한 핵에 핵으로만 대응할 수 있다는 생각 버려야
하지만, 북한 핵을 억제하기 위해 반드시 핵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미국 비확산교육정책센터(2015)는 한국과 일본의 핵 대응태세와 관련해 △증강된 재래식 전력, △소규모 핵전력, △대규모 핵전력의 3가지 옵션을 제시한 바 있다. 증강된 재래식 전력의 목표는 미국의 확장억제 하에서 미사일 방어를 통한 생존성 강화와 대규모 재래식 확증보복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증강된 재래식 전력으로 핵억제가 가능한 것은 아직 북한의 핵능력이 저위력 핵탄두(5~20kT)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주한미군의 핵무기 재배치나 나토식 핵공유프로그램이 이뤄지더라도 도입될 핵무기는 W76-2 핵탄두와 B-61-12 중력핵폭탄와 같은 전술핵무기급의 저위력 핵탄두이다. 따라서 북한의 핵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북한군 지휘소 지하벙커와 ICBM 발사기지, 잠수함 기지 등 핵심 군사시설에 대한 정밀타격 능력이 필요하며, 이는 고위력 폭탄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고위력 폭탄에 클러스터탄을 부착하면 축구장 300~400배 넓이를 초토화할 만큼의 살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북한의 핵무기에 과잉 대응하기보다는 위협 수준에 맞춘 비례적 대응이 필요하다. 북한의 저위력 핵탄두에 대해서는 현재 구축 중인 한국군의 한국형 3축 체계(킬체인, 미사일방어체계, 대량응징보복체계)가 완성되면 대북 핵억제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여기에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준비단계에서 해킹이나 전자기파로 미사일 발사시스템을 교란·파괴하는 '발사의 왼편(Left of Launch)' 작전을 보완해 3축+1 체계가 된다면 북한의 핵위협을 보다 효율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
대량응징보복능력 자산으로는 F-35 스텔스 전투기와 6개의 수직발사관을 가진 3,000톤급 KSS-3 잠수함, 고위력 재래식 탄두를 탑재한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해성-3, 지난해 국군의 날에 선보여 ‘괴물미사일’로 불렸던 현무-5가 대표적이다. 특히 현무-5는 미국의 GBU-43이나 러시아의 ATBIF에 버금가는 탄두중량 8~9t으로 지하 100m의 적 지휘소를 파괴하고 클러스터탄을 탑재할 경우 광범위한 면적을 초토화할 수 있다. 실제로 군 당국은 현무-5 여러 발을 동시에 발사하면 저위력 핵탄두에 버금가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핵능력이 지속적으로 고도화되어 고위력 핵무기(20~150kT)의 실전배치로까지 간다면 한국군의 3축 체제만으로 억제하기 어렵다. 이때를 상정해 독자적 핵무장을 주장하기보다 이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전략이다. 현 단계 우리의 핵억제 정책은 한편으로 확장억제력의 실효성을 제고하고 3축 체제의 강화를 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 비핵화 협상을 재개해 북한이 고위협 핵무기를 완성하지 못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경직된 북한당국의 태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먼저 우리의 대북 강경태도를 완화할 필요가 있으며,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중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외교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지만 우리 민족의 장래를 생각할 때 포기할 수 없는 정책 목표이기 때문이다.
역대 진보정권이 북한의 직접적 위협과 주변국들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해 보수정권보다 더 많은 국방비를 지출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2021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 미사일지침’ 폐기에 전격 합의함으로써 재래식 고위력 탄두의 개발을 가로막던 장애를 제거했다. 그 덕분에 한국군은 대량응징보복능력을 갖출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일각에서 2018년부터 한미일 미사일 정보공유 훈련을 비공개로 하고 3축 체계를 KAMD와 전략적 타격체계로 명칭을 바꾼 것에 대해 북한의 눈치를 본 것이라고 비판하나, 이는 한반도 비핵화 협상의 동력을 유지하려는 조치에 불과했다.
지금 대통령까지 나서서 핵무장론을 외치는 바람에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은 경계의 눈초리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실현 가능성 없는 핵무장론은 집권당이 취약한 권력 기반을 만회하기 위해 국민의 핵무장 지지여론에 편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통령의 핵무장 언급은 대한민국의 국격을 불량국가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국가를 존망의 위기로 몰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젤린스키의 핵 재무장론이 재앙을 초래한 것처럼 한국 국민의 안전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대통령의 무책임한 발언의 뒷감당은 오로지 우리 국민의 몫으로 남게 된다. 이제라도 윤석열 정부는 역주행을 멈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