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팔아 노동자 천국을 꿈꾸다
영국 대표적 초콜릿 브랜드 경영자 R. 캐드버리
발렌타인데이 하트 초콜릿 상자 만들어 성공
사랑 상품화해 번 돈으로 노동자 복지에 앞장
아프리카 카카오 농장 착취는 눈감은 양면성
딸도 2차 대전 때 유대인 구하는 의로운 공로
발렌타인데이에 하트 모양 초콜릿 상자를 처음 만든 사람은 소박함을 강조하는 종교인이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초콜릿 브랜드인 캐드버리의 경영자 리처드 캐드버리(Richard Cadbury, 1835~1899)이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낭만과 욕망의 상징인 초콜릿을 팔아 번 돈으로 노동자 천국을 만들려 했다.
술 대신 초콜릿을
리처드 캐드버리는 1835년 영국 버밍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캐드버리(1801~1889)는 24세 때 차와 커피를 파는 가게를 차렸다가 나중에 초콜릿 사업에 뛰어든 인물이다. 평화주의, 평등, 소박한 생활을 중시하는 퀘이커 교도였던 존 캐드버리는 초콜릿을 음주를 대체할 음료로 본 독특한 사업가였다. 그는 50년간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던 금주운동의 선구자였다.
생각해보면 참 기발한 발상이다. "술 마시지 말고 초콜릿 마셔!" 오늘날로 치면 "담배 대신 전자담배" 정도의 대체재 장사인 셈이다. 물론 초콜릿이 술보다 건강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다만 초콜릿을 마시고 싸움을 거는 사람은 없으니, 사회 질서유지에는 확실히 도움이 됐을 법하다.
망해가던 가게를 살려낸 형제
1861년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존의 건강이 악화되자 리처드(1835~1899)와 동생 조지(George Cadbury, 1839~1922)가 회사를 물려받았다. 당시 회사는 거의 망해가는 '부도 직전' 상황이었다.
두 형제의 역할 분담이 묘한 조합을 이뤄 기막히게 잘 맞아떨어졌다. 동생 조지가 생산을 책임지고, 리처드는 판매와 홍보를 맡았다. 리처드는 요즘으로 치면 '마케팅 천재'였다.
사랑을 파는 방법의 발견
1868년 리처드는 발렌타인데이를 위한 하트 모양 초콜릿 상자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냈다. 그것도 직접 그린 그림으로 상자 뚜껑을 꾸며서. 그는 예술가이자 사업가였던 셈이다.
소박함을 강조하는 퀘이커 교도가 "사랑의 징표로 초콜릿을 선물하라!"고 외치는 모습. 이건 마치 검소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사치품을 팔아 돈을 버는 것과 비슷한 아이러니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 리처드는 낭만과 초콜릿 과자의 연결을 상업화한 최초의 인물이 됐다.
이후 150년 넘게 전 세계 남성들은 발렌타인데이만 되면 하트 모양 초콜릿 상자를 사들고 애인을 찾아간다. 어떤 이들은 이를 '진심의 표현'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의 최면'이라 부른다. 어느 쪽이든 리처드 캐드버리는 웃고 있을 듯하다.
버밍엄 외곽에 세운 이상향
형제의 사업이 번창하자 1878년 버밍엄에서 남쪽으로 6㎞ 떨어진 시골에 5만 7000㎡의 땅을 샀다. 여기에 공장을 짓고 노동자들을 위한 모범 마을 '본빌'(Bournville)을 건설했다.
본빌은 19세기 영국치고는 혁명적인 장소이다. 남성은 주당 48시간 노동하고, 일정 기간 후에는 이익 배분 제도에 참여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당시엔 꿈같은 얘기였다. 공장 굴뚝연기가 자욱하고 어린이들이 탄광에서 일하던 시대에, 캐드버리 형제는 녹지가 있는 마을에서 노동자들이 가족과 함께 살게 했다.
물론 완벽하진 않았다. 역사가들은 캐드버리가 아프리카 카카오 농장의 노동조건과 노예제 문제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자기네 노동자는 천국에서 살게 하면서, 원료를 공급하는 아프리카 노동자들의 고통은 외면했다. 전형적인 '내 가족은 소중하니까' 식의 이중 잣대다. 진보의 한계는 언제나 시야의 한계였다.
자선가의 두 얼굴
리처드는 모즐리 홀을 버밍엄 시에 기증해 어린이 요양원으로 쓰게 했고, 1898년에는 노동자들을 위한 구빈원을 지었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본빌에는 술집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노동자들이 정말 원한 게 '술 없는 이상 마을'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괜찮은 임금과 주말 휴식이었을까? 지배자의 선의는 때로 피지배자의 자유를 구속한다. 그래도 당시 다른 공장주들이 노동자를 쥐어짜기 바쁜 와중에, 캐드버리 형제는 적어도 양심이 있는 착취자였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맞은 최후
1899년 3월 22일 리처드는 예루살렘에서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경건한 퀘이커 교도답게 성지를 방문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직후인 1899년 6월 16일 캐드버리는 주식회사로 전환됐고, 당시 본빌 공장에는 260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다.
그의 유산은 초콜릿 상자에만 남은 게 아니다. 딸 베아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을 구해 '의로운 이방인' 상을 받았고, 본빌은 영국 모범 주거지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1905년 조지의 아들이 개발한 데어리 밀크는 영국 최초의 대량 생산 밀크 초콜릿이 됐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리처드 캐드버리의 삶은 자본주의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한편으론 '사랑'이라는 감정을 상품화해 돈을 벌었고, 다른 한편으론 그 돈으로 노동자 복지에 투자했다. 아프리카 카카오 농장의 착취는 눈감았지만, 자기네 노동자에겐 괜찮은 삶을 제공했다.
오늘날 우리는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확인한다. 그 달콤한 초콜릿 뒤에는 마케팅 천재의 계산이, 퀘이커 교도의 양심이,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의 착취가 함께 녹아 있다.
리처드 캐드버리를 영웅으로만 볼 수도, 악당으로만 볼 수도 없는 이유다. 그는 그저 자기 시대를 살았던 한 사업가였고, 양심과 욕망사이 어딘가에서 줄타기를 했던 인간이다. 그 줄타기의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 삶에 스며들어 있다는 게 흥미롭고도 씁쓸한 지점이다.
다음 발렌타인데이에 하트 모양 초콜릿 상자를 보게 되거든, 잠깐 이 남자를 떠올려보길. 사랑을 팔아 이상을 샀던, 소박함을 추구하면서도 낭만을 팔았던, 위선적이면서도 진심이었던 한 빅토리아 시대 사업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