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학살 2년 끝의 식민통치 기획과 하마스의 선택
트럼프의 ‘휴전안’ - 정의 없는 평화의 가면
잿더미 위 거짓 약속: 피해자가 사라진 '휴전'
팔레스타인 미래를 강탈하는 21세기 신탁통치
솔로몬의 칼날 아래 강요당한 하마스의 선택
집단학살 공범들의 정치적 위기와 탈출 셈법
기만을 넘어 진정한 평화 향한 국제 연대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시한 20개 항목의 가자지구 휴전안은 폐허 속에서 신음하는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한 가닥 희망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조항들을 면밀히 살펴볼수록, 이 제안은 평화는커녕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손아귀에 넘기려는 교활한 각본이자, 신식민주의적 기획임이 명백해진다.
2년 넘게 이어진, 인류의 양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집단학살의 끝에서 나온 이 '휴전안'은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네 가지 요소가 송두리째 빠져있다. 첫째, 집단학살 가해자에 대한 처벌/ 둘째, 고통받고 죽어간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셋째, 전쟁범죄의 재발 방지를 위한 실질적 대책/ 넷째, 팔레스타인 민족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결권의 보장이다.
이 네 가지 핵심 기둥이 빠진 평화는 모래 위에 지은 언제든 무너질 성과 다름이 없다. 이 제안은 분쟁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대신, 힘의 논리를 앞세워 현상 유지를 넘어 이스라엘의 점령을 영속화하고 팔레스타인의 종속을 제도화하려는 위험한 시도로 가득하다. 누가 봐도 명백한 심각한 결함은 바로 '정의의 부재'다.
지난 2년간 우리가 목격한 것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었다. 병원, 학교, 난민촌에 대한 무차별 폭격, 구호 활동가와 언론인에 대한 표적 암살 등과 같은 명백한 전쟁범죄였고, 국제사법재판소(ICJ)와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집단학살"로 판단한 행위들이었다. 최근에는 유엔 보고서에서도 이것을 집단학살로 인정했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제안은 이 모든 범죄에 대해 침묵한다. 진상 조사를 위한 독립적인 국제 위원회 구성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이는 이스라엘에 완전한 면죄부를 부여하는 행위다. 영국 <가디언The Guardian>은 "트럼프의 계획은 '평화'라는 단어를 오용하여 가해자에게는 당근을, 피해자에게는 굴욕적인 채찍을 가하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수십만 채의 집이 파괴되었고, 가자지구의 모든 기반 시설은 잿더미로 변했다. 세대를 이어온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을 잃은 이들의 정신적 상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진정한 평화는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고 파괴된 삶을 재건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휴전안은 이러한 피해의 복구와 배상 없이 '국제사회의 지원'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눙치고 있다.
휴전안의 가장 독소적인 조항은 팔레스타인의 운명과 미래를 전적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손에 맡기겠다는 노골적인 발상에 있다. 가자지구를 서방 강대국의 감시 아래 두는 '신탁통치' 구상, 그리고 서방 기업들의 이익을 위한 '재건'과 '개발' 속에 가자를 새로운 돈벌이 시장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21세기에 다시 재현된 제국주의적 식민통치에 다름 아니다.
저명한 중동 전문가이며 반제국주의 사상가인 질베르 아슈카르(Gilbert Achcar)는 "이 제안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설립된 식민지 위임통치를 연상시키며 … 이스라엘 군대는 시온주의 국가와의 국경을 따라 약 1km 깊이로 가자지구에 조성된 '보안 경계'를 계속 통제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가자의 영토를 강탈하고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겠다는 선언이면서, 가자를 여전히 거대한 감옥으로 유지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오랜 전략을 공식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휴전안의 이면에는 팔레스타인의 노동력을 값싸게 착취하고, 재건 사업의 이권을 미국과 유럽의 특정 기업들에게 몰아주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
휴전안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해 저항해 온 하마스의 완전한 무장 해제와 가자 통치에서의 배제를 '평화'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반면에 현 사태를 초래한 핵심 당사자이며 2년간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주변 국가들을 침략해 온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정부와 극단적 시온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고 있다.
수십 년간 불법 정착촌을 확장하며 팔레스타인 영토를 강탈하고, 서안에서 일상적인 폭력을 자행해 온 무장 정착민들, "팔레스타인의 절멸"을 공공연히 외치는 이타마르 벤-그비르나 베잘렐 스모트리치와 같은 극우 정치인들을 이스라엘 연정에서 배제하고 그들의 군사적 영향력을 제거하겠다는 내용은 휴전안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편향성은 문제의 뿌리와 원인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 지배와 점령,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있음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언론 <하레츠Haaretz>도 "네타냐후 정부가 극우 세력에 인질로 잡혀있는 한, 어떠한 평화 협상도 진정성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것을 받아들이면 집단학살과 폭격을 중단하고 이스라엘 감옥에 잡혀가 있는 팔레스타인 인질들의 일부(1만 5000여 명 중에 고작 1700여 명)을 석방해주겠다는 약속이 있다. 문제는 이것을 약속하고 보증하는 것이 바로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믿을 수 없고 거짓말을 많이 한 두 정부와 정치인 – 미국의 트럼프와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 이라는 것에 있다.
이처럼 기만적인 제안을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의 예측이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달리 하마스는 '인질을 모두 석방하라'는 트럼프의 제안을 일단 수용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이 군사적인 열세와 궁지에 몰려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현대판 '솔로몬의 우화'와 같은 비극적 선택에 가깝다.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솔로몬이 아이를 칼로 나누어 가지라고 명하자, 진짜 어머니는 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울부짖으며 아이를 포기한다. 가자지구 주민들의 고통과 죽음을 너무나 공감하고 견딜 수 없는 쪽이 물러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금 하마스는 매일같이 폭격으로 스러져가는 가자 주민들의 생명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는 처지다.
수많은 오해와는 달리, 저항 세력이 '휴전'을 위해 파격적인 양보를 제안한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이 영구 휴전과 가자 봉쇄 해제를 수용한다면, 모든 이스라엘 인질을 석방하고 가자 통치에서 물러날 용의가 있음'을 밝혀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에게 '인질 구출'은 명분이었을 뿐, 그들의 실제 목표는 팔레스타인 저항의 완전한 소멸, 집단학살을 통한 인종청소와 가자의 영구적인 점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질의 생명과 안전'에는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 바로 한 달 전에 이스라엘은 그런 식의 '휴전'이 이뤄질까 봐 중재국인 카타르를 폭격해 협상단을 다 제거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번에도 트럼프-네타냐후는 얼마든지 또다시 '무장 해제에 대한 하마스의 약속이 없다'라고 하면서 협상을 결렬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고 특히 트럼프의 태도가 바뀌었다. 왜냐하면 지금 트럼프는 물가 인상으로 돌아온 관세 전쟁, 지지율 추락 등 동시다발적 정치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노벨평화상에 대한 병리적인 집착만이 아니라 위태로운 정치적 입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평화 중재자'의 이미지를 구축하며 뭔가 보여줘야 하는 순간이다. 네타냐후 역시 별로 다르지 않다. 네타냐후는 국제사법재판소ICC가 체포영장을 발부한 지명 수배된 전쟁범죄자라는 족쇄를 차고 있어서 외국 방문과 외교 활동에 있어 상당한 걸림돌에 직면해 있다.
더구나 이번에 '글로벌 수무드 선단'(가자에 식량과 구호품을 전달하려고 전 세계에서 모인 50여 척의 배와 500여 명의 시민들)이 보여줬듯이 팔레스타인 국제 연대 여론과 운동은 급속히 커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수무드 선단을 가로막자 이탈리아에서는 총파업이 벌어졌고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서는 수십만 명이 참가한 거대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 투자 철회, 제재를 요구하는 BDS 운동은 스포츠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흐름이 되고 있고, 이런 여론의 압력에 밀려서 서방 정부들도 마지못해 조금씩 각종 제재와 무기 금수, 경제 교류 중단 등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하마스가 '모든 인질을 석방할 테니 나머지 협상을 해보자'라고 역제안을 한 것이다.
이것은 '하마스가 인질을 석방하지 않아서 휴전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떠들던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모순을 파고들었다. 이것을 거부하면 '인질의 생명은 핑계에 불과했고 관심도 없었다'라는 자백과 실토가 된다. 그래서 트럼프는 일단 하마스의 제안을 환영하며 네타냐후에게 폭격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카타르 폭격 이후에 틈이 벌어진 걸프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갈등도 봉합하길 원했다. 대부분 친미적인 독재 왕정들인 이 국가들과 이스라엘을 협력하게 만드는 것이 트럼프의 중동 패권 전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타냐후는 이런 미국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할 수가 없는 처지이다.
최근 네타냐후는 "이건 일종의 고립이다. 자급자족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 우린 아테네나 슈퍼 스파르타가 될 것이다. 다른 선택이 없다"라고 연설했지만, 막상 미국의 재정적 군사적 지원이 끊기면 단 하루도 집단학살을 지속할 수 없는 게 '제국주의의 중동 경비견'으로서 이스라엘의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와 네타냐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자지구에 대한 폭격을 완전히 멈추지 않고 있으며, 언제든 약속을 뒤집고 다시 더 커다란 집단학살의 불길을 지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들의 선의를 믿는 것은 늑대에게 양을 맡기는 것과 같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나마 이들을 약간이나마 주춤하게 만든 힘의 원천을 더욱 확대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집단학살을 규탄하고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국제적 여론과 행동을 더욱 거대하게 만들어야 한다. 평범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각국 정부를 뒤흔들고, 이스라엘에 대한 실질적인 무기 금수와 경제 제재를 이끌어내야 한다.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정치적 위기와 국제적 고립을 가속화시켜, 그들이 더 이상 팔레스타인 민중의 생명을 짓밟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휴전안은 평화를 향한 이정표가 아니라, 우리가 싸워서 넘어서야 할 또 하나의 기만적인 장애물이다. 진정한 평화는 강대국의 시혜나 가해자의 변덕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이들의 저항과 국경을 넘는 양심들의 연대를 통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 그 길은 여전히 멀고 험난하겠지만, 인류의 존엄과 정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