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역사 퇴행 바로잡는 힘, 역사로부터 나와
지난 3년간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검찰독재정권의 수괴 부부도 감옥에 들어가 나라가 정상을 되찾고 무덥고 지루했던 폭염과 폭우도 그쳤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하늘의 구름은 높아졌다.
내일(6일)은 마침 추석날이다. 한 해의 농사와 풍년에 감사하고 우리를 보살핀 조상들의 음덕을 생각하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시간이다. 우리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오랜 조상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유전적 생명의 결과이며, 우리들의 정신과 문화는 과거의 역사적 경험과 지혜의 소산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시절 인연에 따라 민(民)과 물(物)이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2022년 3월 9일 제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나라경영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나 국내외 정책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채 검찰권력과 기득권 카르텔의 옹호에 의해 대통령직에 오른 윤석열은 민주주의와 인권과는 거리가 먼 시대착오적 독재자였다. 민의에 따른 정치는커녕 야당과 대화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오직 전 정권과 야당인사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남발하여 초기부터 물의를 일으키고 민심의 외면을 받았다. 그래서 총선에서 압도적인 심판을 받아 여소야대 정국을 자초하였다.
대화보다는 지시나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한 검찰독재자는 국회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들에 대해 거부권을 남발하다가, 2024년 12월 3일 저녁 급기야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무장군인을 동원하여 국회를 침탈하는 내란을 일으켰다. 야당과 비판세력을 제거해 영구집권을 획책한 이러한 무모한 친위쿠데타는 민주시민들의 격렬한 저항과 동원된 계엄군의 소극적 움직임, 국회의 신속한 계엄해제 결의를 통해 실패로 끝나, 현재 특검에 의한 그 내란세력에 대한 단죄가 진행 중이다.
이러한 무모한 친위쿠데타 내란의 역사적 반동을 막고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작년 12월 7일에 실시된 국회의 윤석열 탄핵안이 부결되자 여의도에 모인 시민들의 저항은 거세졌고, 정의로운 사제들과 양심적 교수들, 우리 민사네를 비롯한 여러 민주사회단체의 탄핵촉구 성명서가 빗발쳤다. 그래서 12월 14일 국회에서 재적의원 300명 중 204표의 찬성으로 윤석열 탄핵소추안은 가결되어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이제 윤석열은 끝났구나 하는 판단은 시기상조였다. 비상계엄 발령 때에는 침묵으로 동조했던 대법원장 조희대는 유력한 야당지도자의 대통령선거 출마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시도했고, 지귀연 판사는 법비다운 꼼수를 써서 윤석열을 풀어주었다. 한덕수와 최상목으로 이어지는 정부 내 내란세력들은 헌법재판소 구성을 의도적으로 방해하여 헌법재판소의 파면선고는 늦어지기만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꼼수와 조작은 민주공화국의 정체성 회복을 바라는 민주시민들의 열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2025년 4월 4일 드디어 문형배 헌법재판소 소장권한대행의 “피고인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주문 선고가 내려짐으로써 역사의 큰 물줄기는 바로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만열 선생님을 원로고문으로 모시고 윤석열 폭정 종식을 위해 활동해온 우리 민사네(민주사회를 위한 지식인 종교인 네트워크)도 2025년 3월 11일 <헌법재판소는 즉시 윤석열을 파면하여 내란을 종식시켜라>라는 시국성명서를 내고 헌법재판소가 파면 인용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촛불행동과 비상행동이 주도하는 안국동 송현광장, 광화문, 한남동 집회에 끈질기게 참여하여 결국 민주헌정질서를 다시 회복하는 데 함께 동참하였다.
이렇게 역사가 퇴행할 때 그것을 바로 잡는 힘은 어디서 왔을까. 국난을 극복해온 투쟁의 역사, 1960년 4.19 혁명과 1987년 6.10민주화운동 같은 역사적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이번 윤석열 내란에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은 1980년 전두환 군사쿠데타세력에 피 흘리며 맞선 광주민중들의 저항 경험과 그때 직접 참여하지 못한 데 대한 부끄러움과 후회가 큰 몫을 했던 것 같다.
지난 7월 2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있었던 ‘12.3 내란을 막은 시민영웅’ 기념식에서 광주 출신의 어느 시민이 12월 3일 계엄선포 당일 저녁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표가 “계엄군이 국회로 오고 있다. 시민들은 국회로 와달라”고 하는 호소를 들으면서,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의 어떤 여성이 트럭을 타고 광주시가지를 다니면서 “게엄군이 도청으로 쳐들어 오고 있다”는 절규하는 목소리가 떠올랐다고 했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하기 두 달 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에서 1980년 5월 전두환 휘하의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진주하고 있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재현했다.
“메가폰을 쥔 여자의 목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시민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 한강 《소년이 온다》(창비, 2014) 91면
이번 윤석열 검찰독재정권의 12.3 비상계엄으로 인한 내란을 물리치는 데는 우리나라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희생한 김주열,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광주민중항쟁 당시 희생된 민주열사들의 보이지 않는 일깨움과 도움이라는 역사의 힘이 영향을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말한 “과거가 현재를 도왔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고 한 말은 사실이다. 세계는 폭력적이고 고통스럽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비폭력적 평화적 방법인 ‘빛의 혁명’으로 비상사태를 해결한 것은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