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 침범' 놓고 또 얼어붙은 미·중…정찰용? 민간용?
블링컨 "주권 침해" vs 왕이 "억측과 허위선전"
국무장관 방중 출발 직전 연기…미·중 관계 표류
미 하원 중국특위 공동성명 "중국 공산당 위협"
중국 "유감 표명에도 부당한 공격, 결연히 반대"
중국 풍선의 미국 영공 침범으로 대화를 모색하던 미·중 관계가 다시 얼어붙고 있다.
미국은 이번 사태를 중국의 “정찰 풍선”(Spy balloon)이 영공을 침범한 심각한 안보 사안으로 규정 짓고 5∼6일로 예상됐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을 전격적으로 연기했다.
미 국무장관의 방중 추진은 미·중 양국의 양보 없는 전략경쟁이 충돌로 번지지 않도록 ‘가드레일’(보호난간)을 설치하려는 공동 노력의 하나였다.
작년 11월 발리에서 진행된 첫 대면 정상회담에서 우발적 충돌을 막고 공동 현안을 논의하는 고위급 대화 채널들을 가동하자는 합의에 따른 것이다. 그런 만큼 양국 관계는 방중 연기로 한동안 표류가 불가피해 보인다.
미 영공 침범 중국 풍선 정찰용? 민간용?
‘중국 풍선’의 존재는 지난 2일(현지시간) 미 국방부의 줌 브리핑에서 언론에 공개됐다. 패트릭 라이더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현재 미 본토 상공의 고고도 정찰기구(surveillance balloon)를 탐지해 추적 중”이라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미 당국에 따르면, 몬태나주 상공에서 풍선 격추를 검토했으나 격추시 잔해로 인한 피해가 우려돼 계획을 접었다. 몬태나주에는 미국의 3개 핵미사일 격납고 중 한 곳인 맘스트롬 공군기지가 있으며, 격납고에는 150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보관돼 있다고 한다.
양국은 중국 풍선의 성격과 미 영공 침범 경위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미국은 이 풍선을 “정찰용”으로 확신한다. 영공 침범도 ‘의도적’이라고 본다. 이 풍선의 항적에 몬태나주의 ICBM 격납고를 비롯한 안보적으로 민감한 지역들이 포함돼 있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군사적 목적의 정찰이 틀림없다고 거의 단정하는 분위기다.
중국의 해명은 다르다. 일단 이 풍선이 ‘중국 것’임을 시인하고, 영공 침범에 공식 유감을 표명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3일밤(현지시간)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서다. 그러나 그 목적은 기상 등 과학 연구를 위한 “민간용”이라는 게 중국의 주장이다.
미 영공 침범 경위도 편서풍의 영향과 풍선의 통제력 상실 등 불가항력적 상황 탓으로 돌렸다. 이처럼 양국의 간극이 커서 당분간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 “명백한 주권 침해”…블링컨 방중 전격 연기
미 국무부은 블링컨 장관의 방중 출발 직전인 3일(현지시간) 연기를 발표했다.
국무부 고위 관계자는 “블링컨 장관은 미·중 양국 관계 전반을 포함한 광범위한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오늘 밤 베이징으로 출발할 준비가 돼 있었지만, 부처·의회 등과의 협의를 통해 현 시점은 방중하기에 여건이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중국이 이 풍선이 민간용이고 불가항력으로 미국 영공을 침범하게 돼 유감이라고 설명했지만, 이것으론 부족하다는 바이든 행정부의 단호한 입장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 고위 관계자는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국방부의 성명에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해명과 달리 “정찰용 풍선”이 확실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는 “그 풍선이 미국 영공에 있는 것은 국제법뿐만 아니라 주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로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해 현 사태를 바이든 행정부가 얼마나 심각하게 접근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블링컨 장관도 이날 한미 외교장관 회담 뒤에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미국 대륙 위로 정찰 풍선을 비행시키기로 한 중국의 결정은 용납할 수 없고 무책임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블링컨은 이날 오전 중국의 외교라인 최고 책임자인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과 통화한 사실을 공개했다. 블링컨은 "나는 미국 상공에 이 정찰 풍선이 존재하는 것이 미국의 주권과 국제법을 명확하게 침해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미 의회 “중국 공산당 위협” 거론, 행동 촉구
미국은 중국의 추가 조치를 강하게 압박하는 분위기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가 갈수록 극단화되는 미 의회 내 반중 정서를 의식한 행보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반중 정서가 지배적인 미 공화당은 바이든 행정부의 ‘우유부단한’ 대중국 자세를 비판하며 강경 대응을 요구하고 나섰다.
공화당 소속인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전날 트위터에서 "미국의 주권을 뻔뻔히 무시하는 중국의 불안정한 행동에 대응해야 하며 바이든 대통령이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압박했다.
미 하원 중국특위의 민주·공화 지도부는 ‘중국공산당의 위협’까지 거론하며 가세했다. 이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이 사건은 중국 공산당의 위협이 먼 장소에 국한된 게 아니라 우리 본토에도 있으며 우리가 위협에 맞서 행동해야 함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지나치게 중국을 압박해 양국 관계를 막다른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나는 왕이에게 미국은 중국과 외교적 관여를 할 준비가 돼 있으며 여건이 될 때 베이징을 방문할 계획”이라는 블링컨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국과의 소통 채널을 계속 열어놓고, 여건이 허용되는 대로 방중 의사를 전한 셈이다.
중국 “유감 표명에도 부당한 공격, 결연히 반대”
중국은 신속히 상황을 파악해 영공 침범을 공식 시인하고 유감을 표명했는데도 미국의 공세가 계속되자 반발하고 나섰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3일에 이어 4일에도 입장 발표를 통해 "중국은 어떤 주권국가의 영토와 영공도 침범할 의도가 없고, 침범하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미국의 ‘주권 침해’ 비판은 너무 나갔다는 게 중국의 생각이다.
특히 그는 "미국의 일부 정객과 매체가 이번 일을 구실 삼아 중국을 공격하고 먹칠하는 데 대해 중국은 결연히 반대한다"고 했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왕이 위원도 블링컨 장관과의 통화에서 "중국은 책임지는 국가로, 일관되게 국제법을 엄격히 준수해왔다. 어떤 근거 없는 억측과 허위 선전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측은 블링컨의 방중 연기 결정에 개의치 않는다면서도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외교부 대변인은 애당초 양국 외교수장 회담은 공식 발표된 것이 아니었다면서 "미국이 발표한 관련 소식은 미국 자신의 일이며, 우리는 그것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작년 발리 미·중 정상회담의 합의 정신에 따라 외교채널 가동을 통한 사태 해결을 희망했다.
왕이 위원은 "의외의 상황에 대면해 양측은 집중력을 유지하며, 적시에 소통하고, 오판을 피하고 이견을 관리·통제해야 한다"고 말했고, 외교부 대변인도 "양국 외교팀의 역할 중 하나는 양국 관계를 적절히 관리·통제하고, 특히 일부 뜻밖의 상황을 냉정하고 온당하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외교채널을 가동해 이 문제를 매듭짓자는 얘기다.
하지만 미 의회의 반중 정서가 강하고 차제에 중국을 손 좀 보자는 목소리도 적지 않아 블링컨 장관이 멀지 않은 시기에 왕이 위원과 마주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블링컨의 방중은 미·중 관계의 악화를 막고 대만해협과 남중국해 등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거시경제와 기후변화, 북핵 등 공동 현안을 협의할 기회였으나 불발됐다. 미·중 관계는 국제질서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심축이다. 치열하게 경쟁하되 늘 대화의 문은 열려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