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식인이 배워야 할 배롱나무의 체질

〈이봉수 제주이왁〉 ‘배롱서원 유사’

시대착오적 직함을 갖게 된 사연

2025-09-23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바다 건너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에 이어 배롱서원을 운영하면서 제주가 미디어와 인문학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이봉수 제주 이왁'은 제주민과 나의 일상에 인문학과 세상 ‘이야기’(제주어로는 ‘이왁’)를 덧실어 보내는 글이다.

내 마음 속 명소, 배롱나무가 있는 풍경들

한미리스쿨(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봉 아래에서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로 옮긴 뒤, 집 이름을 '배롱서원'이라 짓고 직함을 '배롱서원 유사'라고 했더니 축하하면서도 의아해하는 지인들이 꽤 있었다. 한 친구는 “AI시대에 시대착오적 작명”이란 핀잔을 주었다.

포털에서 ‘배롱나무 명소’를 치면, 놀랍게도 나와 인연이 깊은 데가 두세 곳은 나온다. 안동 병산서원과 체화정, 그리고 서천 문헌서원이다. 병산서원과 체화정은 하회마을 인근에 있는데, 지금 터만 남은 하회 풍남국민학교는 내가 ‘학교’라는 데를 처음 입학한 곳이다. 안동∙의성 일대 국민학교를 교사∙교감∙교장으로 전전하던 아버지는 당시 교감이었다.

낚시하는 아버지 따라 바구니 들고 다니던 하회마을

외지인이라고는 일년 가도 몇 명 보기 힘든 시절, 만송정 솔숲과 부용대 사이 낙동강 모래톱은 낚시하는 아버지를 따라 고기바구니를 들고 다니던 곳이었고, 모래구멍에 손만 쑤셔 넣으면 조개가 짚였다. 강 건너편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병산을 바라보며 강변길을 걸어가면 병산서원이다.

 

병산서원 여름 경관은 배롱나무꽃이 압도하는데, 입교당∙만대루∙동재∙서재로 둘러싸인 중정에는 배롱나무를 심지 않고 사당인 존덕사 밖 여유 공간에 심은 두어 그루가 거목이 됐다. © 안동시

원래 서천군 한산이 본향인 우리 일족이 안동군 일직면(아동문학가 권정생이 교회종지기로 살던 곳) 소호리에 세거하게 된 것은 입향조(入鄕祖)가 서애 유성룡의 외손자였기 때문이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에 소개). 하회는 하회유씨 집성촌이지만 우리들은 외손 대접을 받아 밤에도 대갓집으로 마실을 다니곤 했다.

프랑스 박물관장과 충효당 종손의 문화충격

그 인연은 <조선일보> 다니던 초짜기자 시절로 이어졌다. 그 신문사에서 로댕전시회를 열었는데 당시 비서실에 파견돼 있던 나는 프랑스에서 온 여성 박물관장 둘을 하회와 도산으로 안내한 적이 있다. 그들은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안동이 고향인 나에게 안내역이 맡겨졌기 때문이다.

그때 유영하 충효당 종손은 대청에서 모시한복에 정자관을 쓰고 빈객들을 맞이했는데 문화충격이 컸다. 종손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데 한 여성이 "왜 저렇게 앉아 있느냐"고 물어 엉겁결에 'Confucian sitting style'(양반 앉음새)라 설명했다. 그러자 두 여성이 유교문화를 존중한답시고 힘겹게 다리를 포개어 앉는 게 아닌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 종손은 시선 둘 데가 없어 모로 앉고... 종손의 문화충격은 만송정 앞 낙동강변을 안내할 때 더 증폭됐다.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두 여성이 강물을 보고 갑자기 텐트 뒤로 가더니 수영복을 입고 나타난 거였다.

 

하회마을 만송정에서 부용대 쪽으로 낙동강을 건너는 나룻배에서 프랑스 박물관장이 동료와 나를 위해 찍어준 사진. © Anne Marie Villeri

찍어준 여성은 귀국 후 사진과 함께 안부 편지를 보내왔는데, 박물관 잡지에 '안동여행기'도 기고하려 한다고 전했다. 가장 인상적인 유물은 충효당 영모각에서 본 서애의 가죽신이었다고 한다. 그가 "신발이 왜 이렇게 크냐"고 질문하길래 유영하 종손의 설명에 기대어 "원래 체구가 크기도 했지만 신발을 크게 만들어 댓돌에 놓아두면 '여기 대인이 있다'는 표시가 됐다"고 덧붙인 기억이 난다.

체화정은 안동시내에서 하회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데, 여름 휴가 때 국도를 따라 안동 고향집을 오갈 때면 만개한 배롱나무꽃과 연꽃에 반해 잠시 차를 멈추곤 했다.

 

안동-서울 국도변 풍산읍 어귀에 있는 체화정에도 배롱나무 두 그루가 거목으로 자라났다. © 경북일보

내가 본 가장 웅장한 배롱나무는 문헌서원

내가 본 가장 웅장한 배롱나무는 서천 문헌서원 뒤뜰에 서 있는 두 그루였다. 문헌서원은 고려말에 소설 <죽부인전>을 쓴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을 모신 곳으로 그들은 우리 가문의 중시조이기도 하다. 서천에는 막냇동생이 안과의원을 열고 있기도 한데, 가까운 친인척 50여 명이 서원 앞 한옥 숙소에서 일박 한 적도 있다. 이 배롱나무는 2025년 현재 359년 묵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천 문헌서원 뒤뜰에는 건물들이 축소모형처럼 여겨질 만큼 거대한 배롱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 충남도

집 안마당에는 왜 배롱나무를 심지 않았을까

눈썰미 있는 이는 이 글과 세 풍경사진에서 눈치챘겠지만, 예전부터 배롱처럼 크게 자라는 나무는 중정에 심지 않고 탁 터진 앞마당이나 뒤뜰에 두 그루 정도만 심어서 균형된 경관을 즐겼다. 환경대학원에 다닐 때 조경학과 환경심리학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전통조경에서는 입구자집 안에 큰 나무를 심는 걸 꺼려 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집(口) 안에 나무(木) 한 그루를 심으면 ‘곤할 곤’(困)이 되니 피하고 싶었을까? 실은 집 안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드리워져 볕이 잘 안 드는 걸 피하려는 지혜였을 터이다.

선비들이 서원이나 누정에 배롱나무를 많이 심은 이유는 나무의 체질 때문이기도 했다. 배롱나무는 겉껍질을 떨구고 맨살 같은 몸체를 드러내는데 겉과 속이 같다 하여 선비가 본받아야 할 태도로 여겼다.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 곧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다’라는 개념은, 성리학의 선지후행(先知後行), 곧 ‘먼저 알아야 행할 수 있다’와 조금 다르지만 아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임금이 불러도 안 응하던 선비들 자존심의 근거지

배롱나무는 폭염에도 굴하지 않고 백일 가까이 꽃을 피워 목백일홍으로도 불리는데, 학문하는 이는 인내심과 지조를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도 준다. 서원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민폐가 커지자 대원군의 혁파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임금의 부름에도 함부로 응하지 않는 선비들 자존심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출세에 눈이 먼 요즘 지식인들에게는 더욱 경각심을 준다.

4년 전 성산 일출봉 근처에서 키아오라리조트를 임대해 한미리스쿨을 열 때도 배롱나무가 유혹했는데, 이번에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에 집을 살 때도 배롱나무에 현혹됐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함덕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집에는 앞 정원에 아홉 그루, 뒤 텃밭에는 농로 가로수로 10여 그루를 심어 놓았다. 정원과 텃밭에는 해송 목련 벚나무 같은 정원수뿐 아니라 과일나무도 많아, 감 귤 배 대추 복숭아 무화과 모과 등 웬만한 과일은 다 열리는 ‘종합과수원’이다.

 

배롱서원에는 앞뒤로 20그루 가까운 배롱나무들이 자란다. © 이봉수

자연에서 빌린 경치는 나눠 가져야 한다

배롱서원은 상업적인 영업은 하지 않고 초집중 언론인양성과정 학생들에게는 외부강연료 등을 재원으로 수강료는 물론 숙식비도 받지 않는다. 중앙언론사 진출을 어렵게 여기는 지방대학과 저소득층 출신, 그리고 장애인에게는 가점을 줘서 선발한다. 페이스북 팔로워 등 교분이 쌓인 지인들에게도 미리 연락하면 북스테이를 할 수 있게 무료 제공한다. 서원은 경치 좋은 곳에 들어섰는데, 현대판 서원도 소유자의 별장이 아니라 어차피 자연에서 빌린 차경(借景)을 좀 나눠 갖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롱서원 1층에서 보는 정원도 예쁘지만, 2-3층에서 내려다보는 네 방향의 4계는 더없이 아름답다. 남쪽은 한라산과 오름의 파노라마, 서쪽은 편백 등 제주 중산간지대 특유의 수목과 귤밭, 동쪽은 잔디가 고운 마을 축구장, 북쪽은 함덕해수욕장과 서우봉의 멋진 경관이 펼쳐진다. 갈치잡이배의 불빛이 유독 휘황하게 밤바다를 수놓는 날 새벽에는 우리가 제주항으로 생선 사러 가는 날이다. 가격이 푹 떨어지기 때문이다.

서원에서 허드렛일 하는 유사가 되다

2000년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고양 장모집과 귀국 후 서울∙제주 등지로 떠돌면서 셋집과 창고에 맡겨 두었던 책을 2천 권쯤 버리고 1만 권 가까운 책을 분야별로 모아두니 상왕으로 물러난 충선왕이 원나라 수도 연경(북경)에 설립했다는 만권당이 부럽지 않다. 글 쓰고 가르치는 사람에게 책이 분산돼 있는 것만큼 정신 산란한 일도 없다.

여름 내내 땀에 절어 잡초 무성한 정원을 손질하고 거실은 물론 복도와 식당까지 책장을 들인 뒤 앞뒤 현관 신발장들까지 책장으로 개조해 책을 정리하고 나니 문득 집 이름을 붙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가족들에게 집 이름을 공모하니 막내아들은 장난스레 ‘봉수서원’이 좋겠다고 했다. 서원은 ‘책을 모아 놓은 집’이란 뜻이고 강좌를 여는 곳이었으니 차용할 수 있는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을 내세우는 건 뻔뻔스럽고 서원에 많이 심는 나무가 마침 배롱이니 배롱서원으로 정했다.

원래 서원에서 허드렛일 하는 이를 유사(有司), 살림을 책임지는 이를 도유사(都有司)라 불렀으니, 배롱서원에서 장작 패고 화덕솥뚜껑에 삽겹살 굽는 나는 유사, 마누라는 도유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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