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진 '총석정절경'이 근사한 그림이라고? 개뿔

순종의 거소에 그려진 조선 총독부 부역화

낯선 시각, 화풍…일제식민지 투어리즘에 딱

2025-09-21     임종업 에디터
총석정절경. 

총석정절경 부분.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의 근사한 벽화’ 특별전(2025. 8. 14~10.12)에 6점의 대형벽화가 선보이고 있다. 창덕궁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을 각각 장식했던 벽화 6점으로, 정확히 말하면 비단에 그려 벽에 붙였던 부벽화다. 총석정절경(195.5×882.5, 김규진) 금강산만물초승경도(195.5×882.5 김규진)는 순종의 집무실 희정당에, 백학도(214×578 김은호) 봉황도(214×578 오일영, 이용우)는 순종 부부의 생활공간인 대조전에, 조일선관도(184×526 노수현) 삼선관파도(184×526 이상범)는 대조전 부속건물인 경훈각에 각각 부착됐던 그림이다.

박물관 쪽에서 붙인 ‘창덕궁의 근사한 벽화’라는 제목에 들어있는 ‘근사하다’는 단어는 ‘삼가 그리다’라는 謹寫에서 따왔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멋있다’는 의미도 내포하는데, 그림들은 근사하기는커녕 기괴한 느낌을 준다.

왜 그런가.

그림이 붙어있던 세 건물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가 머물던 공간으로, 1917년 화재로 소실되자 경복궁에서 유사한 용도로 쓰이던 건물을 옮겨와 1920년에 세운 것들이다. 대조전은 경복궁 교태전, 경훈각은 동 만경전, 희정당은 동 강녕전을 뜯어왔다. 이건 주체는 조선 총독부다. 조선물산공진회라는 관변행사를 구실로 1913년부터 2년에 걸쳐 경복궁 내 건물 90%를 철거한 바 있다. 순종을 위한 공간은 그러니까 ‘조선의 정궁’ 경복궁 훼철의 마무리 수순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에 앞서 일제 통감부는 1908년 4월부터 18개월에 걸쳐 창덕궁과 이웃한 창경궁을 훼철하여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바꾼 바 있다.

이들은 건물을 이동, 재조립하면서 일부 구조를 일본식으로 개조했다. 희정당의 경우 양식화장실, 목욕탕, 유리창, 커튼박스, 서양식 가구가 도입됐다. 벽화도 같은 맥락이다. 전통적으로 조선 궁궐에는 벽화를 그리지 않았다. 대신 국왕이 행차하는 곳에는 일월오봉도를, 기타 궁중행사에는 화조도, 모란화, 십장생도, 고사도 등을 사용했는데, 이들은 모두 이동이 가능한 병풍식이었다. 그러니까 ‘근사한 벽화’ 6점은 조선 국왕의 위엄을 위해서라기보다 허수아비 국왕의 실권없음을 드러내는 일본의 의도에 더 近似한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벽화는 그것이 그려져 붙여질 공간이 미리 마련되고 그 크기와 비례에 맞춰 그려지는 터라 화의나 스타일은 후순위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경훈각 삼선관파도. 신선 셋이 파도를 바라보며 묵상에 잠긴 모습인데, 삼선관파는 좌측 하단 일부에 보일 뿐 나머지 그림은 기괴한 산이 중첩된 모양새다.

내가 주의깊게 들여다 본 그림은 희정당 벽화 금강산만물초승경도와 총석정절경. 김규진이 그린 두 그림 모두 전통적인 조선의 그림과 판이하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높이에다 9m 가까운 길이인데, 통상 와유를 위한 것이라면 기행의 경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시선을 이동하면서 감상할 수 있는 두루마리 형식이어야 하지만, 두 그림은 벽화 규격에 맞춰 사생의 대상이 되는 산수를 꿰어 맞췄다. 금강산승경도의 경우 여백을 전혀 두지 않았고, 색깔 역시 일본화처럼 알록달록하여 경개를 차분히 감상하게 하기보다는 보는 이의 심사를 어지럽힌다. 총석정절경도는 통상 정자에서 해돋이와 함께 탐승하던 전래의 관점이 아니라 배 위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이례적인 관점을 취한다. 그린 이의 정서를 투사하기보다 소재의 진기함에 관심이 쏠려 있다. 

화풍도 화풍이지만 국왕의 거처에 웬 금강산, 총석정 그림일까.

김선정(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의 논문 ‘1920년 창덕궁 희정당 벽화 –식민지배와 근대성의 표상으로서의 금강산도’를 읽어보면 저간의 사정이 명확해진다.

 

김홍도 총석정

필자 미상 금강산도 10폭병풍 중 총석정 부분.

전 허필 총석도.

금강산도는 조선 왕실에서 궁중 장식화로 애호된 주제가 아니었다. 다만 사대부들의 수신처, 요산요수 탐승지로 각광받았을 뿐이다. 조선 중기 이후 금강산도는 기행의 여정에 따른 시공간의 이동을 반영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전경도, 명소도 형식을 띠었으며 이는 병풍이나 화첩으로 꾸며졌다. 근대에 들며 장방형 화폭에 일본화 또는 서양화풍이 접목되었다. 필자는 금강산의 의미와 표현방식의 변화를 철도와 도로망의 발달을 배경으로 한 관광의 성행을 그 이유로 꼽는다. 1914년 경원선 철도의 개설과 조선총독부의 금강산 관광개발로 한달 이상 걸리던 금강산행이 일주일 내외로 단축되면서 탐승의 대상에서 관광대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영토확장과 결부되는 식민지 투어리즘이 그것이다. 지은이는 식민지배의 합리화를 선전하는 효과적 수단이 금강산이었고, 이를 그린 희정당 벽화는 순종이 외부인사를 접견하는 공간에 의도적으로 배치되었다고 본다.

두 그림을 그린 김규진(1868-1933)은 1919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금강산 기행문을 연재한다. 이를 보면 경원선을 타고 철도관리국에서 운영하는 금강산행 자동차를 이용해 금강산을 다녀온 것이 확인된다. 그는 그림을 그리던 1920년에 또 한차례 다녀왔다.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승경도는 조선 사대부들이 즐겨찾은 내금강이 아니라 일제가 관광개발한 외금강 지역이고, 총석정 역시 새로 낸 자동차 길에 인접한 명소에 해당하는 점도 이와 관련된다.

순종은 허수아비이니 그렇다 치고, 당시의 대표화가 김규진은 돈을 두둑히 받고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부역한 셈이다. 희정당 벽화가 기괴하게 보이는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발행된 총석정 사진엽서.

일제 강점기 때 발행된 총석정 사진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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