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정책 대전환 없이 문화강국 불가능하다
대통령 직속 국가문화강국위원회를 설치하자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12·3 내란은 민주적 헌정 질서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했으나, 역설적으로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더 심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국면이 문화·예술 정책의 대전환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인 것 같다. K-컬처 300조 원이란 기치가 상징하듯이 이재명 정부도 문화·예술 정책을 과도하게 산업적 성장과 효율성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문체부도 이에 편승하여 구조적 개혁 문제를 재차 덮어두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 정책을 문화산업 논리에 종속시킨 문체부 관료주의
오늘날의 문화·예술 정책은 사실상 문체부 관료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이들은 단지 행정고시를 통과했을 뿐임에도, 문화는 물론이고 예술에 대한 전문성까지 가졌다는 과신 속에서 정책 전반을 장악하며 공익의 사익화도 꺼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기금 중심의 비민주적인 재정 운영과 다수의 공공기관을 하청 업체처럼 거느리는 구조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 결과, 정책 결정 과정은 정치권과 관료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었고. 문화·예술의 공공성과 민주성은 지속적으로 억압되었다.
박근혜 정부 시기 드러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는 이러한 구조적 폐해가 집약적으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청와대, 국정원, 문체부 차원에서 은밀히 창작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비판적 표현 등을 이유로 지원 배제 명단을 관리한 이 사태는 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국가폭력이었다. 이후 문화·예술계의 자율성과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과제들이 활발하게 제기되었으나 그 과제를 실현해 나갈 제도적 동력은 꾸준히 유지되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개혁의 흐름은 반복적으로 왜곡 및 후퇴했다.
이런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환적 시도는 이미 노무현 정부 시기에 있었다. 당시 제시된 『창의한국: 21세기 새로운 문화의 비전』(2004)은 자율성, 다양성, 참여, 분권 등을 핵심 가치로 삼았다. 즉, 이 비전은 문화민주주의(Cultural democracy)의 실현을 위한 이정표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독임제 기구였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개편하여 민간 중심의 합의제 기구로 전환한 것은 정책 당사자의 실질적 참여를 제도화한 의미있는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이후 정권들은 창의한국의 가치를 충분히 계승하지 않거나 망각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문화·예술 정책은 더 견고해진 관료주의 속에서 문화산업 논리에 종속되었다.
국가문화강국위원회 밀어내고 등장한 대중문화교류위원회
현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 방향은 이렇게 누적된 한계 위에서 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재명 정부는 국민주권정부를 지향하며 민주주의 확장과 참여를 강조했지만,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은 문체부의 관료주의 위에서 문화산업 논리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상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예술 분야와 관련하여 지난 조기 대선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공약과 국정기획위원회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은 문화산업 활성화와 콘텐츠 수출 확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나마 여기에서 문화·예술 정책의 구조적 개혁을 논의할 유일한 거점으로 기대할 수 있는 국가문화강국위원회 설치 공약조차도 문체부 산하의 자문기구로 제시되는 수준에 그쳤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보다도 위상이 낮기에 정치권의 무관심과 관료주의 속에서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점에서 차후 국가문화강국위원회는 대통령 직속 자문위원회로 격상되어 문화·예술 정책을 문화민주주의 관점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기점이 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최근 문체부 측은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는 문화산업 확대를 위한 발판이 될 것”이라며 대통령 직속으로 대중문화교류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문체부 장관과 가수 및 연예기획자인 박진영이 이 위원회의 공동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물론 현 정부의 성장 기조의 연장선에서 대중문화 정책에 대한 관심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예술 전반을 포괄하는 국가문화강국위원회 공약을 충분한 소통 없이 현재와 같이 사실상 축소한 것은 장기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애초에 대중문화 정책의 중장기 전략과 부처 간 협력을 조정하는 기능은 국가문화강국위원회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대중문화교류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은 문화강국의 토대가 되는 예술, 지역문화 등의 영역과, 문화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문체부 개혁 등의 문제에서 더 멀어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이 없다. 국가문화강국위원회 공약을 후퇴시키는 상황을 가장 환영할 집단이 누구이겠는가. 바로 성장과 문화산업 논리 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 및 확대하려는 문체부 관료들이다.
위상이 강화된 국가문화강국위원회가 설치될 수 있다면 문화·예술 정책의 대전환을 추동할 출발점 중 하나로, 문체부로부터 예술 기능을 분리하여 독립적 집행 권한을 가진 국가예술위원회를 국가인권위원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나 방송통신위원회와 같이 중앙행정기관으로 격상하는 것을 논의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이는 「블랙리스트 관련 문화예술 기관 제도개선 연구」(2018)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예술이 문화산업 및 문화소비의 바탕이라는 명분 위에서만 존재가치가 인정되어, 기존의 주류 문화에 저항하며 새로운 미학을 개척하는 문제적 예술을 옹호하지 못했다는 점을 반성하고, 숙의민주주의, 플랫폼민주주의를 더욱 고도화하기 위해 제안된 바 있다. 이 같은 구조적 개혁은 문체부 관료의 기득권 구조를 해체하는 동시에, 예술은 물론이고 문화 정책 분야 역시 문화민주주의의 가치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문화민주주의로 문화강국 이룰 구조적 개혁 고민해야
다만 이러한 위원회의 위원 구성 과정에서 대통령이나 국회의 추천과 임명을 통해서만 위원이 선발될 경우 정치적 독립성과 자율성이 크게 침해될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일부 위원은 공모 방식으로 선발하거나 관련 시민사회단체, 예술 현장으로부터 직접 추천을 받는 방식으로 위원의 다양성과 독립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국가예술위원회는 예술가와 현장 활동가 등이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상향식 의사결정 구조를 갖춰야 하며 동시에 심의·의결권과 집행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문화민주주의의 지속적으로 갱신하기 위한 구조적 개혁의 출발점이자 관료주의에 포획된 예술은 물론이고 일부 문화의 영역도 분권과 협치를 기반으로 한 공적 영역으로 재편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문화·예술은 산업적 성장의 수단이나 소비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민주주의의 감각을 확장하는 공적 기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다양한 당사자가 정책의 수립과 집행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최대화하며 관료주의를 견제하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의 국정 철학이 문화·예술 분야에도 충분히 접속될 수 있도록, 이미 가동 중인 대중문화교류위원회와의 기능 차별성을 고려하여 문화강국의 토대와 문화민주주의의 가치에 기반해 문화·예술 정책의 대전환 계획을 수립 및 추진할 별도의 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