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안 쓰는 역사학자가 반헌법열전을 쓰다

한홍구 교수 인터뷰하려다 필진으로 참여

소통용 '텔레그램' 사용 위해 첫 전화 구입

영국 시골의 아날로그 인간의 디지털 투쟁

한국 현대사 가장 어두운 곳 기록한 보람

2025-09-12     김성수 시민기자

역사학자는 기록의 덫에 걸려 사는 게 일이다. 덫도 여러 가지다. 내가 걸려든 것은 소위 '한홍구 트랩'이었다.

2015년 가을, 나는 순진하게 한홍구 교수께 메일을 보냈다. "선생님, 인터뷰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언론에 반헌법행위자열전 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전혀 예상 밖의 답신이 왔다.

"지금 필자를 모집 중인데 김박사도 필진으로 같이 해주세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인터뷰어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새 원치도 않은 필자가 됐다. 역사를 연구하며 별별 사연을 다 기록했지만, '교수님의 친절한 인질극'에 걸린 사연까지 남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사실 고백하자면, 이 덫은 따뜻했다. 함정인 듯 꽃길 같달까.

 

수염있던 시절 한홍구 교수가 영국 시골 우리집을 방문했다.(김성수 시민기자)

전화도 아니고, 전보도 아닌 텔레그램

문제는 곧 터졌다. 위원회 활동을 하기 위한 기본 조건. 바로 '텔레그램 사용'이다.

여기서 고백 하나. 우리 가족은 완벽한 스마트폰 무소유주의다. 나뿐 아니라 아내, 심지어 당시 10대였던 아이들까지 휴대전화 없는 삶을 누렸다. 영국 친구는 진지하게 물었다.
"퀘이커교도라서 폰 금지 교리라도 있는 거야?"
아주 그럴싸한 가설이지만, 퀘이커에는 그런 교리나 계율이 없다. 다만 집안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을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아내였다. 내가 "반헌법열전 일 때문에 텔레그램을 써야 한다"고 말하자, 즉각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텔레그램? 그거 19세기에 영국에서 쓰던 전보 아니야? 한국은 아직도 전보를 쓰는 거야?"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의 로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메신저 전용기'

보다 못한 한홍구 교수께서는 "한국에서 스마트폰을 사서 영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제안까지 하셨다. 고개 숙여 감사드릴 일이지만, 역사학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아내가 임시 정액제 휴대폰을 하나 사 주었다.

그 전화기의 쓸모는 단 하나. 오직 텔레그램. 이후로는 장롱 깊숙이 들어가 지금도 곰팡이와만 문자를 주고받는 중이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비싼 텔레그램 전용기'일 것이다. 이쯤 되면 나는 스마트폰의 효용성에 대해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말할 자격이 있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자료사진

'성인군자'에서 반헌법 군상들까지

평생 함석헌 선생(1901~1989) 같은 '성인군자'를 연구해 왔다. 반헌법열전은 정반대의 인물들을 다뤘다. 한국 현대사의 군부 쿠데타 주역들, 고문 기술자들, 언론을 억압한 권력자들. 이른바 '국가 권력을 남용한 자들의 악인열전 또는 블랙리스트'였다. 그런 그들을 연구하며 매번 되뇌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었을까."

존경심에 고개를 떨구던 함석헌 연구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분노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여기서도 배움이 있었다. 그들의 행적은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절대 반면교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반헌법열전은 윤리 교과서다. 성인은 동경하게 하지만, 악인은 경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자료사진

영국 시골에서 디지털 투쟁

영국 시골에서 반헌법열전 활동에 참여했다. 직장과 가족에 치여 연구하고 글을 쓸 시간이 한정적이었지만, 그 몇 시간이 내겐 충만한 시간이었다. 낯선 땅에서 모국의 동지들과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붙잡고 고민했다.

다른 이들은 SNS로 전 세계와 연결되었지만, 나는 장롱 속 스마트폰과 서툰 텔레그램으로 한국의 현대사와 연결되었다. 웃어넘길 수 있지만, 내겐 무척 진지한 투쟁이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자료사진

반헌법열전의 진짜 의미

여기서 꼭 강조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의 작업은 단순히 '나쁜 사람 명부' 작성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곳을 기록하려는 일이다. 기록은 단죄이자 해방이다.

우리는 늘 승자의 역사만을 배워왔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는 패자의 기록, 그 중에서도 '악행의 기록'을 빠짐없이 남길 때 완성된다. 고문 피해자의 증언만큼이나, 고문을 자행한 자의 이름도 기록되어야 한다. 그래야 끝내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다.

반헌법열전의 활동은 그래서 귀하다. 수많은 필진들이 모여 방대한 자료를 추적하고, 은폐된 진실을 직시하며, 공동의 기록을 남긴다. 힘없는 개인의 글쓰기가 모여 공동 기억을 만든다.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적 역사 편찬이다. 권력자들이 두려워하는 역사의 힘이다.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주최로 열린 '반헌법행위자열전 집중검토 대상자 1차 명단발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대상자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2016.7.13. 연합뉴스

스마트폰 없는 자의 깨달음

돌이켜보면, 나를 강제로(?) 필진으로 만든 한홍구 교수께 가장 큰 감사의 빚을 졌다. 덕분에 원치 않던 스마트폰도 생겼고(장롱 유폐형이긴 하지만), 텔레그램도 배웠으며, 무엇보다 소중한 역사 기록 작업에 작은 몫을 더할 수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기술은 변한다. 그러나 진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의지는 시대와 매체를 초월한다. 전보를 쓰든, 텔레그램을 쓰든, 아날로그 원고지에 펜을 굴리든, 중요한 건 '진실을 남기는 일'이다.

그러니 부디 스마트폰 없다고 무시하지 마시라. 우리는 보기보다 위험하다. 기록하는 사람은, 때로는 권력보다 더 무섭기 때문이다. 기록은 언젠가 반드시 현실을 바꾼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자료사진

반헌법열전은 미래를 지키는 장치다

반헌법열전은 과거를 들추어내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다. 기록되지 않은 잘못은 언제든 되풀이된다. 기록의 힘은 그래서 더욱 크다. 반헌법열전 기록자의 손에 쥔 작은 원고 한 장이, 한국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든든한 초석이 된다.

텔레그램이든 전보든,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수단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을 기록하려는 의지만은 멈추지 않는다. 스마트폰 없는 역사학자의 투박한 글쓰기조차, 결국은 민주주의의 안전핀을 조여 놓는 일이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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