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거듭해야 이루는 과학혁명…빛의 혁명은 달라

산화 작용 입증한 '화학의 아버지' 라보아제

물질의 연소 과정에 대한 기성 이론 뒤엎어

프랑스 혁명 때 처형…모든 계급 과세 주장

"과학 혁명은 '장례를 거듭한 후에' 일어난다"

한국, '장례 없이' 두 번의 대통령 탄핵 이뤄

2025-09-06     강홍석 시민기자 (이론화학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선거를 하루 앞둔 2일 서울 여의도공원 마지막 유세에서 이 후보의 '빛의 혁명' 완성을 위한 승리에 대한 연설을 들은 시민들의 응원봉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2025.6.2. 이호 작가

최근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지난달 '네이처' 잡지에 실린 '역학(疫學) 모델로 본 1789년 프랑스 대공포 시기 소문의 확산(Epidemiology models explain rumour spreading during France's Great Fear of 1789)'이란 제목의 논문이다. 이번 연구에는 대공포의 확산을 이해하기 위해 전염병의 확산을 설명하는 역학 모델들을 적용했다. 

논문은 대공포의 확산이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극심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집단 지성의 형태를 가졌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언어 독해력이 높고 부유한 지역이 대공포를 경험할 확률이 더 높았다고 한다. 얼핏, 매우 무질서하게 보일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이 이성적 동기가 지배하는 변혁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4.19, 5.18, 6.29 그리고 최근 2번의 대통령 탄핵 등 우리 현대사의 혁명적 사건들도 당연히 그러하지 않겠는가?

프랑스 대혁명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프랑스 화학자 '앙투완 라보아제(Antoine Lavoisier)'에 대해 살펴 보려고 한다. 그의 과학적 삶과 생각을 단순히 기술하기보다는 그것들이 우리의 근대사와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당대의 수학자 라그랑쥬(Lagrange)가 라보아제를 추모하며 한 유명한 말이 있다. "그의 목을 베는 데는 순간이면 족하지만, 그와 같은 이를 다시 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백년이 걸릴지 모른다." 공포정치의 혁명 재판관 앞에서 이 말을 당당히 할 용기는 없었던지, 아쉽게도 처형 후에 한 말이라고 한다.

 

라보아제의 초상화, Jacques-Louis David 작, Metropolitan Museum of Art, 소장번호, 436106 , public domain

라보아제는 영국의 화학자이자 목사였던 프리스틀리와 동시대를 살았으며, '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화학자였다. 그가 증명한 '화학반응에서 질량이 보존된다'는 이론은 지금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제안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산소가 질량보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이다. 또한 연소와 금속의 부식이 산소와의 반응, 즉 현대적 의미에서 '산화(oxidation)'에 해당함을 밝혔다. 이는 당시 절대 다수의 학자들이 신봉하던 '플로지스톤 이론'에 한 방 결정타를 가한 셈이다. 프리스틀리가 산소 자체를 발견했다면, 라보아제는 산소가 관여하는 매우 중요한 화학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 당시 화학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산화와 환원이 정반대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따라서 화학 반응에서 기체가 발생하면 '산화'에 의한 결과인지 '환원'에 의한 결과인지 구분할 능력이 전무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물질의 연소 과정에서 배출된다고 믿었던 플로지스톤을 굳이 현대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산소가 아니라 수소에 해당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전자(electron)'에 해당한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전자는 독자적으로 방출되는 일이 없으므로 타당성이 없다. 그런데,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기체는 산소이고, 그가 '산화수은(HgO)'을 가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반응은 '산화'의 한 형태인 연소와는 반대인 '환원'이었다.

 

라보아제의 증류 실험, Wikipedia Commons, CCA-SA 4.0

프리스틀리를 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가 라보아제처럼 부유하고, 또 정치적 문제와 거리를 두었다면 연구를 계속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 결과 화학 혁명에 어떤 기여를 하였을지도 알 수 없다. 프리스틀리는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위해 행동한 정치적 혁명가이기도 했다. 이들의 서로 다른 삶은 격변의 현대사에서 우리나라 진보적 이공계 전공자들이 겪어온 내적 갈등을 대변하는 듯하다.

반면, 거의 동시대인 1776년 영국의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1731~1810)는 아연이나 철을 묽은 산과 반응시켰을 때 일어나는 금속의 산화 과정에서 다른 기체인 수소가 발생함을 발견했고, 이를 플로지스톤 이론으로 자연스럽게 설명했다. 현대 화학으로 보면 이 과정은 물의 환원 과정이다. 물론, 이 기체는 산소와는 아주 다르다. 쥐가 수소를 마시며 호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같은 플로지스톤이 왜 프리스틀리의 실험에서와 다른 기체인지, 라보아제가 맞닥뜨렸을 모순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도 라보아제의 업적은 위대하다. 때문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장하석 교수가 프리지스톤 이론의 소멸에 아쉬움을 표현했던 일에 동의하기 어렵다.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초기에는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역과정인 환원의 개념이나 산화에 대한 보다 현대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의 혁신적 성취가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 양자역학의 발전사가 이를 증명해 준다. 양자역학의 서막을 올린 '막스 플랑크(Max Planck)'의 유명한 말처럼, 과학의 혁명적 발전은 '장례를 거듭한 후(funeral by funeral)'에 이루어진다.

즉 기존의 패러다임은 그만큼 깨기 어렵다. 이 말이 비단 과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도 결국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볼츠만이 정립한 통계역학이 그의 자살 후에야 빛을 보게 된 것이 극적인 예이다. 1774년에 프리스틀리가 이미 산소를 발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산소와 질소의 천문학적인 수의 '분자'들로 구성돼 있다는 생각은 20세기 초에야 비로소 과학계에서 받아 들여졌다. 산소 분자 하나의 크기가 약 3옹스트롬(0.1나노미터, 즉 1억분의 1미터)이니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이다. 과학의 발전은 많은 장례 후에라는 말이 더욱 실감나게 한다.

라보아제는 특별히 반혁명적 발언을 한 적이 없다. 또한 세금 징수에서 얻은 부를 화학 연구에 투자한 것은 부를 더욱 키우고자 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처형당한 이유는 바로 그 직업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그도 프리스틀리처럼 화학자가 직업이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귀족과 성직자를 제외한 평민에게만 소금과 토지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는데, 오히려 그는 모든 계급에 과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소득을 보다 투명하고 정확히 측정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종교 종사자에게 실질적으로 면세 혜택이 주어지고 국회의원들 일부가 이를 옹호하는 우리 현실에서, 그는 일면 매우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관철하기 위해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고 무슨 특별한 행동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프리스틀리와는 매우 다른 점이다.

 

프랑스 대혁명을 이끈 중심 인물 로베스피에르(1758∼1794). 사진은 평전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표지 일부. 연합뉴스

반면, 혁명공화국의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는 확고하게 정의를 세우기 위해 공포정치를 잠시 필요한 미덕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건 그가 부패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과 관계가 있지 않나 추측한다. 우리 속담에도 있지 않은가?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못 산다." 그래서인지 그 후 두 번의 왕정 복고와 두 번의 제정을 걸치는 동안 프랑스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인류 역사상 왕이 없는 정치 체제를 실현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음을 방증한다. 정치적 혁명은 과학 혁명보다 더 강한 충격으로 일어나는 게 다른 점이다.

우리나라가 대통령 박근혜와 윤석열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폭력에 의존하지 않은 점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나이든 세대가 과거 독재 정치에 저항했던 방법과 매우 다르다. 케이팝 같은 율동을 무기로 하여 저항하는 방법이 그들에게는 진지하지 못하다고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들의 시대가 아니다. 진지하지만 비관하지 않는 젊은이들의 시대이다. 그들로 인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실현하지 못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다른 시각에서는 한강 작가의 표현대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희생을 치렀다. 이제는 그 희생이 더 이상 '장례 없는'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다.

마지막으로, 명백한 내란과 부패 관련된 자들을 제대로 처벌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추후 그 같은 일들이 반복될 수 있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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