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가 살았던 ‘타인의 삶’
감옥에서도 열녀와 직녀, 삼류 시인 연기하는 그 정체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김명신은 김명신으로 사는 게 싫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 ‘돋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대 위의 소품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배우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김명신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얼굴을 바꾸고 학력과 경력을 세탁하여 이쁘게 색칠하고 포장을 다시 하였다. 오직 돋보이고 싶어서. 김명신이 아닌 타인의 삶을 꿈꾼 죄, 그게 죄라면 죄였다.
영화 속 해피엔딩 ‘타인의 삶’, 감옥행으로 끝난 ‘김건희의 삶’
‘타인의 삶’이라는 영화가 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의 동독이 무대이고 사찰기관에 근무하는 비밀경찰이 반체제 인사인 유명한 극작가를 사찰하다 그의 삶에 감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인 비밀경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원하는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서라면 고문도 마다하지 않는 냉혹한 인간인데, 극작가의 집을 도청하며 삶의 내밀한 곳까지 들여다보게 되고 차츰 감화되어 위기에 처한 극작가를 몰래 돕는다. 그 덕분에 덫에 빠질 뻔한 극작가는 목숨을 구하지만, 주인공인 비밀경찰은 극작가를 도운 게 발각되어 하층계급으로 추락한다. 하지만 인간성을 되찾은 그의 얼굴에는 행복함이 묻어난다. 그래서 해피 엔딩이다.
김건희 얘기를 하다 뜬금없이 영화 ‘타인의 삶’을 꺼낸 건, 김건희와 관련한 뉴스를 볼 때마다 영화 제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김건희의 삶과 영화 속 비밀경찰의 삶은 완전 딴판이다. 하지만, 김건희는 김명신이 아닌 타인의 삶을 동경했고 영화 속의 비밀경찰은 타인의 삶에 감화되었다는 점에서 ‘타인’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영화 속의 비밀경찰은 인간의 얼굴을 되찾아 해피 엔딩이지만, 김건희는 성형한 얼굴로 가식의 연기를 하며 김명신 아닌 타인의 삶을 흉내 내다 결국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름도 얼굴도 바꾼 김건희는 셀럽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검사처럼 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던 것 같다. 그러다 검사 윤석열을 만나 결혼을 하여 검사 부인이 되고 검찰총장 부인이 되었다가 대통령 부인이 되는 초고속 신분 상승을 누렸으니 매 순간이 짜릿했을 것이다. 윤석열이 대선후보 시절에 허위 경력이 드러나 위기를 맞긴 했으나 대중의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어색한 연기가 눈에 뻔히 보이는 기자회견에도, 시선 돌리기와 물타기로 여론 조작에 나선 ‘친윤 언론’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유야무야 넘길 수 있었다.
술집 마담, 모델, 오드리 햅번까지, 거침없는 타인으로의 변신
그랬던 김건희에게선 늘 ‘타인’이 겹쳐 보였다. 허위 경력을 사과하던 기자회견에선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막장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겹쳐 보였고, <서울의 소리> 이명수 기자와 통화하던 김건희에게선 남자 손님이 무슨 말을 하든 척척 받아넘기는 능란한 화술의 룸싸롱 마담이 겹쳐 보였고, 최재영 목사에게서 디올백 받던 김건희에게선 허영과 권력에 취한 오만한 사모님이 보였다.
‘영부인’ 김건희의 변신에는 거침이 없었다. 순천만 정원에서 고개를 살짝 뒤로 돌리고 요염하게 찍은 사진에선 스물 갓 넘은 모델이 겹쳐 보였고, 캄보디아에서 아픈 아이를 안고 찍은 사진에선 인기에 존경까지 받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겹쳐 보였고, 영국을 방문하여 왕실 마차를 탄 김건희에게선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가 겹쳐 보였으며, 느닷없이 한강 다리에 나타나 경찰관들에게 현지 지도를 하던 김건희에게선 북녘의 최고 존엄이 겹쳐 보였다. 그 모두가 김건희가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던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던 ‘타인’이었을 것이다.
윤석열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1년이 조금 지난 2023년 9월, <오마이뉴스>에는 ‘고등학생이 손꼽은 윤석열 대통령의 ‘업적’ 네 가지’라는 기사가 실렸다. 대통령 윤석열에겐 잘못한 게 전부이지만, 그래도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업적이 있을 것이니 그걸 한번 찾아보자는 반어법의 기사였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서울대 법대 출신 검사의 수준이 저 모양이라니…
우선, 자타공인 우리나라 최고의 학부인 서울대 법대의 수준이 '저 모양'이란 걸 몸소 보여준 거라며, 서열화한 학벌 의식을 약화시키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니 서울법대 나온 윤석열 대통령의 공이고, '공익의 대표자'라는 검사들이 얄팍한 법 지식을 활용해 사회적 약자와 정적을 괴롭히는 자들이라는 ‘법꾸라지의 민낯’을 보게 되었으니 그 또한 윤석열 대통령의 공이며,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일순간 무너질 수도 있는 허약한 제도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 윤석열 대통령의 최대 치적이라고 했단다. 지금 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인 건, 기성세대가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검찰총장에까지 오른 최고 엘리트라면 더 따져볼 게 없다는 생각으로 윤석열에게 표를 몰아준 결과라는 것이 그 고등학생들의 진단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통찰에선 고등학생들의 예리한 통찰에 박장대소하였으나 민주주의의 취약함과 어른들의 ‘묻지마 투표’를 간파한 세 번째와 네 번째에선 몹시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름 바꾸고 얼굴 바꾼 김건희는 ‘타인의 삶’을 살기만 한 건 아니었다. V0 김건희는 V1 윤석열을 조종하여 법 위에 군림하며 특권과 특혜를 누리는 ‘기득권층 타인’들의 행태를 가감 없이 투명하고 정직하게 드러내어 일반 대중에게 보여주기도 하였는데, 이를테면 이런 거다.
윤석열은 사실상 여론 조작을 통해 국힘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고 기득권 정당에선 여전히 공천을 사고판다는 걸 보여주었다. 정치와 종교가 헌법으로 분리된 나라인데, 윤석열이 당선된 그 대선에선 무속신앙만이 아니라 통일교와 신천지와 대형교회가 선거에 개입했다는 걸 보여주었다. 국가조찬기도회라는 근사한 간판 뒤에선 뇌물을 주고 인사 청탁을 하고 이권에도 개입하고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가 주물렀던 정교유착과 뇌물, 청탁, 이권 개입, 매관매직의 세상
수천만 원짜리 다이아 목걸이, 금거북이만 뇌물인가. 자리만 주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충성 맹세가 있었다면 그 또한 무형의 뇌물이 아니겠는가. 부정부패를 예방하고 공직사회의 청렴을 지키는 것이 설립의 목적인 국민권익위원회가 김건희의 디올백에 면죄부를 발부한 행위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위원장이 임명권자인 윤석열과 서울법대 동기이고 절친이라서 그랬을까? 소수자, 약자에 대한 차별을 막아야 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인권위원회에 차별주의자를 임명한 이유를 또한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방송의 독립을 지키는 것이 첫 번째 임무인 방통위원장에 극우성향의 인물을 임명한 이유를, 독립을 기념해야 할 독립기념관장에 친일 성향의 뉴라이트 인물을 임명한 이유를, 충성 맹세라는 무형의 뇌물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열거하다 보면 숨이 찰 정도인데, 새벽까지 술에 찌들어 있었다는 대통령 윤석열에게선 그 모든 걸 챙겼을 부지런함을 찾아볼 수 없으니 자기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흉내 내던 ‘V0 김건희’를 빼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 죄가 태산 같아서 몇 삽을 퍼서 V1에게 떠넘긴다 하여 한강에서 물 한 컵을 뜬 것만큼이나 줄어든 티가 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김건희에게 과(過)만 있는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공(功)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윤석열 치하의 검찰은 ‘친윤’ 아닌 사람들에겐 무시무시한 저승사자였으나 김건희에겐 꼬리를 살살 흔드는 애완견이었는지라 양심이 있는 검사라면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한다고 해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었으니 그건 순전히 김건희의 공(功)이다. 탐관오리들이 득세하던 가렴주구의 시대에나 있었던 매관매직이 기득권 계층에선 아직도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었느니 그 또한 김건희의 공(功)이다. 공부 잘하고 많이 배워 높은 자리에 오른 자들의 부도덕하고 몰양심에 몰염치한 얼굴을 보게 되었고, 뭐니 뭐니 해도 고등학생들도 간파한 것처럼 민주주의가 취약하다는 걸 알게 해주었으니 그보다 더 큰 공(功)이 있겠는가.
공이 있다면 김건희의 공이 어찌 윤석열만 못하랴
타인의 삶을 감시하다 정의로운 삶에 감화된 영화 속의 비밀경찰은 지위를 잃었지만 인간의 얼굴을 되찾았다. 이름 바꾸고 얼굴 바꾸고 경력을 세탁하여 타인의 삶을 살았던 김건희는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어도 여전히 타인의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죽으면 남편이 살길이 열릴까’ 하며 열녀가 되더니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며 직녀가 되었다가 ‘가장 어두운 밤에 달빛이 밝게 빛나듯이…’ 하며 철 지난 유행가 읊어대는 삼류시인이 되기도 한다.
철창에 갇힌 김건희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둘 일은 아니다만, 고등학생들도 간파했던 것처럼 어른들이 투표를 잘못해서 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이었다는 걸 그 어른들이 깨닫고 각성하게 된다면, 그 또한 ‘타인의 삶’을 흉내내던 김건희 덕분이니 나중에 판사가 판결문을 쓰면서 김건희의 형량을 감해주는 작량감경의 사유로 삼더라도 나는 그 판사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