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더빙의 시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

배우 얼굴·목소리 완벽하게 바꾸는 딥에디터

처음부터 한국어로 제작한 듯 '완벽한' 더빙

자막의 미학 눈은 읽고 귀로 들어 종합 이해

더빙 배우들의 해석과 창의성도 사라질 위기

자막 버전, 청각 장애인들 위한 소통의 다리

편의성에 매몰돼 문화적 다양성 훼손 없어야

2025-09-02     김성수 시민기자

최근 딥에디터라는 인공지능 도구가 등장했다.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바꿔서, 외국 영화가 마치 처음부터 한국어로 찍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기술 찬양론자들은 환호한다. "시간과 돈이 절약된다!" "전 세계 영화가 우리 극장에 더 많이 들어올 것이다!" "언어 장벽이 사라진다!"

그런데 잠깐. 이 말을 뒤집어보면 무슨 뜻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자막 때문에 외국 영화를 안 봤다는 것인가? 프랑스어로 중얼거리는 장뤽 고다르의 주인공이 갑자기 표준 한국말로 "여보세요, 안녕하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과연 같은 영화일까?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을 만화로 각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기술의 발전은 분명 놀랍다. 하지만 모든 기술 혁신이 반드시 문화적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편리함이라는 달콤한 독에 취해 더 중요한 가치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AI 더빙이 바로 그런 기로에 서 있다.

 

스웨덴 영화 'Watch the Skies'가 AI를 이용해 영어로 더빙됐다. (BBC)

자막의 미학, 혹은 불편의 미덕

자막이 불편하다고? 천만에. 자막은 영화 보기의 고급 기술이다. 눈은 아래쪽 글자를 읽고, 귀는 배우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 뇌는 두 정보를 종합해서 이해한다. 이런 복합적 사고 과정이야말로 현대인에게 필요한 멀티태스킹 능력 아닌가. 스마트폰으로 여러 앱을 동시에 사용하면서도 길을 걷는 우리에게, 자막 읽기 정도는 일도 아니어야 한다.

더군다나 자막을 통해서만 맛볼 수 있는 묘미가 있다. 일본 영화에서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말하는 장면에 자막으로 "고마워"라고 뜨면, 우리는 일본어의 정중함과 한국어의 친밀함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이런 언어적 다층성을 AI 더빙이 재현할 수 있을까?

자막은 또한 언어 학습의 훌륭한 도구이기도 하다. 영어 공부를 위해 미국 드라마를 자막과 함께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AI 더빙이 완전히 자막을 대체한다면, 이런 부수적 학습 효과도 사라질 것이다. 결국 우리는 더욱 언어적으로 고립된 섬이 될지도 모른다.

 

DeepEditor는 공연을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BBC)

더빙 배우들의 설자리

AI 더빙이 완벽해진다면, 기존 더빙 배우들은 어떻게 될까? 수십 년간 우리 귀에 익숙한 목소리들, 톰 크루즈 하면 떠오르는 그 목소리, 브래드 피트의 전담 더빙 배우 같은 존재들 말이다. 이들의 숙련된 기예와 감정 표현을 기계가 정말 대체할 수 있을까?

더빙 배우들은 단순히 대사를 번역해서 읽는 것이 아니다. 원 배우의 연기를 이해하고, 그것을 한국 관객에게 맞게 재창조하는 예술가들이다. 때로는 원작보다 더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인간적 해석과 창의성을 AI가 완전히 모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AI 더빙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될까? SORA

문화적 멸균의 위험

AI 더빙이 완벽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순수한 단일 언어 환경에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영화의 열정적인 손짓도, 러시아 영화의 우울한 침묵도, 모두 똑같은 한국어 더빙으로 평준화된다면? 그것은 마치 모든 음식을 햄버거로 만들어 먹는 것과 같다. 영양가는 있을지 몰라도, 맛의 다양성은 사라진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 도구가 아니다. 그 속에는 한 민족의 사고방식, 감정 표현법,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페인어의 정열적인 억양, 독일어의 논리적인 구조, 중국어의 성조 변화 같은 것들은 그 자체로 문화적 정보다. 이런 것들이 모두 표준 한국어로 변환되면, 우리는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각을 잃게 된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접근성 문제다. 더빙 버전만 상영되면, 청각 장애인들은 오히려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어려워진다. 자막은 단순히 언어 번역이 아니라 소통의 다리 역할을 했는데, 이것마저 사라질 위험이 있다. 기술 발전이 일부 집단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이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SORA

기술 만능주의의 함정

"기술이 발전했으니 써야 한다"는 논리는 위험하다. 망치를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속담처럼, AI 더빙이라는 망치를 가진 영화업계에는 모든 외국어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언어의 다양성이 정말 문제일까? 오히려 그 다양성이야말로 인류 문화의 보물창고 아닌가. 프랑스어로 속삭이는 사랑 고백과 러시아어로 외치는 절규 사이에는 번역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뉘앙스가 있다. 이런 미묘한 차이들이 쌓여서 인류 문명의 풍요로움을 만든다.

기술 만능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효율성만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시간과 비용 절약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효율성의 잣대로만 판단한다면, 예술과 문화는 설 자리를 잃는다. 영화는 단순한 오락 상품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다. 예술에는 때로 비효율적이고 불편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완벽한 더빙의 유혹. SORA

언어 제국주의의 새로운 얼굴

AI 더빙 기술이 널리 퍼지면, 결국 경제력이 강한 몇몇 언어만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 영어나 중국어, 한국어 같은 '주요 언어'로만 모든 콘텐츠가 변환되고, 소수 언어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언어 제국주의가 아닐까?

역사적으로 봐도, 기술의 발전은 항상 강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표준어가 확산되면서 지역 방언들이 사라졌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지역색이 희석됐다. AI 더빙도 같은 길을 걸을 가능성이 높다.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물론 AI 더빙의 장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언어 장벽 때문에 좋은 영화를 놓치는 관객들에게는 분명 도움이 된다. 특히 읽기 능력이 떨어지는 어린이나 노인, 시각 장애인들에게는 더빙이 훨씬 접근하기 쉬운 방법이다. 또한 상업적으로도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어 영화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편의성을 위해 문화적 고유성을 포기할 준비가 되었는가? 효율성을 위해 다양성을 희생할 각오가 있는가?

진정한 해답은 선택권에 있을지도 모른다. AI 더빙 버전과 자막 버전을 모두 제공하고, 관객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 더빙의 편리함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그 옵션을, 원어의 생생함을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는 자막 옵션을 주는 것 말이다. 문제는 상업적 논리에 의해 더빙 버전만 남고 자막 버전이 사라질 위험성이다.

 

SORA

교육의 관점에서

AI 더빙이 보편화되면 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외국어 학습 동기가 줄어들 수 있고, 다문화 이해 능력도 떨어질 수 있다. 어린이들이 다양한 언어와 문화에 자연스럽게 노출될 기회가 줄어든다면, 그들의 세계관은 더욱 협소해질 것이다.

반면 AI 더빙 기술 자체를 교육 도구로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 언어 학습자들이 자신의 발음을 원어민 수준으로 교정하거나, 다양한 억양으로 연습할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다.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핵심이다.

결국 우리의 선택

기술은 도구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도구를 어떻게 쓰느냐다. AI 더빙이 문화적 다양성을 해치는 도구가 될지, 아니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다리가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정책 입안자들은 문화적 다양성 보호를 위한 제도를 마련해야 하고, 영화 배급업체들은 단순한 이윤 추구를 넘어 문화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관객들도 편의성에만 매몰되지 말고,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봉준호 감독이 "자막의 1인치 장벽을 넘으면 더 많은 좋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 1인치는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관문이었다. 그 관문을 너무 쉽게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편리함을 얻는 대신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똑같아 보이는 편안한 세상을 원하는가, 아니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다채로운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세상을 원하는가? AI 더빙 기술 앞에 선 우리에게 던져진 이 질문의 답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문화적 풍경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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