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에서 철학으로, 한 공학도의 기막힌 인생 급커브
새벽 전화가 전한 '한국의 간디' 함석헌의 죽음
'골통보수 예수쟁이' 청년의 새 눈을 뜨게하다
철밥통 직장 사직 후 영국 건너가 학문의 길로
인생은 정해진 궤도로만 계속 달리는 게 아냐
그날 새벽, 인생이 멈춰 섰다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40분. 잠결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만큼 불길한 게 또 있을까. 박 선생이 함석헌 선생 별세 소식을 전해왔다. 어느 틈에 나는 어둠을 가르고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내달리고 있었는데, 머릿속은 이 소식 때문에 완전히 혼선이 빚어졌다.
이 순간이 내게 무슨 의미였는지 알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절 우리나라 이야기로.
군사정권 시대의 '강요된 선택'
1961년부터 1987년까지 우리나라는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의 철권통치를 받았다. 그들은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사람들 머리를 깨우고, 깨어난 머리는 자신들에게 골치 아프다는 것을. 그래서 이런 '위험한' 학문들은 싹둑 잘라버리고, 젊은이들에게 분명히 못 박았다. "장학금 받고 싶으면 공학이나 기술을 공부해라!"
나는 그렇게 열정이 아닌 현실에 떠밀려 학비가 무료인 국립 철도대에 들어갔다. 평소에 관심 있었던 역사는? 그야 '사치스러운 취미' 정도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기술명세서와 철도시간표 사이사이, 퇴근 후 몰래 훔친 시간에나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집안 구석에 놓아둔 역사책이었다.
"아,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철로 위를 매일 기차를 몰고 달리면서도 정작 내 인생의 방향은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
스승과의 운명적 만남
그런 답답한 시절에 1979년 겨울 함석헌을 만났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강력한 전기처럼 내 몸을 위에서 아래로 관통했다. 나는 감전된 사람처럼 주체할 수는 충격을 받았다. '한국의 간디'로 불리던 함석헌은 장로교에서 퀘이커교로 개종한 뒤 평생을 비폭력 저항과 민주주의, 인권, 평화를 위해 바쳤다.
함석헌을 만나기 전 나는 보수적인 장로교회에서 철야기도를 잠자듯 하고, 금식기도를 밥 먹듯이 하며,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는 전혀 무관심하던 '골통보수 예수쟁이' 청년이었다. 그런 내게 함석헌의 살아있는 말과 글은 내 뜨거운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처럼 박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을 번쩍 열어줬다. 퀘이커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는 법,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영적 통찰을 이어주는 다리 같은 것들을 말이다.
적어도 내게 함석헌은 단순한 지적 영향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끊임없는 영감의 샘물 같은 분이었다. 신앙과 학문을 하나로 엮어낸 분, 신념 때문에 감옥에서 고생하면서도 진리와 화해에 대한 믿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은 구도자이자 행동가가 바로 내가 보는 함석헌이었다. 그런 함석헌을 통해 나는 내 삶에서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잠재적 가능성들을 보기 시작했다.
모든 게 바뀐 그 순간
그 1989년 2월 새벽, 서울대학교 병원 영안실에 도착했을 때,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관 속에 누워 계신 함석헌의 모습을 바라보니, 마치 나의 한 부분이 그 관에 누워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병실에 서서 나는 3시간 동안 생각의 미로에서 헤맸다. 함석헌의 삶, 죽음, 그리고 내 존재에 대해서. 마침내 그 생각의 미로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았다.
곧바로 철도청으로 가서 8년을 다닌 직장에 사직서를 냈다. 직장 동료들은 아마 내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안정적인 철밥통을 차버리고… 나이 29살에 대체 뭘 하려고? 그때는 명확하게 언어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함석헌의 죽음이 나 자신의 존재이유와 소명에 대해 근본적인 걸 깨우쳐 준 건 확실했다. 그날 함석헌과 함께 죽은 내 안의 부분은 진리 또는 역사를 그저 '취미' 수준에서만 추구하는 것에 만족했던 나였다.
사직서를 낸 순간, 내 인생 철도는 완전히 다른 궤도로 바뀌었다. 말 그대로 '인생 급커브'였달까.
영국 우드브룩에서 찾은 새로운 빛
이듬해 1990년 4월, 나는 영국 버밍엄의 우드브룩 퀘이커 연구소에 있었다. 철도 공무원 경력을 단칼에 버리는 게 미지로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드브룩 도착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서 꿈에 그리던 고향집을 찾은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거기서 받은 교육은 내가 1970~80년대 한국에서 경험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크리스 로슨은 과학을 가르쳤지만, 아내 크리스티나와 함께 퀘이커 순례여행도 이끌어줬다. 지적 호기심과 영적 추구가 손잡고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걸 그들 부부는 내게 보여줬다. 토니 브라운은 히브리 성경을 열어줬고, 데이비드 그레이는 영문학을 소개해줬다. 존 펀숀은 퀘이커교의 풍부한 역사를 안내해줬고, 스튜어트 모튼은 평화학을 함께 탐구했으며, 팸 런은 여성학을 가르쳐줬다.
각 선생님은 단순한 학문적 지도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내게 줬다. 온전한 인간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 모범을 보이며, 지적 엄밀함과 영적 깊이를 모두 존중하는 방식으로 신앙과 학습을 하나로 엮어냈다.
"아, 이런 게 진짜 교육이구나. 머리만 채우는 게 아니라 영혼도 함께 기르는."
역사학도의 길로
우드브룩에서 나는 영국 에섹스대학교와 셰필드대학교로 이어갔다. 한국의 군사정권 체제 하에서는 어려웠던 역사학을 마음껏 추구했다. 내 초점은 한결같았다. 함석헌이 남긴 유산을 이해하고 학문적으로 나누는 일이다.
우드브룩 도서관 사서인 크리스티나 로슨은 내 연구에 귀중한 도움을 줬다. 영국 퀘이커들은 이 여정 내내 나를 든든히 지지해 줬고, 학문이 섬김의 한 형태가 될 수 있고, 학문적 작업이 빛을 섬길 수 있다는 걸 이해해 줬다.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모두 함석헌과 그의 역사관에 초점을 맞췄다. 학위를 마치고 그분의 삶과 사상에 대한 책 세 권을 썼다. '사치스러운 취미'로 시작된 '역사학'이 내 평생의 작업이 됐다. 그것은 단순한 학문적 추구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무엇이 가능한지 보여준 스승을 내 나름대로 기리는 작은 몸부림이었다.
지속되는 영감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왜 그렇게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불확실한 역사학도의 길을 택했느냐고. 답은 간단하다.
내가 함석헌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분은 나의 삶 순간 순간마다 끊임없이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이었고, '지상에서 영원으로'도 그럴 것이라 감히 확신하기 때문이다.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40분의 그 전화는 단순히 한 인간의 죽음 소식만 전한 게 아니었다. 내 삶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깨우쳐 줬다. 그 병실에 서서 나는 깨달았다. 어떤 스승들은 떠난 후에도 계속 가르치고, 어떤 영향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결국 인생이란 철도와 비슷하다. 정해진 궤도를 달리는 것 같지만, 때로는 과감하게 방향을 바꿔야 할 때가 온다. 중요한 건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가느냐인 것 같다."
오늘을 위한 교훈
공학도에서 역사학도로 영원한 영감과 감동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의 여정이 주는 교훈들은 이렇지 않을까.
첫째,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필요가 우리 젊은 날 선택을 좌우할 수는 있지만, 결국 정신적 또는 영적 욕구와 소명을 억누를 수는 없다. 빛은 가장 제한적인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뚫고 나갈 길을 찾는다.
둘째, 함석헌 같은 진정한 스승들은 단순히 정보만 전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꾼다. 그들의 영향은 육신이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계속되어 우리를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끈다.
셋째, 최고의 공부는 단순한 암기나 성적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역사의 증인, 사회의 참여자를 만든다. 우드브룩의 선생들은 내게 지식만 나눈 게 아니라, 한 청년의 정신과 사상이 학문적 훈련을 통해 작용할 공간을 만들어줬고, 학문이 진리와 정의를 주인으로 섬길 수 있는 길을 보여줬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결정들이 때로는 뜻밖의 슬픔과 성찰의 순간에 온다. 그 1989년 2월 새벽, 함석헌의 죽음 앞에서 나는 벅차오르는 슬픔 가운데 내 삶의 목적을 뚜렷하게 발견했다.
내가 한때 일했던 철도는 승객과 화물을 목적지로 실어 날랐다. 함석헌이 보여준 길은 또 다른 것을 실어 나른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 대가를 불문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용기, 그리고 우리가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거름이 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말이다.
인생은 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급커브를 돈다. 중요한 건 그 커브를 얼마나 우아하게 돌아서 어디로 향하느냐다. 나는 10대 후반 함석헌이라는 훌륭한 길잡이를 만났고, 그 덕에 철도에서 철학까지, 기막힌 인생 여행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