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하지만 새롭고, 속물스럽지만 사랑스러운
[영화평] 한국계 셀린 송의 멜로 ‘머티리얼리스트’
엉뚱한 얘기 같지만, 셀린 송이 멜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조성진이 쇼팽 곡을 연주하거나 임윤찬이 라흐마니노프 콘서트를 여는 것과 같은 얘기이다. 고전음악은 그 음악가가 살고, 죽은 이후 계속 그대로 존재해 왔다. 똑같은 음악이다. 그러나 이후에 누가 그걸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다른 음악이 된다. 어디에서 끊어 가고 어디에서 길게 이어가며 또 어디를 강조하고 어디를 건너뛰느냐에 따라 그걸 듣는 사람들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넘어 이 두 젊은 연주자들의 천재성에 박수갈채를 보내게 된다.
멜로도 마찬가지이다. 멜로, 러브스토리는 늘 그 자리에 존재해 왔다. 에릭 시걸의 ‘러브스토리’도, 줄스 다신의 ‘페드라’도, 그리스의 비극 에우리피데스의 사랑 이야기도 원래부터 다 있던 얘기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감독이 계속해서 멜로 영화를 만들고, 끊임없이 러브스토리의 원안을 건드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클래식의 연주자들처럼 자기만의 것, 자기식의 해석이 담긴 얘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거나,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셀린 송이 ‘머티리얼리스트(원제는 머티리얼리스트의 복수형 ‘머티리얼리스츠’)를 만든 건 사랑이라는 본질, 본체를 지금 21세기에 맞게 재해석하겠다는 목표와 목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두 남자 사이 오가는 속물 커플메니저가 그리는 사랑의 궤적
유물론자, 혹은 물질주의자란 뜻의 ‘머티리얼리스트’도 외형상으로는 여타의 진부한 멜로 영화와 진배없어 보인다. 그렇고 그런 얘기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런 얘기인 것이 맞다. 여주인공 루시(다코다 존슨)는 커플(매칭)매니저이고, 이 여성이 두 남자 사이를 오가며 마음의 갈등을 일으킨다는 얘기가 주된 줄거리이다. 매칭매니저인 만큼 그녀는 자신의 빨간 노트에 ‘머티리얼한’(물질적인, 현실적인, 속물에 가까운) 리스트를 잔뜩 적어서 지니고 있다. 남자는 백인일 것, 대머리가 아닐 것, 키는 180㎝ 이상일 것, 나이는 40대를 넘으면 안 될 것, 연봉은 7억 이상이어야 할 것, 직업은 의사나 뱅커여야 할 것 등등 여성들이 선호하는 조건의 남자들 명단이 있다.
반대로는 당연히 몸매가 좋아야 할 것, 무조건 27살을 넘으면 안 될 것, 나이가 있더라도 40이 넘으면 안 되고 그럴 경우,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등등 남자들이 흔히 원하는 조건을 만족하는 여성들 이름을 가지고 있다. 루시의 직업은 자칫 지나치게 속물적이고 천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극 중간에는 실제로 자신의 고객인 여성 소피(조이 윈터스)에게 자신은 상품이 아닌 사람이라는 항변을 듣게 된다. 그 같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와중에 루시 역시 두 명의 남자를 만나면서 일생일대의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트라이베카에 사는 멋쟁이 부자 남자와 가난한 연극배우
루시는 커플매니저 업계에서 일명 ‘유니콘’이라 불리는(전설에서나 나오는 존재인 만큼 현실에서는 희귀한) ‘최고가 상품’을 만난다. 남자 해리(페드로 파스칼)는 185㎝의 훤칠한 키에 200만 달러에 달하는 트라이베카(뉴욕 맨해튼 동쪽의 부자 동네로 금융, 패션, 미술 갤러리들이 모여 있다. 유명 스타 로버트 드 니로가 트라이베카 영화제를 하는 곳이다)의 펜트하우스에 살며, 젠틀하고 유식한, 명문 학교를 나온 인물이다.
그렇다면 루시는 당연히 그에게 전폭적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엔 경계하고 망설인다. 루시는 해리가 처음으로 자신을 집에 데리고 들어가 몸을 더듬고 키스할 때도 연신, 고급스러운 집안 내부를 흘깃거린다. 루시는 해리가 자신과 신분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하룻밤을 지내고 거실로 나온 루시에게 (이럴 때 꼭 여자는 남자의 와이셔츠를 입고 나온다) 남자 해리가 건네는 것은 바로 그 펜트하우스의 집 열쇠이다. 어떤 여자가 이런 머티리얼리스트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자의 선택은 당연히 해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루시에게는 5년 전에 열렬히 사랑하다 헤어진 가난한 남자가 있다. 연극배우이다. 전 남친 존(크리스 에반스)과 루시는 둘 다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동시에 엉망진창인 집안에서 자랐고, 그럼에도 둘 다 버니 샌더스를 지지할 만큼 비교적 뚜렷한 정치관을 지닌 젊은이들이다. 그런데 늘 그놈의 돈이 발목을 잡았다. 둘은 20달러가 드는 주차장에 차를 넣느냐 마느냐 문제로 뉴욕 한복판에서 대판 싸우고 헤어졌다. 해리는 그런 사람들을 종종 봤다며 자신은 사람들이 어떻게 길거리에서 싸울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한다. 해리는 화목한 대가족 출신이고 버니 샌더스는 아예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결혼 피로연에 수십 만 달러를 선뜻 쓸 수 있는, 보수적이고 공화당 지지자일 듯이 보이는 인물이다. 해리는 돈이 많아도 너무 많지만 이런 사람 특유의 매력, 곧 교양과 겸손함까지 지녀서 나무랄 데가 없는 남자이다. 그러나 결국 루시는 해리의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하게 된다.
멜로 영화 기본 콘셉트인 ‘차이’ 넘어선 ‘대조’와 ‘대비’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해리 편, 2부는 존과의 스토리, 이런 식이다. 형식적으로도 그렇고 내용상으로도 ‘머티리얼리스트’는 여타의 멜로 영화와는 다른 지점을 향해 나아가려 애쓴다. 모든 멜로 영화의 기본 콘셉트는 ‘차이’이다. 남자는 돈이 많고 여자는 돈이 없거나 여자는 나이가 아주 많고 남자는 아주 어린 경우가 있다. 남자는 흑인이고 여자는 백인이거나 혹은 그 반대일 경우도 있고 남자는 노동자, 여자는 화이트칼라 지성인 식으로 차이를 처음에 확 벌리는 게 모든 상업 멜로 영화, 할리우드 멜로 영화의 기본 콘셉트이다. 그리고 극이 후반으로 갈수록 그 차이를 좁혀 나가게 하고 결국은 한 몸으로 만든다. 그래서 해피 엔딩이다. 리처드 기어,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귀여운 여인’이 전형적인 할리우드 멜로 영화이다. 산드라 블록 주연의 숱한 영화들, ‘당신이 잠든 사이에’ ‘투 윅스 노티스’ 등을 생각하면 된다.
셀린 송의 ‘머티리얼리스트’는 기본 콘셉트인 ‘차이’ 그 자체보다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는 ’대조’와 ‘대비’에 더 주안점을 둔다. 그걸 구체적인(머티리얼한) 모습으로 묘사해낸다. 일단 해리와 존을 대비시킨다. 그 둘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대비시킨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금융 뱅커와 연극배우가 지닌 일상 정서 감성을 대비시킨다. 남자 둘이 나올 때의 조명도 대조적이다. 트라이베카의 펜트하우스는 어둡고 은근하며 그래서 인공적이다. 존이 사는 850달러짜리 월세 집(약 120만 원. 뉴욕에서?) 풍경은 자연광이다. 월세 집은 모든 것이 다 삐걱댄다. 그나마 친구 둘과 나눠 쓰는 중이다. 아수라장이다.
해 뜨는 아침의 깊은 키스가 의미하는 사랑의 ‘실존적 실천’
셀린 송의 러브스토리는 그래서, 대조법이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과 클로징 장면도 대조와 대구(對句)이다. 이 영화는 결국 대조를 통해 대구를 만드는 식이다. 여자는 대조적인 남자 둘을 오가지만 그녀의 마음속 사랑은 비슷해진다. 대구를 이루게 된다. 극 후반, 루시가 고객인 소피의 집에 들어가 밤새 상담(위로)하고 바깥으로 나올 때의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공 들여 잘 찍은 장면이다. 남자 존은 계단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카메라를 살짝 틸 업(TIL UP)해서 문을 열고 나오는 루시와 함께 둘을 투 쇼트(TWO SHOT)로 잡는다. 둘의 대화는 리버스 쇼트(REVERSE SHOT)를 거의 쓰지 않고 프로필 투 쇼트(옆 모습 투 쇼트)로 이어 나가게 한 뒤 둘이 키스하는 장면은 소피의 집 전체가 나올 정도의 풀 쇼트로 카메라를 뒤로 뺀다. 조명은 해가 막 뜬 뒤라는 설정이라 은근하고 따뜻하다. 이제 인공조명 기법은 해리에서 존으로 넘어온 셈이다. 이 영화가 대조에서 대구로 넘어왔음을 보여 준다. 셀린 송의 이번 멜로 영화가 지닌 결론 역시 결국 사랑은 대조와 대구를 넘나들다 스스로가 선택해 내야 하는 ‘실존적 실천’의 문제임을 드러낸다. 이 영화가 아주 진부하지만 새로운 데가 있으며, 꽤 새로운데 결국 진부한 드라마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셀린 송(송하영)은 아버지가 유명감독 송능한(‘넘버3’)이고 큰아버지가 더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짝코’ ‘만다라’ ‘길소뜸’ 등 임권택 감독 영화 대다수)인 만큼 (꼭 그래서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녀의 영화적 정체성은 (어릴 때부터 다져 왔다는 듯이) 비교적 노선이 확실해 보인다. 전작인 ‘패스트 라이브즈’로 인상적인 데뷔를 한 셀린 송은 이번 영화로 자신이 확실하게 상업영화’용’ 감독이라는 시그널을 할리우드 메이저들에게 보낸 셈이다. 이번 작품은 소니 픽처스 영화로 2000만 달러(약 280억)짜리이다. 중국계 여성 감독 클로이 자오는 ‘노매드 랜드’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2억 달러짜리 마블 영화(마동석이 안젤리나 졸리와 나왔다)를 만들었으나 참패한 적이 있다.
영리하고 똑똑한 한국계 여성 감독의 할리우드 메이저급 작품
셀린 송은 적어도 그런 경로를 걷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리하고 똑똑해 보인다. 이번 영화도 영리한 러브스토리이다. 셀린 송은 할리우드의 또 다른 여성 감독 소피아 코폴라(그 유명한 ‘대부’의 코폴라 감독 딸)처럼 상업영화와 작가주의 영화를 분주하게 오고 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번 영화는 물론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그냥 웰메이드 상업영화이다. 무엇보다 꽤 사랑스러운 영화이다. 셀린 송은 드디어 할리우드 메이저로 진입한 셈이 됐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녀의 영리함을 두고 꼭 아버지를 닮아서라고 얘기할 필요는 없겠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는 지난 8일 전국 개봉했다. 흥행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대접할 영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