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만큼이나 고질적인 임금체불
올 추석에도 ‘체불 사업주 강력 처벌’만 반복할 것인가
"업체에서 부르더니 근로계약서가 바뀌었으니까 사인하라는 거예요. 내용을 보니까 퇴직금이 월급에 포함되어 있고 퇴직할 때 퇴직금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럼 앞으로 퇴직금만큼 월급이 오르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거는 또 아니래요. 이게 무슨 소리냐, 항의하고서 사인을 안했죠. 그래서 짤렸어요.”
퇴직금 지급 안 하려 불법 자행하는 사업자들
작년 가을 재중동포 노동자를 인터뷰하면서 들은 얘기이다. 위 노동자는 40대 후반의 여성 노동자로서 반월공단의 PCB업체에서 소사장 업체 소속으로 검사 파트에서 일했던 노동자다. 다행히(?) 남편(한국인)이 이전에 노동조합 간부로 활동한 경험이 있어 남편에게 불법임을 확인하고서 변경된 근로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의 동료들에게도 사인하지 말라고 얘기해 미지급한 퇴직금을 착복하려던 소사장 업체의 의도는 결국 무산됐다. 그리고 위 여성 노동자는 원청이 근태불량으로 교체를 원한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1주일 뒤 3년 동안 일하던 PCB 업체 일을 그만둬야 했다. 사실상 소사장 업체에서 해고된 것이다.
퇴직금을 월할로 임금에 포함한다고 사용자가 얘기하는 것은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상 불법이다. 다만 1년치 퇴직금만큼의 금액을 월할해서 매월 지급하는 임금에 추가한다는 명시적인 계약을 사업자와 맺는 경우는 허용된다. 그렇지 않고서 평상시 지급되는 임금에 퇴직금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서명을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퇴직금도 엄연히 임금이기 때문이며 임금 미수령을 강요한 것이기에 불법이다.
산재 사망률 감소 위한 대통령의 정책적 의지 반갑기는 하지만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노동정책 중 산재 감소 강조가 주목받고 있다. 필자가 있는 시화공단에 소재한 SPC 사업장을 직접 방문해 허영인 SPC회장을 면전에 두고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를 질타했고 국무회의에서 산재 감소 방안을 주제로 1시간 넘게 공개 토론을 벌였다. 포스코E&C, DL 등 대표적인 산재 다발 업종인 건설업 내 대형사업체에서 산재 사망사고가 잇따르자 공공부문 입찰 금지에서부터 건설업 면허 취소라는 강경 대응안까지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또 산재 감소에 김영훈 노동부 장관의 직(職)을 걸라는 발언에 더해 급기야는 여름 휴가에서 복귀하자마자 산재 사망사고는 대통령실에 직보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노동자 산재 사망사고가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하는 국가 안보 분야 사안과 동급이 된 셈이다.
필자도 산재 감소를 위한 이재명 대통령의 강조가 매우 반갑다. 일하러 갔다가 퇴근하지 못하고 장례식장에서 영정으로 조우하게 되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설득이나 논리의 영역이 아닌,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이다. 자살률, 노인빈곤율과 함께 OECD 국가 중 상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산재 사망률을 감소시키기 위한 대통령의 공개적이면서 명시적인 정책적 의지가 처음이기에 생경하지만 반가울 따름이다.
그나마 산재 사망은 감소 추이, 임금체불은 그대로
여전히 OECD 국가 중 상위권이긴 하지만 길게 보면 한국의 산재사고는 감소 추이를 보여왔다. 특히 대통령이 주목하고 있는 사고성 사망만인율(fatal rate) 추이는 2010년 0.78‱에서 2023년 0.39‱로 꾸준히 하락했다.
한국 노동사회 문제 중 유독 하락하거나 감소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 바로 임금체불이다. 일터에서 산재를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일을 하면 사용자가 임금을 주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노동자와 가족의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것이 지켜지지 않는 규모와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 노동사회의 고질적이며 구조적이라는 얘기이다.
위 통계표를 보면 2024년 28만 3000명이 임금 체불을 경험했고 그 금액은 2조 원이 넘는다. 2020년에서 2022년까지는 코로나19로 인해 감소했을 뿐이며 2015년부터 전반적인 추이를 보면 늘어나는 추세이다. 특히 윤석열 정부 시기 급증한 것이 눈에 띈다. 위 통계는 임금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지역 노동청 진정사건에서 최종 확정된 체불액만 추계한 것이기에 실제로는 더 많다. 당사자 간 화해나 근로감독관 지도해결을 통해 지급받은 임금체불액과 ‘실제 체불액’ 간 차이는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체불액이 100만 원인데 근로감독관의 중재를 통해 70만 원만 받고 노동자가 임금체불 진정을 취하하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차액인 30만 원을 손해 보는 것이지만 이 금액은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다. 전국 지방 노동청에 접수된 임금체불 진정 건의 절반가량은 이처럼 해결된다. 왜 30만 원을 손해 보면서까지 임금체불 진정 건에 노동자가 화해를 할까? 생계 때문이다. 각종 공과금과 월세, 자녀 학원비를 내야 하는 노동자 입장에서는 사용자 버티기로 언제 받을지 모르는 100만 원보다는 눈앞의 70만 원이 더 중요하다. 무엇보다 프리랜서 노동자 등 특수고용 노동자는 위 통계에 제외되어 있기에 이들까지 포함하면 당연히 그 규모는 더 크다.
이웃 일본의 17배에 이르는 임금체불 현황
한국 임금체불 문제의 심각성은 이웃한 일본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이종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의 2021년 조사·연구 결과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한국의 임금 체불액은 1조 6472억 원인데 비해 일본은 한화로 약 1000억 원에 불과했다. 임금체불 피해를 입은 노동자 수도 한국은 35만 명이 넘지만 일본은 3만 7000여 명이었다. GDP 기준 한국과 일본의 경제 규모 차이는 두 배가 넘는다. 임금노동자 규모도 한국은 2200만 명, 일본은 6000만 명으로 세 배 가까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체불 규모와 금액은 한국이 현저히 크다.
2024년 기준 임금체불액 기준 71.3%가 3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했다. 경기변동에 민감한 서비스업과 제조업의 최하위 하청 사업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임금체불에 따른 피해는 노동시장 내 최하위 주변부·취약 노동자에게 집중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임금체불의 원인으로 경기 악화를 꼽는다. 과연 그럴까? 위 그림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코로나19로 성장률이 –1%였던 2020년에는 오히려 임금체불 규모와 금액이 감소했다. 경기변동이 임금체불 문제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글로벌 경제체제 하에서 동일한 경기 변동을 경험하고 다단계 하청이라는 비슷한 경제구조를 지닌 일본의 임금 체불액 규모가 한국의 1/17에 불과하다는 점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소규모 사업주의 노무관리 인식 부족이 원인이겠지만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음으로 양으로 임금을 체불해 착복하려는 사업주의 악의적인 노무관리도 하나의 원인이다. 문제는 이에 대응하는 한국의 근로감독 체계이다.
입으로만 반복된 역대 정부 임금체불 근절 의지
임금체불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이미 문재인 정부 시기 임금체불 대책안 발표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문재인 정부는 국정과제에서 체불근로자 생계보호 강화와 체불사업주 제재 강화를 약속하였고, 고용노동부는 상습 체불사업주에 대한 민·형사적 제재 강화 대책, 특히 반의사불벌조항의 폐지 또는 개정안 마련 등을 대책으로 제시했지만 임기 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 때인 2024년 8월에도 고용노동부는 ‘임금체불은 심각한 민생범죄’라며 「임금체불 집중청산 운영계획」을 마련했다고 홍보했지만 역대 최대 규모의 임금체불을 막지는 못했다.
고용관계에 있는 노동자에게 임금은 노동시간과 함께 핵심 노동조건 중 하나이다. 고용관계란 일정 시간 동안 사용자의 노동력 처분권을 임금과 맞교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노동자에게는 핵심적인 문제이기에 임금체불, 특히 악의적인 임금체불 문제에 대해서는 고용노동부의 선제적인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 한국의 근로감독 제도는 기본적으로 사후 대응에만 치중해 있을 뿐 사전 홍보·계도와 같은 행정 집행을 통한 노무관리 관행 수립에는 전혀 역할하지 못하고 있다. 위 그림에서 제시한 임금체불액 통계도 전국의 노동청에 접수된 진정 사건을 통해 수집한 행정 통계일 뿐이다.
근로감독관 숫자가 아니라 얼마나 현장에 밀착됐는가가 관건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고용노동부는 근로감독관이 부족하다고 얘기한다. ILO는 노동자 1만 명당 근로감독관 1명 이상을 권고하고 있다. 이미 3000여 명에 이르는 근로감독관 수는 노동자 2200만 명과 비교하면 ILO 권고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약에서 경기도지사 시절 숙원 사업이었던 지자체에 근로감독 권한을 부여하는 정책을 추진할 계획임을 밝혔다. 임금체불 문제가 사업장 현장을 들여다볼 인력이 부족해서일까? 임금체불 문제를 다룰 인력이 부족하다면 ‘명예산업안전감독관’처럼 양대 노총이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명예근로감독관제를 도입하면 될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박종식 연구위원은 한국에서 산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구조적 이유로 물량 위주의 산재 사업 전개, 즉 산업안전보건공단의 무차별적이면서 저인망식 산재 사업 집행이 문제임을 밝힌 바 있다. 한 마디로 한국 산재 문제에서 무엇이 구조적인 문제이며 이를 해결할 체계를 갖추지 않은 채 눈에 보이는 지표로만 산재를 줄이기 위해 인력과 예산을 무차별적으로 투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구조적이면서 체계적인 산재 감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임금체불 문제, 특히 이 글의 서두에서 서술한 악의적인 임금체불 문제도 마찬가지다. 근로감독관 증원에 앞서서 한국 노동사회에서 임금체불 문제의 구조적 원인과 이에 대응하는 고용노동부의 정책·관리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 핵심은 노동조합과의 연계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이다. 임금체불 문제든, 산재 문제든 작업장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주체는 노동조합이기 때문이다.
타워크레인에 오르는 배고픈 노동자
‘임금체불 제로 시대’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 5개월 동안에 이미 임금체불 금액은 9400억 원을 넘어섰다. 이 추세대로라면 2025년 임금체불액은 작년에 이어서 다시금 기록을 갱신할 것이다. 매년 설, 추석 때만 되면 체불임금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체불 사업주 강력 처벌 등의 대책이 나오지만 철 지난 녹음테이프처럼 영혼 없는 목소리만 반복하기보다는 구조적이면서 체계적인 방안을 고용노동부가 마련하기를 바란다. 언제까지 명절 때마다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건설노동자가 타워크레인에 올라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