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고드윈 앞에서 함부로 '작은 정부' 말하지 말라
정부, 법, 사유재산, 결혼까지 부정한 아나키스트
이성적으로 깨달아 정부 해산하리라 순진한 생각
보수층은 저항했지만 젊은 지식인들 열렬한 지지
가족관계는 이념대로 이루지 못해 비극으로 점철
현대 정치의 '규제완화' '민영화'에도 그의 그림자
실패한 혁명가 평가 불구, 인류 역사에 족적 남겨
요즘 정치인들이 '작은 정부'를 외칠 때마다 웃음이 난다. 진짜 작은 정부가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궁금하다. 200년도 더 전에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 1756~1836)이라는 영국 선비가 있었는데, 이 양반은 아예 정부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극도로 작은 정부, 아니 정부 제로를 꿈꾼 정치철학자다.
무정부주의의 아버지, 혹은 이상주의의 화신
1756년에 태어난 고드윈은 처음엔 목사가 되려 했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철학자가 되어 1793년 <정치적 정의에 관한 탐구>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정부, 법, 사유재산, 심지어 결혼제도까지도 모조리 인간발전에 걸림돌이라고 선언했다.
요즘으로 치면 "모든 것을 해체하라!"고 외친 셈인데, 다만 폭력은 반대했다. 그는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깨달아 스스로 정부를 해산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순진무구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인들이 자진해서 권력을 포기할 거라고 믿다니!
혁명의 시대, 보수의 악몽
18세기 말은 영국에 프랑스 대혁명의 충격파가 밀려드는 시기였다. 귀족들은 "저 건너편에서 단두대가 돌아간다는데, 혹시 우리도?" 하며 벌벌 떨고 있었다. 바로 이때 고드윈이 "사실 정부 자체가 문제야" 하며 나섰다.
당시 영국 지배층에게 고드윈의 책은 그야말로 공포 소설이었다. 다행히(?) 책값이 비싸서 일반 백성들은 쉽게 살 수 없었다. 총리 윌리엄 피트(1759~1806)가 "저 책이 3기니(guinea)나 하니까 괜찮다. 가난한 놈들은 못 사겠지"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가격이 천연 검열관 역할을 한 셈이다.
보수 언론들은 고드윈을 '사회파괴범'이라고 매도했다. 에드먼드 버크(1729~1797) 같은 보수주의자들은 "저런 위험한 사상이 퍼지면 문명이 무너진다"며 펄펄 뛰었다. 하지만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마치 요즘 젊은이들이 기성 정치에 실망해서 급진적 변화를 꿈꾸는 것과 비슷했다.
사랑과 혁명 사이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의 만남
고드윈의 개인사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다. 1790년대 중반, 그는 여성주의의 선구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를 만났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를 쓴 급진적 사상가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고드윈은 결혼제도를 '소유욕의 산물'이라고 비판했고, 울스턴크래프트도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만드는 제도'라고 공격했다. 그래서 둘은 법적 결혼 대신 동거를 시작했다. 당시 사회에서는 스캔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우리는 사랑으로 맺어진 자유로운 관계"라고 당당했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녹록지 않았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임신하자, 아이의 미래를 걱정한 두 사람은 결국 1797년 혼인신고를 했다. 당시 사람들은 "혁명가도 현실 앞에선 무릎을 꿇는구나" 하고 비웃었지만, 사실 이는 자녀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의 표현이었다.
비극은 출산 직후 찾아왔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산욕열로 세상을 떠났다. 고드윈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는 아내의 전기를 써서 그녀의 삶과 사상을 기렸지만, 너무 솔직하게 썼다가 오히려 울스턴크래프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녀의 과거 연애사까지 적나라하게 공개했기 때문이다.
천재 작가의 아버지가 된 철학자
울스턴크래프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메리 고드윈, 훗날 메리 셸리다. 아버지의 급진 사상과 어머니의 여성주의 정신을 물려받은 메리는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다.
고드윈은 딸을 키우면서도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천했다. 그는 전통적인 주입식 교육을 거부하고, 아이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했다. 메리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으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볼테르, 루소, 바이런의 작품들을 접했으니, 평범한 소녀가 될 리 없었다. 그런 메리가 16세 되던 해, 집안에 폭풍이 몰아쳤다. 바로 퍼시 비 셸리의 등장이다.
사위로 온 또 다른 혁명가, 퍼시 셸리
퍼시 B. 셸리(1792~1822)는 고드윈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무신론 소책자를 써서 퇴학당한 젊은 귀족이었다. 그는 고드윈의 책을 읽고 감동해서 찾아왔는데, 문제는 그가 이미 결혼한 몸이라는 점이었다. 셸리는 고드윈의 자유연애 사상을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진정한 사랑 앞에서 결혼 따위는 형식에 불과하다"며 메리에게 구애했다. 16세의 메리는 이 잘생기고 재능 있는 시인에게 푹 빠졌다.
고드윈은 당황했다. 자신이 이론으로 주장한 것을 딸이 실제로 실행하니까 말이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며 반대했지만, 이미 늦었다. 1814년 메리와 셸리는 프랑스로 도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연애를 주장한 철학자가 딸의 자유연애는 막으려 했다.
괴물을 낳은 집안
메리와 셸리의 관계는 파란만장했다. 둘은 유럽을 떠돌며 자유로운 사랑을 누렸지만, 경제적으로는 늘 궁핍했다. 셸리의 아버지가 용돈을 끊어버렸고, 고드윈도 한동안 딸과 연락을 끊었다.
1816년 여름, 메리와 셸리는 스위스 제네바 호수 근처에서 바이런 경(1788~1824)과 함께 지냈다. 그 유명한 '괴담 대회'가 열린 곳이다. 비가 계속 내려서 실내에 갇힌 이들은 서로 무서운 이야기를 지어내기로 했다. 19세의 메리가 이때 구상한 이야기가 바로 <프랑켄슈타인>이었다.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 이야기를 쓴 딸의 아버지가, 사회의 모든 제도를 괴물로 본 철학자였다니.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절묘하다. 메리의 소설 속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괴물을 제어하지 못해 파멸한다. 혹시 메리가 아버지의 급진사상이 낳을 수 있는 위험을 은연 중에 경고한 건 아닐까?
가족사의 비극들
고드윈 집안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비극으로 점철되었다. 셸리의 첫 번째 부인 해리엇이 자살했고, 메리와 셸리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도 여러 명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822년에는 셸리마저 이탈리아에서 요트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25세에 과부가 된 메리는 런던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화해했다. 고드윈은 말년에 딸과 손자를 돌보며 살았다. 한때 모든 가족제도를 부정했던 철학자가, 결국 가족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달은 셈이다.
200년 후의 메아리
고드윈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광범위했다. 셸리, 바이런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이 그의 사상에 매료됐다. 이후에 러시아의 표트르 크로포트킨(1842~1912) 같은 무정부주의자들도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심지어 자유지상주의자들도 고드윈을 조상으로 모신다. 좌우를 막론한 '국가권력 줄이기' 경연대회에서 그는 여전히 챔피언급이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규제완화', '민영화'를 외칠 때도 고드윈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물론 그들은 고드윈이 사유재산제도까지 반대했다는 걸 모르거나, 알면서도 쏙 빼고 얘기하지만 말이다.
디지털 시대의 '탈중앙화', '블록체인', '자율조직' 같은 개념들도 고드윈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중앙권력 없이도 사회가 돌아갈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200년 만에 기술로 구현되고 있는 셈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영원한 간극
고드윈의 한계는 분명했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이성적이고 선량하다고 믿었다. 정부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조화로운 사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SNS 댓글창만 봐도 답이 나온다. 익명성이 보장되면 천사가 되는 게 아니라 악마가 되는 게 인간이다.
게다가 그 자신도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갈등했다. 결혼제도를 비판하면서도 결혼했고, 자유연애를 옹호하면서도 딸의 자유연애는 반대했다. 인간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사상가로서는 일관성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꿈꾸는 자의 가치
윌리엄 고드윈은 실패한 혁명가일 수도 있다. 그의 무정부 사회는 실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온전히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이 있어야 '가능한 것'의 경계가 넓어진다.
고드윈 일가의 이야기는 사상과 현실, 이상과 인간성 사이의 영원한 긴장을 보여준다. 완벽한 사회를 꿈꾸는 철학자도 결국은 불완전한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인간적이고 매력적이다. 그가 21세기에 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 "정부는 여전히 너무 크다"고 불평하면서도, 인터넷을 보고는 "역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면 안 되는구나"라고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여전히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글을 썼을 것이다.
이상주의자의 가치는 이상을 실현하는 데 있지 않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윌리엄 고드윈과 그의 가족들이 영국역사에, 아니 인류역사에 남긴 족적은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의 실험이었고, 그 실험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