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다비, 조용한 기술혁신으로 세상을 바꾸다

숯 대신 ‘구운 석탄’으로 철 녹이는 기술개발

제철 비용 절반 이하로 줄어 철 사용 대중화

와트 증기기관·제니 방직기 다비의 기술 덕

세계 최초로 만든 ‘아이언 브릿지’ 아직 건재

개혁, 화려한 구호 아닌 묵묵한 연구가 동력

2025-08-10     김성수 시민기자

영국 산업혁명사를 들여다보면 기묘한 아이러니와 마주친다. 세상을 바꾼 기술자들 중 상당수가 평화주의 종파인 퀘이커교도였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 다비(1678~1717)가 바로 그 대표주자다.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이 무기재료를 만들어?" 하고 의아해할 수 있겠지만, 역사란 원래 모순투성이 아니던가.

다비는 1709년 코크스(석탄을 구운 연료)로 철을 녹이는 기술을 완성했다. 이전까지 철 제련은 나무 숯에 의존했는데, 영국의 숲이 베어지고 베어져 목재 가격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마치 오늘날 부동산 가격처럼 말이다. 16세기부터 영국 왕실은 해군을 위한 선박 건설을 위해 오크나무를 닥치는 대로 베어댔고, 귀족들은 저택 난방을 위해 숲을 불쏘시개로 써버렸다. 그 결과 18세기 초 영국은 나무 부족 사태에 직면했다.

"나무가 없으니 석탄을 쓰자!" 이 발상은 단순해 보이지만, 석탄에 포함된 유황과 불순물이 철을 망쳐놓는 게 문제였다. 석탄으로 철을 녹이면 딱딱하긴 하지만 부러지기 쉬운 주철만 나왔다. 마치 겉보기엔 멀쩡해도 속은 텅 빈 정치인의 공약처럼. 다비는 석탄을 구워 불순물을 제거한 코크스를 만들어 이 난제를 해결했다. 그야말로 '못된 석탄도 구우면 쓸모있다'는 교훈을 몸소 입증해 냈다.

 

아브라함 다비. (Business Live)

사업가로서의 천재적 감각

다비의 혁신은 단순히 기술적 성취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사업 감각도 뛰어났다. 1708년 동업자들과 함께 영국 중부지역인 콜브룩데일에 제철소를 세우면서, 그는 이미 시장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 중이었는데, 전쟁 특수로 대포와 총포탄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추구하는 퀘이커교도가 군수품으로 돈을 벌게 됐다. 하지만 다비는 이런 모순을 영리하게 해결했다. 그는 대포뿐 아니라 솥, 난로, 농기구 같은 평화로운 용도의 철제품도 대량 생산했다. "전쟁용 대포도 만들지만, 평화로운 가정의 난로도 만든다"면서 양심의 부담을 덜었다. 요즘으로 치면 '듀얼 유즈(민군 겸용) 기술'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다비가 당시 만든 용광로.(위키피디아)

철의 민주화, 아니 대중화

다비의 기술혁신은 철의 생산비용을 대폭 낮췄다. 이전에는 톤당 50파운드나 하던 철 가격이 20파운드로 떨어졌다. 귀족들만 쓰던 철이 서민층까지 퍼져나갔다. 요즘 말로 하면 '철의 대중화'가 이뤄진 것이다. 농기구, 생활용품, 건설자재까지 철이 사용되면서 사회 전반이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농촌에서 변화가 두드러졌다. 철제 쟁기와 낫, 괭이가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성이 크게 향상됐다. 농민들은 "이제 밭 갈기가 수월해졌다"며 좋아했지만, 지주들은 "농민들이 철기구까지 쓰다니, 버릇 없어진다"고 투덜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잉여 농산물이 늘어났고, 이는 도시인구 증가와 산업발전의 토대가 됐다.

가정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철제 솥과 팬이 널리 보급되면서 요리 문화가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토기나 나무그릇으로 끓이던 음식을 이제 철솥에서 요리할 수 있게 됐다. 맛도 더 좋아졌고 조리시간도 단축됐다. "우리 집 철솥 음식이 최고"라는 자랑이 유행할 정도였다.

 

현재 영국 콜브룩데일 지역 철 박물관의 일부인 다비의 용광로. (위키피디아)

가문의 영광, 3대에 걸친 혁신

다비 가문의 이야기는 마치 기술혁신 드라마의 3부작 같다. 1부 주인공인 아브라함 다비 1세가 코크스 제철법을 개발했다면, 2부의 아브라함 다비 2세(1711~1763)는 1767년 최초의 주철 철로를 생산하며 제철 기술 발전과 사업 확장을 했다. 3부의 아브라함 다비 3세(1750~1791)는1779년 세계 최초 철교인 '아이언 브리지'를 건설했다. 영국 중부지방에 있는 세번강에 놓인 이 다리는 길이 30미터, 폭 7미터로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건축물이었다.

돌과 나무로만 다리를 만들던 시대에 철로 다리를 놓는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늘에 계단을 놓겠다'는 소리처럼 들렸을 수 있다. 실제로 건설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철로 만든 다리가 무너지면 어쩌나"하며 걱정했다. 하지만 아이언 브리지는 250년이 넘은 지금도 건재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특별히 아브라함 다비 2세 시대가 1767년 아버지의 유산을 계승해 철도용 레일을 대량 생산했고, 그의 철길 위로 최초의 증기 기관차가 달렸고, 이는 교통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마치 '우리 집은 대대로 철 장사'라는 농담이 절로 나올 상황이다.

 

다비 3세가 만든 세계 최초의 철교. (위키피디아)

퀘이커의 역설적 성공

퀘이커교도들의 성공에는 독특한 종교적 배경이 있었다. 이들은 검소함과 정직을 추구했는데, 이런 가치관이 오히려 사업가로서 성공요인이 됐다. 허영을 부리지 않으니 자본이 쌓였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신뢰를 얻었다. 술을 마시지 않아 정신이 맑았고, 교육을 중시해 기술혁신에 몰두할 수 있었다.

또한 퀘이커교도들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소수 종파였다. 공직에 진출할 수도 없고, 대학 입학도 제한됐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업과 제조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벼슬길이 막혔으니 장사나 하자"는 심정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이 영국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됐다.

퀘이커 사업가들은 서로 인맥을 형성해 정보를 공유하고 자금을 지원했다. 마치 현재의 벤처 투자 생태계와 비슷했다. 다비가 사업을 시작할 때도 같은 퀘이커 사업가들이 투자했고, 그의 성공 이후에는 다시 다른 퀘이커 혁신가들을 후원했다. "퀘이커 마피아"라고 불러도 될 만큼 끈끈한 관계였다.

 

 영국 산업혁명 당시 증기기관 설계도. (위키피디아)

산업혁명의 숨은 주역들

아브라함 다비는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나 제니 방직기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값싼 철이 없었다면 증기기관도, 철도도, 공장도 불가능했다. 기반시설의 혁명이야말로 모든 변화의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당시 영국정부는 이런 기술자들의 가치를 몰랐다. 오히려 세금징수에만 혈안이 됐다. 조지 1세(재위 1714~1727)는 독일 출신이라 영어도 제대로 못했는데, 영국의 기술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궁궐 장식과 정원 가꾸기에만 돈을 썼다. 오히려 다비 같은 혁신가들이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든 진짜 동력이었다. 정치인들은 연설로 국민을 감동시키려 하지만, 기술자들은 삶 자체를 바꿨다.

흥미롭게도 다비의 성공은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충격을 줬다. 프랑스와 독일은 영국의 제철 기술을 따라잡으려고 산업 스파이를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술만 베껴서는 안 됐다. 퀘이커교도들의 근면성과 혁신정신, 그리고 자유로운 사업환경까지 함께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독일출신의 조지 1세. (위키피디아)

환경과 사회변화의 양면성

다비의 구운 석탄 제철법은 환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무 대신 석탄을 쓰게 되면서 영국의 숲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동시에 석탄채굴이 급증하면서 새로운 환경문제가 생겼다. 탄광지역의 공기가 나빠졌고, 석탄 연기가 도시를 뒤덮기 시작했다. 런던의 유명한 스모그도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도 양면성이 있었다. 철 산업 발전으로 일자리가 늘어났지만, 노동조건은 열악했다. 제철소 근로자들은 고온에서 장시간 일해야 했고, 안전장치도 부족했다. 다비는 퀘이커교도답게 노동자들을 비교적 잘 대우했지만, 다른 사업주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후 영국 노동운동의 뿌리가 바로 이런 제철소와 방직공장에서 시작됐다.

 

굽기 전의 생 석탄.(위키피디아)

오늘날에 주는 교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브라함 다비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 첫째, 진짜 혁신은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묵묵한 연구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다비는 신문에 큰 광고를 낸 것도 아니고, 정부지원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작업장에서 수백 번의 실험을 반복했을 뿐이다.

둘째, 종교적 신념이나 철학이 오히려 창조적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이다. 퀘이커교도들의 검소함과 정직함이 사업성공의 밑바탕이 됐듯이, 확고한 가치관이야말로 혁신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셋째, 기초기술의 발전이 사회전체를 바꾼다는 교훈이다. 코크스 제철법이라는 하나의 기술이 농업, 교통, 건축, 군사 등 모든 분야를 혁신시켰다.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나 인터넷 같은 기반 기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넷째, 소수자의 관점이 때로는 혁신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주류사회에서 배제당한 퀘이커교도들이 오히려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현재 우리사회의 다양성과 포용성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기술혁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다비의 기술이 산업 발전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환경오염과 노동착취의 문제도 낳았다. 기술자들은 자신의 발명품이 사회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도 어딘가에 '현대의 아브라함 다비'가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만든 작은 변화가 훗날 역사책에 실릴 거대한 변혁의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

300년 전 콜브룩데일의 작은 제철소에서 시작된 혁명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었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미래를 바꿀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혁신가들이 마음껏 실험하고 실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역사는 늘 그렇듯, 조용한 곳에서 시작된다.

'아이언 브리지' 그림.(English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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