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친구인가, 경쟁자인가, 적인가?
혼돈의 국제질서, 중재자 외교로 새 지평 열어야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그동안 소원했던 한중관계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이후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회귀와 거친 외교적 압박으로 인해,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무규범과 불확실성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러한 국제질서의 격변은 한중관계의 회복과 새로운 관계 설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한중관계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기존의 틀을 넘어 K-이니셔티브가 제시하는 발상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보다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외교적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K-이니셔티브 외교와 한중관계
필자는 앞서 K-이니셔티브를 주제로 두 차례 칼럼을 실었다. 첫번째 칼럼(K-이니셔티브의 성공을 바라는 단상; 6월 3일자)에서는 K-컬처와 K-민주주의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의 소프트파워 자산을 바탕으로, 모방형 국가에서 선도형 국가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K-이니셔티브의 의의를 조명했다. 두 번째 칼럼(백범의 꿈, K-이니셔티브; 7월 1일자)에서는 이재명 정부 초기에 보여준 K-이니셔티브 구상이 산업정책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외교와 학술 영역으로 확장할 것을 주문했다. 이 칼럼에서는 앞선 내용을 바탕으로 한중관계의 회복과 미래 설계를 위한 새로운 접근법으로서 ‘중재자 외교’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늘날 그리고 향후 한중관계를 진지하게 성찰해보고자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리고 앞으로의 국제질서 속에서 ‘중국’은 대한민국에게 어떤 존재인가? 한국과 중국은 서로에게 배울 점이 있고 함께 미래를 모색해볼 만한 동반자(혹은 친구)인가, 아니면 물질적 이익만을 고려하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평범한 이해관계자(혹은 경쟁자)인가, 그것도 아니면 공존하기 어려워서 언제든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적인가?
인간관계에서도 그렇듯이 국가관계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인식과 정체성 요인은 매우 중요하다. 국제관계 이론에서 국가 간 상호정체성을 중시하는 설명을 구성주의적 접근이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상대방을 친구로 인식하는지, 평범한 경쟁자로 인식하는지, 아니면 적으로 인식하는지에 따라 동일한 이슈에 대해서도 매우 다른 정책정향과 행위방식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대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안보, 경제 등의 물질적 국가이익 이슈도 상호정체성이라는 관념적 요인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 성격은 재규정된다. 예컨대 이스라엘과 북한은 국제 핵 비확산 규범인 NPT 체제를 부정하거나 위반한 비공식 핵보유국이다. 그런데 두 나라의 핵보유에 대해 미국 등 서방국이 취하는 정책은 180도 다르다. 상대를 친구로 보느냐 적으로 보느냐의 차이 때문이다.
한중관계에 대한 세 가지 유형의 정체성에 대해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생각이 좀 복잡할 것이다. 중국의 정체성 자체가 매우 논쟁적이고, 미-중관계를 포함한 미래의 국제질서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여느 국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겠지만, 한중관계의 미래 역시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은 아니고 지금 희망한 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다. 각자가 생각하는 국가이익과 주관적 인식에 따라 더 바람직한 미래상을 그리면서 그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셋 중 하나의 정체성이 점차 뚜렷한 우위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제와 어떤 방향감각으로 교류할 것인가?
한중관계의 지리적 인접성과 안보와 경제 등 이해관계의 긴밀한 연관성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중국을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 미래를 함께 도모해볼 만한 동반자이고 친구인지 아니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해관계에 따라 관리해야 하는 평범한 경쟁자인지는 다소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필자도 그렇다.
한중관계의 현황을 평가하고 협력방안을 제시한 많은 논문과 정책보고서에서 흔하게 맺는 결론이 있다. 다방면에서 교류를 확대하여 서로 간의 이해를 심화하자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뭔가 부족하고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양한 수준(정치인, 학자, 언론인, 청년 등)에서 상호방문과 교류를 확대하면 양국관계의 미래가 밝아질까? 최근 양국에서 공히 증가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감소하고 호감도가 증가할까?
필자의 생각엔 교류를 안하는 것보다야 물론 낫겠지만, 인적교류의 확대 그 자체가 한중관계의 미래상을 밝혀줄 결정적 해법은 아니라고 본다. 교류를 확대하고 자주 만나되, 관건은 어떤 의제와 어떤 방향감각을 가지고 교류하는가에 있다. 한중수교 초기와 달리 최근 10년 사이 한중관계의 양상은 서로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기 혹은 과도기에 처해 있다. 이 글은 그러한 의제와 방향감각을 확보하는 데서 K-이니셔티브에 입각한 창의적 외교 발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방안으로서 중재자 외교의 모색을 제시한다.
K-이니셔티브 외교, 중간지대 국가정체성이 출발점
K-이니셔티브를 한중관계의 외교분야에 적용할 때 사고의 출발점은 한국의 중간지대 국가정체성과 위상을 명확히 인식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K-이니셔티브의 영감의 원천인 한류의 성공은 중간지대 국가에서 발원한 동서문화의 융합정체성이 21세기 들어 폭발적으로 활성화하면서 얻은 것이다. 따라서 K-이니셔티브 외교의 방향성은 중간지대 국가 한국의 정체성을 외교 영역에 투영하여 국익의 확장과 인류공동의 발전에 기여하는데 두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한국의 중간지대 국가정체성의 한쪽 편에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 상수로서 자리하고 있다. 한중 갈등 이슈의 대부분은 양자관계가 아니라, ‘삼각구도의 함정’에서 발생한다. 실제로 오늘날 한중 간 외교안보 이슈의 대부분은 주로 미국, 북한 문제와 연동된 3자, 4자관계 등 동북아 다자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들이다. 이러한 다자간 이해관계에서 한국이 처한 위상이 중요한데, K-이니셔티브의 맥락에서 보자면 한중 간 외교는 중간지대 국가의 정체성으로부터 접근해야 한다.
중간지대로서의 한국의 국가정체성을 정확히 인식하면 미중 경쟁구도에서 ‘친미냐 친중이냐’라는 골라잡기식 사고가 얼마나 단순한 사고인지 명확히 드러난다. 친미냐 친중이냐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야 보다 주체적이고 복합적이며, 입체적이고 창의적인 발상이 가능하다. 그것이 K-이니셔티브 구상을 외교 분야로 확장하는 출발점이다.
미-중 사이에서 ‘중재자 외교’ 역할 적극 모색해야
최근 미-중 간 경쟁과 대결이 심화하면서 양측은 한국에 대해 상당한 선택압력을 가하고 있고, 이로 인해 한국 외교의 자율성이 크게 위축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미, 중 양국의 선택압력에 대해 한국이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방식만으로는 우리의 국익을 온전히 지켜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슈의 성격에 따라서는 미-중 양국 사이에서 적극적 중재나 독립적인 문제해결 방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미-중 사이에서 순응적 타협외교가 아닌 적극적 중재자 외교를 모색하는 것이 선택압력을 오히려 완화하는 방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거친 외교 행태와 기존 국제질서 규범의 파괴에 직면해서는 더욱 그렇다. 예컨대 미국이 대중국 견제를 위해 추진하는 ‘쿼드+ 협의체’나 ‘칩4 동맹’에 한국의 참여를 압박할 경우 이를 끝까지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주한미군 감축 등 안보이슈와 연동시키면 한국의 선택지는 거의 없게 된다. 이 경우 한국은 중국을 향해 이들 기구에 불가피하게 참여하지만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중국의 불만과 압박을 완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덜 민감하면서 중재자로서의 실재적 역할이 가능한 이슈에서 시범효과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트럼프 취임 이후 크게 흔들리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관리, 국제 무역질서 규범, 기후변화 규범, 각종 다자기구 등 글로벌거버넌스 체계의 안정화, 그리고 최근 새롭게 부상하는 이슈인 AI 거버넌스 규범 등의 이슈에서 한국이 보다 주동적이고 창의적인 개입을 통해 중견국으로서의 글로벌 중재자 역할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당장 10월 말 경주에서 개최되는 APEC 회의도 이를 실현하는 좋은 무대가 될 수 있다.
글로벌사우스 외교에서 한·중 간 보완적 파트너십 가능
한국이 교량국가로서 중재자 외교를 추진하는 데서 주목해야 할 외교무대가 글로벌사우스 진영 및 이들이 참여하는 국제 다자기구다. 최근 국제질서는 전통적 선진국의 주도권이 상대적으로 약화하는 틈새를 글로벌사우스 진영이 빠르게 파고들면서 발언권과 영향력을 강화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다극화와 불확실성이 심화되는 세계질서 속에서, 글로벌노스와 글로벌사우스 양 진영의 정체성을 모두 지닌 한국은 양측을 연결하는 교량자·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특히 한국은 성공적인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전환을 동시에 이룬 국가로서, 많은 개발도상국이 모델로 삼고자 하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의 외교적 시야는 다소 협소했으며, 중간지대 국가로서 지닌 정체성과 역량을 대외전략에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K-이니셔티브는 이러한 잠재력을 발현시킬 수 있는 기획이 되어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 글로벌사우스 국가들과의 외교에 가장 많은 자원을 투입한 국가는 단연 중국이다. 중국은 일대일로(BRI), 글로벌개발이니셔티브(GDI), 글로벌문명이니셔티브(GCI) 등 다양한 구상을 통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구축했다. 하지만 동시에 다수 개발도상국에서 중국에 대한 정치적 신뢰와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 역시 이 같은 한계를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보완할 협력 파트너로서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사우스 국가들과의 경제 및 전략적 협력에 있어 한·중이 보완적 파트너십을 구축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중국도 내심 기대하는 한국의 중재자 외교
사실 미·중 간의 경쟁 구도와 글로벌 사우스-글로벌 노스 간의 대립 구도에서 한국이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중국이 내심 기대하는 바이기도 하다. 중국은 지난 10여 년간 미국과의 패권 경쟁을 본격화해왔지만, 동시에 힘의 열세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며, 이른바 ‘회색지대 전술’을 통해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미국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며, 양자 관계의 안정적 관리를 선호한다. 미국 및 글로벌 노스 진영과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고 긴장을 완화하는 데 있어, 때로는 제3국의 적절한 중재가 효과적일 수 있다. 중국이 볼 때 한국은 서방과 중국 양측의 입장에 상당히 정통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만한 역량을 갖춘 매력적인 국가다.
K-이니셔티브를 외교 분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중간지대 국가로서의 한국의 정체성과 역량에 기반한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발상이 요구된다. 한중 간의 갈등 이슈들은 겉으로는 양자 간 이슈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미중 전략경쟁과 같은 다자적 갈등 구조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이는 한중관계의 미래를 양자 간에 단순한 교류 확대나 협력 강화만으로는 설계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그리고 불확실성이 심화된 글로벌 규범과 거버넌스의 재편 과정에서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교량자이자 중재자로서의 외교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한국의 국익을 증진하는 동시에, 한중 양국이 미래를 함께 설계해나가는 친구이자 동반자로 거듭나는 첩경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