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다양·형평·포용 정책에 '백인 역차별' 딱지
'보통 사람'의 역사성 이용한 트럼프식 통치③
인종주의 극복 노력을 되레 차별이라고 강변
'흑인의 생명도 귀해'가 다른 인종 배제한다?
정착민을 신의 섭리를 따른 개척자로 신성화
원주민의 자연과 조화된 삶의 지혜 되살려야
2025년 3월 4일 도널드 트럼프는 의회 연설에서 "our country will be woke no longer!"라고 선언했다. 직역은 "미국은 더 이상 깨어 있지 않겠다"이다. 의역하면 뜻이 많이 다르다. 그가 사용한 'woke'는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만들어낸 표현으로, 사회의식이 뒤떨어진 이들을 향해 '깨어 일어나라!'고 소리친다는 뜻이다. 트럼프는 의식의 진보성을 주장하면서, 정신 차리라며 다른 사람들의 어깨를 흔들어대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다. 잘나지도 않은 이의 잘난 척은 '이제 그만'이란 말이다.
트럼프는 미국의 진보 커뮤니티가 울려온 의식의 자명종 소리를 차단했다. 이 자명종의 이름은 DEI, 즉 Diversity(다양성), Equity(형평성), Inclusion(포용성)이다. "우리는 연방 정부는 물론 민간 부문과 군 전체에 걸쳐 소위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정책의 횡포를 종식시켰다!" 그의 이 선언은 사회 전반의 강도 높은 비난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트럼프의 연설에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DEI의 전투구호 격인 '흑인의 생명도 귀하다(Black Lives Matter)'에 다른 인종이 들어갈 자리가 없으니 차별적이란 주장이 나왔다.
트럼프가 많은 보통 백인의 가슴속에 이 소외의식이 존재한다는 감을 잡았다. 그는 민심의 풍향을 잘 읽는 정치인이다. 때로 미풍을 폭풍이라고 과장하는 게 문제지만, 바람이 이는데도 하늘은 아무렇지도 않다며 "이상 무"를 외치지는 않는다. 트럼프는 DEI를 역사의 아픔에 대한 오진이고 잘못된 처방이라 주장했다.
DEI의 종말을 고한 그의 연설 한 달 전인 2025년 2월 14일. 갓 취임한 트럼프 행정부의 교육부는 장문의 편지를 불특정 다수인 '동료들에게(Dear Colleagues)' 보냈다. 미국의 교육 종사자 모두가 수신자였다.
대학교를 포함해 학교들이 실시하는 DEI와 관련된 정책과 프로그램은 인종 차별의 요소가 있으니 중단하라는 명령서였다. 지난 수십 년 미국 사회는 인종, 문화, 성정체성과 관련해서 다름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다름을 차별하지 않으며, 다른 서로에게 익숙해 가자는 사회 합의가 있었다.
DEI는 오랜 세월 미국 역사의 저변에 흐르던 백인 우월주의와 서구 중심의 사고가 만들어낸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인종 차별 (systemic and structural racism)'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상징한다.
체계와 구조는 상호 보완을 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이 둘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영화에서 부자와 그렇지 못한 가족이 등장한다. 이 두 가정의 삶(실존)의 '체계'는 별천지다. 먹고 마시는 것부터 다르다. 부유한 가정에서는 서민의 식생활에 중요한 라면에 갈비를 넣어야 입맛에 맞는다.
이 차이를 가능케 하고 지속시키는 '구조'가 존재한다. 주거의 차이이다. 한쪽은 비가 오면 빗물이 차오르는 반지하에 산다. 다른 쪽은 비가 오면 운치가 더해지는 '건축 작품'에 산다. 그래서 몸에 밴 냄새가 다를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 둘을 작품 같은 건축물 속에 감추어진 기형적인 지하공간을 통해 비극적으로 만나게 한다. 이들의 관계는 극한 폭력으로 끝난다.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차별'의 종말로도 읽힌다.
트럼프 교육부는 DEI가 오히려 인종 편견과 차별을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교육기관들은 미국이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인종차별' 위에 세워졌다는 잘못된 전제를 학생들에게 악랄하게 주입하고 차별적인 정책과 관행을 심어왔다. 이러한 차별적 관행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특히 지난 4년 동안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EI)'이라는 기치 아래 이 관행을 더 정당화하려 시도해 왔으며, 인종적 고정관념과 노골적인 인종 의식을 일상적인 훈련, 프로그램, 그리고 규율에 스며들게 했다."
DEI를 고집하면 정부의 재정지원을 끊고 나아가 법적 문제로 삼겠다고 경고했다.
트럼프의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에 대한 거부감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의 반 DEI 전쟁을 많은 보통 사람들이 일종의 해방투쟁으로 환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술 작품 등 이미지를 통해 답을 구한다.
위 작품은 앨버트 비어슈타트(Albert Bierstadt, 1830-1902)의 'The Rocky Mountains, Lander's Peak(1863)'라는 작품이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자랑하는 소장품이다. 지금의 와이오밍주 지역의 한 원주민 공동체를 그렸다. 그는 깊은 자연 속에 형성된 원주민 공동체를 에덴동산에 비했다. 거는 모든 것이 놀랍고 경이롭다고 했다. "인간이 이 미국의 에덴동산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비어슈타트는 그가 만난 대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영원히 가려질 신비로운 자연법칙의 현현"이라면서 "이 모든 것을 잃기 전에 원주민에 대한 끊임없는 학살을 멈춰야 한다"고 호소했다.
어째서 이곳이 미국의 에덴동산인가? 작품을 확대해 원주민들의 일상을 바라본다. 이 링크에서 확대해 볼 수 있다. (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10154)
비어슈타트는 캘리포니아 원주민 사회의 공동체 운영 방식에 감탄했다. 문제가 있으면 땅 위에 둘러앉아 대화로 결정하는 모습이다. 빠르게 사라져 가는 원주민의 삶을 기록해야 하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며 이 장면을 작품으로 남겼다. 개인 소유의 땅, 높은 생산성, 다양한 소비, 문서화된 법과 공권력으로 움직이는 공동체, 그리고 발전된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주거 환경. 이런 백인 사회와는 다른 존재의 모습을 원주민은 갖고 있었다.
잘 알려진 '시애틀 추장(Chief Seattle)'은 1855년 백인사회를 이렇게 묘사했다. "백인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의 나뭇잎 소리나 곤충 날갯짓 소리를 들을 곳도 없다. 밤중에 속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연못가에서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나?" (그가 실제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 내용은 원주민 사회에서 구전으로 지금까지 내려온다.)
백인사회는 이 물음에 대해 답을 주었다. 나중에 미국의 제26대 대통령이 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886년 연설에서 한 말이다. "나는 죽은 인디언만이 좋은 인디언이라고 생각할 만큼 극단적이지 않지만, 10명 중 9명은 그렇다고 믿는다." 백인 사회의 팽창을 역사의 진보와 동일시했던 그는 원주민 사회가 역사를 정체시킨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루스벨트는 원주민들이 백인 정착민들을 위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아래 작품처럼 이런 생각을 가진 백인 정착민들이 몰려들었다. 하나님이 주신, 확실한 사명이라며 '서부 개척'에 나섰다. 미국을 넘어 문명 세계의 확장을 위한 고난의 행군을 묘사한 이 작품은 국회의사당에서 볼 수 있는 벽화다. 해가 지는 서부로 돌산도 마다하지 않고 포장마차를 몰아간다.
역사 강의 중에 이 작품을 분석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 일이 있다. 그림 속에 그려진 총이 과연 모두 몇 자루일까? 몇몇 학생이 세기를 시작했다. 잠시 후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했다. 남자의 수를 세면 총이 몇 자루인가 대충 알 수 있다.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개척과 총이 상징하는 폭력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개척자, 또는 정착민들이 사용한 폭력은 정당화를 넘어 신성시된 측면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을 놀리고 있는 원주민은 은혜를 방치한 집단으로 전락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25장의 선언과 다르지 않다. 생산성 높은 백인 사회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축복이 내려졌다. 하나님 지으신 세계에서 생산성을 늘리려 하지 않는 원주민 공동체에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저주가 내려졌다는 주장도 있었다.
아래 작품은 앞 작품의 연작이다. 서부 개척을 묘사한 첫째와 둘째 작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답은 아래 확대된 면에 보이는 십자가다. 지금은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을 연상케 하는 십자가가 있다. 이 고난의 행군은 하나님이 부여한 은혜이고 사명이었다. 골고다의 언덕 같은 의미이다. 끝에 영광이 기다린다.
아래 작품에서처럼 정착민들은 미국의 중부로, 서부로, 북서부로 밀려왔다.
원주민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백인 정착민의 행렬을 원주민들은 아래 작품처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력 충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다. 미국의 역사 속에서 개척과 전쟁은 하나였다. 백인들은 원주민의 저항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은 서부 곳곳에 요새를 세웠다. 군사적 전략에서도 필요했지만, 백인 몰아낼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말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아래가 전형적인 개척지에 세워진 미국의 요새다.
자연을 소비 생활을 가능케 하는 생산 수단으로 본 백인 정착민들에게 인간, 자연, 영혼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고는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서 '시애틀 추장'의 호소는 아름답지만 슬프다.
"하늘과 땅의 따스함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는 생소한 생각이다. 우리는 공기의 신선함이나 물의 반짝임을 소유하지 않는다. 어떻게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이 땅의 모든 것은 우리 민족에게 신성하다. 빛나는 솔잎 하나하나, 모래사장 하나하나, 어두운 숲속 안개 하나하나, 맑고 윙윙거리는 모든 곤충 하나하나는 우리 민족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하다."
백인 정착민들은 알았다. 원주민 공동체를 무력화하는데 환경 파괴만 한 무기가 없다. 물론 전염병도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면역이 생긴다. 원주민의 존재적 뿌리를 제거하는 방법이 있다. 그들의 원주민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꼭 필요한 존재가 버팔로(바이슨)였다. 원주민들은 아직 내장을 빠져나가지 않은 배설물을 연료로 쓸 정도로 버팔로에 삶을 의지했다. 원주민 공동체는 그해 필요한 버팔로가 몇 마리인지를 정해 말과 창, 활을 이용한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냥에 나섰다.
아래 작품에서 보듯, 원주민들에게 버팔로 사냥은 용기와 사냥 기술을 배양하는 학습의 기회였다. 학교 대신 버팔로 사냥터로 갔다고 할 수 있다. 말을 타고 무게가 1000~2000파운드 나가는 버팔로 사냥에서 다치면 말 그대로 성장통이었다. 사냥한 버팔로는 물론 공동체의 몫이었다.
위의 작품은 백인들이 총으로 버팔로를 사냥하는 모습을 전한다. 버팔로를 먼 거리에서 마음껏 죽일 수 있었다.
원주민은 버팔로를 사냥했지만 백인 개척민들은 버팔로를 산업화했다. 가죽을 벗겨냈고, 별미라며 혀를 잘랐다. 뼈는 모아 비료를 만들었지만, 그 외 부위는 버렸다. 연방 공원관리국(National Park Service)에 따르면 백인들의 무분별한 대규모 사냥으로 한 때 수백만 마리였던 버팔로는 1890년 약 10만 마리만이 자연 속에 남아 있었다. 버팔로가 사라진 서부에는 목축이 대체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에 의해, 또 그들의 소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고 인구 급감의 운명을 맞이했다.
무력화된 원주민 공동체는 자신들의 삶을 파괴한 백인들에게 후예들을 빼앗겨야 했다. 천년을 자연과 더불어 필요한 만큼만 거두는 삶을 살아온 원주민의 후예들을 문명화시킨다며 기숙학교로 또 한 번 강제 이주시켰다. 대표적인 예가 펜실베이니아주에 있었던 '카라일 인디언 직업 훈련 학교 (Carlisle Indian Industrial School)' 였다.
아래처럼 백인들에 의해 문명화된 원주민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것이 트럼프가 꿈꾸는 DEI가 없는 미국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1830년대 수만의 미 동남부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중부, 서부로 몰아낸 앤드루 잭슨이 이 폭력의 역사를 열정적 언어로 정당화했다. 원주민이 강제로 이주당함에 따라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제약 없이 마음껏 활동하며 인간의 힘과 능력을 최고로 완벽하게 키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스스로 개척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해, 수백 수천 마일을 이동하고, 자신이 차지한 땅을 매입하며, 도착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자신을 부양하는 백인 정착민을 찬양했다. 원주민 이주, (전쟁을 피하지 않는) 공간 확보, 개척. 이 과정이 바로 잭슨이 정리한 보통사람들의 보통사람들에 의한, 보통사람들을 위한 미국의 역사이다. 여기서 보통사람은 백인을 뜻한다.
트럼프도 지난 1월 취임사에서 잭슨과 비슷한 생각을 전했다. "미국인은 탐험가, 건설자, 혁신가, 기업가, 그리고 선구자이다. 개척 정신은 우리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 다음에 오는 위대한 모험에 대한 부름은 우리 영혼 속에서 울려 퍼진다. 우리 미국인 조상들은 광활한 대륙 끝자락에 자리잡은 작은 식민지들을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시민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공화국으로 발전시켰다. 그 누구도 그에 근접할 수 없는 역사의 성취이다."
이를 위해 미국인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If we work together, there is nothing we cannot do and no dream we cannot achieve.") 문제는 트럼프의 하나 되자는 외침이 백인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요구로 들린다는 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