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원주민에게 국가 폭력 동원한 잭슨 추앙…왜?
'보통 사람'의 역사성 이용한 트럼프식 통치②
잭슨의 백인 우월 사상을 공유하는 트럼프
보통 사람들의 '사명과 책임' 된 서부 개척
잭슨 "'눈물의 길' 미국 미래 위한 길" 강변
서부로 밀려난 원주민 사회는 파괴의 길로
원주민 강제 이주와 추방 정책은 같은 뿌리
도널드 트럼프에게 앤드루 잭슨은 존경의 대상을 넘는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잭슨을 보기 원하는 것 같다.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오른 풍선과 같은 도널드 트럼프의 자기 확신을 잭슨도 갖고 있었다. 한 예로 잭슨은 아내의 명예를 지킨다며 '결투'를 신청해 상대를 총격으로 죽게 했다. 생각을 굳히면 주변에서 말리기 어려운 잭슨은 쓴소리하는 보좌관이나 행정부 관리는 즉시 내쫓았다. 충성한 사람에게 공직을 나누어주는 '엽관제 (spoil system)'에 대해서도 당연한 것 아니냐며 당당했다. 마치 트럼프를 보는 것 같다.
잭슨도 트럼프처럼 그 시대의 거부였다. 트럼프는 저돌적인 부동산 투자로, 잭슨은 수백 명의 노예를 부려 재산을 모았다. 노예와 말을 사고팔아 이윤을 남기는데도 유능했다. 그를 추종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잭슨이 농장 넓이가 1000에이커(120만 평)에 달했던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많을 때는 300명의 노예를 소유했던 그를 트럼프를 포함한 잭슨 흠모자들은 비판하지 않는다. 성공한 비지니스맨일 따름이다. 뉴욕의 맨해튼 5번가 '트럼프 타워'가 부자들의 별천지와 사회적 불평등의 상징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관광 성지가 된 이유와 같다.
잭슨을 닮기 원하는 트럼프는 세상이 다 아는 그의 역사적 잘못에 대해서 눈을 감는다. 모르는 척을 넘어 그의 의식 속에서 잭슨의 학정도 선정으로 뒤바뀐다. 이 둘은 200년 세월을 뛰어넘은 정치적 수중 발레팀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잭슨과 일체화되기 원하는 트럼프의 의식에서 반역사성을 발견한다. 참고로, 트럼프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잭슨과 조우할지도 모른다. 백악관 건너편 라파예트 공원 한가운데 잭슨의 동상이 있다. 모자를 벗어 인사한다.
비(몰)역사적(ahistorical)과 반역사적(anti-historical)은 비슷하게 들려도 다른 개념이다. 비역사적이라 하면 역사에 대한 무관심, 무지를 말한다. 관심도 없고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과는 나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너는 어느 날 아침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란 표현은 비역사성에 대한 질타이다. 근본도, 뿌리도 모른다는 비난도 같은 뜻이다.
반역사적이라 하면 목적이 있어서 역사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경우이다. 반역사적 인물은 무식이 아니라 오히려 유식하다. 무엇을 역사 인식에서 빼내야 하고, 무엇을 과장해야 하는지 안다. 이런 경우 교활하다는 말을 듣는다. 일본의 조선 강점에 대한 이해는 비역사적이 아니라 반역사적이다. 나치즘 옹호도 비역사가 아니라 반역사이다.
트럼프는 역사를 자신이 목적에 맞추어 선택하고 재단해서 정치에 이용한다. 이민자들이 미국을 망하게 할 것이라는 사고, '관세=국부' 등식, 사회적 다양성의 백인에 대한 역차별이란 인식, 미국의 외교, 국가 정책에 동맹은 필요 없고 계산서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 미국을 상징하는 의회를 점령한 폭도를 '애국자 (patriots)'로 본 그의 시각. 이 모두 트럼프의 반역사성을 내비친다. (잠시 시야를 한국으로 돌리면, 한밤중 불법 계엄 선포를 '계몽'이라 주장한 뇌리도 반역사성을 보여준다.) 어쨌든 이렇게 뒤틀린 역사관을 가진 트럼프에게 왜 역사성이 강한 보통 사람들이 지지를 보내는가?
답은 미국의 제7대 잭슨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잭슨 이전 6명의 대통령을 만나본다. 조지 워싱턴(초대), 존 애덤스(2대), 토머스 제퍼슨(3대), 제임스 매디슨(4대), 제임스 먼로(5대), 존 퀸시 애덤스(6대) 대통령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로 생각을 깊이 하는 지도자들이었다. 몇은 당시 미국의 최고 지성이고 정치철학자란 평을 들었다. 초대부터 5대까지는 '건국의 아버지 (founding fathers)'라 불린다.
군인이었던 워싱턴도 고매한 인품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왕이 되어 달라는 간청을 물리치고 8년 임기 뒤에 권좌에서 내려온 인격자였고 선각자였다. 차이는 있지만 모두 미국인의 존경을 받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당시 이들은 애정의 대상이었을까?
잭슨도 영웅 소리를 들은 장군이었고, 또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는 머리와 인격이 아닌, 가슴과 주먹으로 나라를 다스린 인물이다. 이것이 정책과 정치의 차이다. 정책은 이성과 합리의 영역이고, 정치는 감성과 근성의 영역이다.
잭슨이 1828년 대선에서 이긴 존 퀸스 애덤스는 제2대 존 애덤스의 아들로 14세에 주러시아 미국 전권 대사의 비서 임무를 수행했다. 금수저 정도가 아니라 상아(ivory) 수저라 해도 된다. 잭슨은 14살에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됐다. (잭슨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직전 사망했다.) 미국의 독립 전쟁 당시 그의 어머니는 부상 당한 독립군 병사들을 돌보다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그녀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지 못한다. 부모의 보호와 거리가 멀었던 반항아 잭슨은 공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13살의 잭슨은 혁명군 연락병 역할을 하다 붙잡혀 고생했다. 잡혀있는 잭슨에게 영국군 장교가 구두를 닦으라고 명령하자 목숨 걸고 이를 거부한 소문난 반골이었다. 법률 사무소에서 보조 생활을 하면서 법을 익혀 변호사가 됐다. 한편 존 퀸시 애덤스는 하버드 대학 출신이고 아버지도 유명 변호사였다.
트럼프를 지성, 인격, 품위의 지도자로 바라보기는 어렵다. 그도 또 그의 추종자들도 잘 안다. 존경(respect)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하지만 애정(affection)의 대상은 가능하다. 존경은 긍정성에 기초한다. 프랑스어에 뿌리를 둔 개념인 애정 (affection)은 긍정과 부정성을 모두 아우르는 단어이다. 친밀감, 열정, 연민, 동정, 그리움 등 이성으로 형성되기 어려운 느낌이다.
트럼프는 주변의 사랑과 관심, 인정을 목말라 한다. 이를 위해 트럼프는 반지성과 비이성을 자극하고 동원한다. 그래서 지성과 이성의 상징들이 망쳐놓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외친다. 그의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고, 언어는 극히 자극적이며 정책은 충격 요법에 가깝다. 이런 트럼프에게 많은 사람이 열광도 하지만, 살짝 귀를 기울여 보는 이들도 많다. "사실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지만, 일종의 애정 어린 호기심을 느꼈다 (I wasn't actually in love, but I felt a sort of tender curiosity).” F.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속의 표현이다. MAGA를 간과해서 안 되는 이유이다.
트럼프와 그의 추종자들의 애정을 보이는 '보통 사람 시대 (The Age of Common Man)'의 상징 앤드루 잭슨. 그의 역사성을 미술 작품들을 통해 찾아간다.
화가들은 제7대 미국 대통령 앤드루 잭슨의 초상을 그리기 원했다. 그의 초상화는 역사 강의에도 도움이 된다. 잭슨은 소위 전형적인 미남이 아니다. 긴 얼굴에 흐트러진 머리, 이리저리 뻗어나간 두터운 눈썹, 크고 뾰족한 코. 그리고 말랐다는 느낌이 드는 얼굴의 주름은 그를 나이 들어 보이게 한다. 종합하면 잭슨은 평범한 백인 남성의 모습이다. 위의 두 초상화의 초점은 눈과 입이다. 그의 고집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굽힐 줄 모르는 잭슨의 성품은 보통 사람들에게 고매한 인품, 하버드 학위, 건국의 아버지 칭호가 줄 수 없는 그와의 일체감과 연대성을 가능케 한다.
아래 두 초상화를 통해 많은 미국인은 잭슨의 역사성을 확인한다. 꼿꼿한 자기 확신이다. 세상을 향해 올 테면 와보라 하는 눈초리를 느낀다. 잭슨은 무엇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 하기보다는 시대와 환경 속에서 그에게 들이닥친 역사의 요구에 응했을 뿐이라는 이해다. 서부(개척지) 출신, 유복자, 소년 혁명 전사, 포로, 고아, 독학, 전쟁영웅, 그리고 대통령. 흔한 말로 이제까지 이런 다양하고 인생의 굴곡이 느껴지는 키워드의 집합체는 미국 정치에 없었다. 굳어져 가는 엘리트 중심의 정치 구조에 반기를 든 보통 사람들의 희망으로 부상했다.
눈물의 길: "Nunahi-Duna-Dlo-Hilu-I (Trail where they cried)"
미국 동남부에 백인 사회가 개화된 부족이라 불렀던 다섯 원주민 공동체가 있었다. The Creeks, Chickasaws, Choctaws, Seminoles, Cherokees. 이 부족들은 '서부활극'에서 과장되게 그려지는 목초지와 사냥터를 찾아 돌아다니는 유목민 공동체가 아니었다. 광야나 숲속에서 수렵채집(狩獵採集)에 의존한 원시적 삶을 살지 않았다. 미개, 야만, 암흑 같은 편견은 침략과 침탈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다. 소위 '개화된' 다섯 원주민 공동체는 미국의 동남부 비옥한 땅에서 정착된 삶을 살았다. 위의 작품에서 보듯 옷차림부터 달랐다. 이게 화근이었다. 이들을 짐승과 인간 중간쯤에 있는 존재로 볼 수 없었다.
미국 동남부에는 물론 백인 사회가 있었다. 한곳에 정착해 규모 있는 농사를 짓고, 잘 조직된 공동체를 운영하는 영구성, 지속성이 있는 원주민 사회였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백인 사회와 격리되지 않은 경쟁 상대로 존재했다. 이때 남부는 노예제도를 통한 대규모 상업농으로 놀라운 부를 창출하고 있었다. 백인들은 원주민의 땅을 빼앗아 그리로 노예 농업을 확장하길 원했다. 1829년 대통령이 된 잭슨이 그 원을 들어주었다.
잭슨의 취임 다음 해인 1830년 원주민 강제 이주법(The Indian Removal Act)이 의회를 통과했다. '눈물의 길 (Trial of Tears)'의 시작이다. 미국에 꼭 필요한 만병통치약으로 잭슨이 묘사한 강제 이주의 혜택을 정리한다.
소수의 미개 사냥꾼이 차지한 넓은 지역으로 다수의 문명화된 인구가 옮겨갈 것이다. 북쪽으로는 테네시주와 남쪽으로는 루이지애나주 사이의 영토 전체를 백인 정착지로 개방하면 국토방위에도 도움이 된다. 미래에 외부의 침략을 받는다면 다른 지역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아도 적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이 지역은 강해질 것이다. 또 미시시피주 전역과 앨라배마주 서부 지역에서 조약을 요구하거나 백인들의 이동을 막는 인디언의 간섭에서 벗어나 인구, 부, 그리고 국력 모두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It will place a dense and civilized population in large tracts of country now occupied by a few savage hunters. By opening the whole territory between Tennessee on the north and Louisiana on the south to the settlement of the whites it will incalculably strengthen the southwestern frontier and render the adjacent States strong enough to repel future invasions without remote aid. It will relieve the whole State of Mississippi and the western part of Alabama of Indian occupancy, and enable those States to advance rapidly in population, wealth, and power."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강제로 이주하는 원주민들에는 무슨 혜택이 있나? 자신의 정책이 모두에게 '윈-윈'이라 주장하는 트럼프의 생각을 잭슨의 강제 이주의 합리화에서 만난다. 일단 원주민들을 백인들과 지역 주정부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런 후에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후진적인 통치 구조안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enable them to pursue happiness in their own way and under their own rude institutions.") 또, 정부의 보호와 선의의 조언(지도)으로 점차 야만적인 습관을 벗어던지고 흥미롭고 문명화된 기독교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다. ("under the protection of the Government and through the influence of good counsels, to cast off their savage habits and become an interesting, civilized, and Christian community.")
잭슨은 자신 있게 반문했다. 어느 제대로 된 사람이 발전된 도시와 마을, 또 번영하는 농장들이 자리 잡은 공간, 1200만 명이 행복한 자유, 문명, 또 신앙의 축복으로 가득한 광활한 공화국을 원하지 않는가? 그 대신 숲으로 뒤덮인 수천 명의 야만인의 나라를 선호할 것인가? ("What good man would prefer a country covered with forests and ranged by a few thousand savages to our extensive Republic, studded with cities, towns, and prosperous farms embellished with all the improvements which art can devise or industry execute, occupied by more than 12,000,000 happy people, and filled with all the blessings of liberty, civilization and religion?")
잭슨의 사고를 압축하면 'MAGbRI (Make American Great by Removing Indian!)'라고 할 수 있다. 원주민을 쫓아내 미국을 위대하게! 이렇게 1830년부터 10년이 넘게 약 10만 명 원주민이 5000마일을 걸어서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물론 옆으로 새지 못하도록 병사들이 이들을 호송했다.
위의 작품은 1838년에서 1839 사이에 강제로 끌려간 체로키(Cherokees) 원주민들의 모습인데 주로 말과 포장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이미지를 전한다. 하지만 원주민 대다수는 그 먼 길을 걸어야 했다. 아래 작품이 강요된 행군에 가까웠던 '눈물의 길'을 더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안거나 지고 가야 하는 짐은 클 수 없었다. 옷가지 정도가 전부였다.
'눈물의 길'에는 눈물에 비례하는 죽음이 있었다. 허기에 지치고, 병들어 길에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잭슨이 퇴임한 뒤에도 1840년대까지 원주민 강제 이주는 계속됐고, 모두 약 1만에서 1만5000명의 원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작품은 인류 역사에 흔한 집단 학살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학살의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죽으면 같은 피해자를 시켜 구덩이를 파고 묻게 했다. 가운데 말 위의 백인 병사는 '눈물의 길'을 따라 이동 중 사망한 원주민을 가족, 또는 이웃들에게 매장토록 명령한다. 지쳤다고 꾀부리지 말고, 제대로 깊게 파고 묻으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죽음을 새로운 여정의 시작으로 이해한 원주민 공동체들은 아래 사진에서 보듯 시신을 일단 공중에 안치하는 전통이 있었다. 백인 병사는 자신이 문명 세계의 매장 문화를 전수한다는 자부심이 느꼈을지도 모른다.
백인의 역사의식 속에 '눈물의 길'은 폭력과 갈취가 아니었다. 미국의 전진이고 문명의 진보였다. 미국인이 감당해야 할 운명이었다. 아래 작품 'American Progress (The Manifest Destiny)'가 이 사상을 형상화했다. 미국 역사를 강의할 때 이 작품을 분석하지 않는 교수는 테뉴어(교수직 평생 보장)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농담도 한다.
전진, 또 진보란 무엇인가? 보통 사람들이 서부(왼쪽)에 정착하기 위해 동부(오른쪽)를 떠나는 것이다. 이동 방식은 다양하다. 걸어서 가고, 말, 또 마차를 타고 가기도 하다. 기차와 배로도 이동한다. 각자 알아서 능력에 따라 개척지로 간다. 어떤 이들은 금을 찾기 위해 땅을 파는 데 쓰는 곡괭이를 어깨에 걸쳤다. 또 중간에 땅을 개간해 농사짓는 농부도 있다. 백인 사회에게 서부 개척은 선택이 아니다. 고민 또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명백한 사명(Manifest Destiny)' 아닌가? 이 사명의 결실은 백인의 관점에서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주거, 생산 공간의 확보이며 미국의 영토 확장이다. 하늘의 축복이라고도 했다.
백인들의 팽창은 여신의 수호와 안내를 받는다. 동기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백색 드레스를 입은 미국의 상징 Columbia는 오른손에는 교과서(지식)를 왼손에는 전깃줄(문명의 이기)을 잡고, 서부를 향해 날아간다. 날아감은 걸릴 것이 없다는 뜻이다.
개척 사상은 머지않아 '아메리칸 드림'이란 신화로 표현된다. 하지만 백인의 꿈은 원주민에게는 악몽이었다. 삶이 파괴됐다. 위의 작품에서 보듯 원주민들은 어디까지 개척자 또는 침략자들이 왔나 뒤를 돌아본다. 백인들의 '전진/진보'의 속도는 그들이 당해낼 수 없는 수준이다. 정착민들을 피해 가는 원주민들의 모습은 슬프다. 그들의 생존과 떼어 놓을 수 없는 노약자는 나무틀 위에 앉히고, 말이 끌게 한다. 백인들이 웃으며 말할 것 같다. "바퀴도 없는 집단!"
뒤에서 기차가 오는데 활을 들고 뛴다. 버펄로(물소)들도 그들을 사냥해 온 원주민들과 같은 방향으로 내달려야 했다. 백인들의 '전진/진보' 쓰나미 앞에서 원주민들은 함께 춤을 추면서 공동체를 확인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 외에는 대응책이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백인의 인종, 문화적 우월 사상을 확인 할 수 있다.
때로 밀려나지 않겠다며 버틴 원주민 부족들이 있었다. 전쟁이 불가피했다. 아래 작품이 원주민과의 전쟁에 임하는 미국의 국가 권력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화가 프레더릭 레밍턴(Frederick Remington 1861-1901)의 'On the Southern Plain"이란 작품이다. 미국의 남부 대평원에서 원주민들과 전쟁을 벌이는 미군 기마대를 그렸다. 레밍턴은 작품에 모티브를 설명하면서 "책임감이 영웅의 길(heroism is duty)"이란 말을 자주 했다. 잭슨의 주장대로 광활한 대지를 놀리고 있는 원주민 공동체를 전쟁으로 몰아내는 일이 곧 개척자의 나라 미국의 책임이고, 영웅적 행동이란 말로 들린다. 원주민 사회와 문화가 철하게 파괴된 역사를 보면, 꼭 틀린 말은 아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진보 보수를 떠나서 레밍턴 작품을 가까이 했다. 미국의 진취성을 표현한다고 했다. 2017 도널드 트럼프의 첫 임기 동안 서부 정복의 상징 카우보이는 원주민을 서부로 강제 이주토록 한 앤드루 잭슨 초상과 함게 배치했다. 그의 정신세계를 읽게 해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