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는 왜 우즈강으로 걸어갔나?

20세기 초 시작된 영국 지적 혁명의 중심

'의식의 흐름'과 페미니즘을 소설에 녹여

정신적 고통 겪으면서도 자유로웠던 영혼

천재 작가의 유산 현재 영국에 살아 있어

2025-07-01     김성수 시민기자

"나는 끔찍한 일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1941년 3월 28일, 버지니아 울프가 남편 레너드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의 한 구절이다.

 

영국의 여성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연합뉴스 자료사진

런던의 블룸스버리에서 시작된 혁명

버지니아 울프(1882-1941)를 단순히 '자살한 작가'로만 기억한다면, 그것은 셰익스피어를 '대머리 극작가'로 기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그녀는 20세기 초 런던 블룸스버리 지역에서 시작된 지적혁명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의 엄숙함이 공기처럼 무겁게 깔린 사회였다. 여성은 '천사 같아야' 하고, 소설은 '도덕적이어야' 히며, 예술은 '품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모든 '해야 한다'에 맞서 '왜 그래야 하는데?'라고 당당히 묻는 여성이 나타났다. 바로 버지니아 울프다.

'의식의 흐름'과 여성주의의 선구자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과 〈등대로〉 같은 작품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을 구사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보다가 갑자기 어제 먹은 김치찌개 생각을 하고, 그러다 초등학교 때 친구 생각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이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을 소설에 담아낸 것이다.

더 혁신적인 것은 그녀의 페미니즘이었다. 〈자기만의 방〉에서 그녀는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연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2025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3만 파운드, 우리 돈 5000만 원 정도다. '경제적 독립 없이는 창작의 자유도 없다'는, 지금 봐도 신랄한 통찰이다.

광기인가, 천재성인가?

하지만 울프는 평생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현재 기준으로는 양극성 장애로 진단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우울증과 조울증을 오갔고, 이런 상태에서도 놀라운 작품들을 써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광기'는 당시 영국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침묵과 순종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틀에 박힌 사회에서 자유로운 영혼은 언제나 '미친'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니까.

 

버지니아와 남편 레너드.

1941년 3월, 우즈 강에서의 마지막 산책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런던은 나치의 폭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울프의 런던 집도 폭격으로 파괴됐다. 59세의 울프는 또다시 찾아온 우울증의 파도와 전쟁의 공포, 그리고 노화에 대한 두려움이 겹치면서 절망에 빠졌다.

1941년 3월 28일,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돌을 넣고 집 근처 우즈 강으로 향했다. 남편에게 남긴 편지에서 그녀는 "당신은 나에게 가능한 최고의 행복을 주었다"고 썼다.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그녀는 시인이었다.

영국사회에 남긴 유산, 혁명은 계속된다

울프의 죽음은 영국 문학계에 큰 충격을 줬지만, 그녀의 영향력은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문학적 유산: 그녀의 '의식의 흐름' 기법은 현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함께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

페미니즘 운동: 1960년대 여성해방 운동가들은 울프를 재발견했다. 그녀의 〈자기만의 방〉은 여성주의의 고전이 됐고, '여성도 경제적 독립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주장은 현실이 됐다.

출판업계 혁신: 남편 레너드와 함께 설립한 호가스 출판사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독립 출판사였다. 이들은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의 독립출판 붐의 선구자 격이다.

정신건강 인식개선: 그녀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솔직한 기록들은 후에 정신건강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천재도 아픈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그녀의 글은 영국사회와 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여성의 자아, 글쓰기,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시대를 앞질렀다.

현재진행형인 울프의 영향

울프는 집에서는 지식인으로 존중받았지만, 사회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늘 뭔가를 '양보'해야 했다. 조용함과 소란 사이를 오가며 그녀는 점점 지쳐갔다. 세상의 소란스러움과 침묵 사이를 끝없이 왕복했고, 결국 그 진자 운동은 바로 우즈강에서 멈췄다.

울프가 남긴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그녀는 '페미니즘의 어머니'로 불리며, 여성의 독립과 자아에 대한 논의를 문학의 언어로 끌어올렸다. 2025년 기준으로도 버지니아 울프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BBC에서는 정기적으로 그녀의 작품을 각색한 드라마를 방영하고, 런던의 블룸스버리에는 그녀를 기리는 명판들이 곳곳에 붙어 있다.

이중감정자의 시선에서 본 울프

35년 영국 이민 생활자의 시선에서 보면, 울프는 우리보다 100년 앞서 '이중정체성'의 고통을 겪은 인물이다. 그녀는 빅토리아 시대에 태어나 모더니즘 시대를 살았고, 여성이면서 (당시에는 용인이 안 되는) 지식인이었고, 정신적 고통 속에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영국이 그립고, 영국에서는 한국이 그리운 내 마음을 버지니아 울프라면 이해했을 것이다. 그녀 역시 런던과 서식스 시골집을 오가며 '어디가 진짜 내 집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살았으니까.

왜 그녀는 죽어야 했나?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한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다. 개인적 고통, 시대적 한계, 사회적 압박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죽음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살아있는 우리에게는 더 큰 자유를 선물했다. 여성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유, 전통적 서사를 거부할 수 있다는 자유, 정신적 고통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를.

그러니 우즈강가에서 그녀의 마지막 발걸음을 생각할 때, 슬픔보다는 감사함을 느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용기 있게 살았고, 용기 있게 글을 썼고, 심지어 용기 있게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까.

"삶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버지니아 울프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다.

1924년 T. S. 엘리엇과 버지니아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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