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은 안동을 우습게 본다는 소안동(笑安東)”
의열단의 고향 밀양이 보수 고을로 바뀐 까닭(하)
안재구·신영복·장기표·김금수 등 사회운동가 배출
정권의 지역감정 조장으로 영남 보수색채 굳어져
이재명 후보 밀양 득표율은 경남 8개 시 중 최저
저항과 투쟁의 전통은 해방 후에도 면면히 이어져 밀양은 진보적 사회운동가를 여럿 배출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의 안재구(1933~2020), 인민혁명당(인혁당)의 김금수(1937~2022), 통일혁명당(통혁당)의 신영복(1941~2016), 민중당의 장기표(1945~2024) 등이 대표적이다.
안재구가 자서전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에서 회고한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연계소(蓮桂所)에서 시작한다. 그는 1899년 고조부가 밀양 유림들과 힘을 모아 재건한 연계소에서 자랐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연계소에서 태동한 애국계몽단체 신간회와 근우회가 모두 해체된 뒤였으나 연계소는 여전히 주민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 책에는 “우리들 다섯 동무가 모여서 얘기하는 화제 중에는 독립군 얘기도 있었다. (중략) 둔갑술을 한다는 김원봉 장군 얘기와 백두산에서 축지법을 하면서 왜놈 군대를 무리죽음시키고 있다는 김일성 장군 얘기, 그리고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는 의열단 얘기들이었다”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안재구는 세계 수학자들 탄원 덕에 사형 면해
할아버지(안병희)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과 신간회 밀양지회 총무간사 등을 지내다 옥고를 치른 뒤 해방 후 밀양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작은할아버지(안병제)는 상동면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아버지(안의환)도 선각자여서 안재구는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1947년 14세의 나이로 노동절 집회에 참석했다가 밀양중에서 퇴학당하고 이에 항거하다 구속됐다. 이듬해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2·7 총파업에 참여했고 남조선로동당 밀양군당 연락원 겸 농민위원회 조직지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경북대에서 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1960년부터 경북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6·3 항쟁과 반유신 투쟁 등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1976년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 동국대를 거쳐 숙명여대 수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가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세계 각국 수학자들이 한국 정부와 재판부에 항의와 탄원 편지를 보낸 덕분에 2심에서 무기로 감형됐고 1988년 가석방됐다. 1994년에는 구국전위 간첩단 사건으로 아들(안영민)과 함께 투옥돼 또다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가 5년 만에 특사로 풀려났다. 2012년에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신영복은 육사 재직 중 통혁당 사건으로 투옥
신영복은 초등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밀양중과 부산상고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를 다니던 중 2학년 때 4·19 혁명을 맞았다. 시위에 참여하긴 했으나 주동자는 아니었다. 경제학과 소모임 경우회, CCC(한국대학생선교회) 산하 경제복지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상과대 교지 ‘상대평론’ 편집위원과 ‘상대신문’ 기자로도 필봉을 휘둘렀다.
대학원에 진학해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고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 강사를 거쳐 1966년 육사 교수(중위)로 부임했다. 2년 뒤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1심과 2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중앙정보부가 부풀린 수사 발표에 따르더라도 그는 통혁당 핵심 간부가 아니었고 역할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현역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군대에 조직을 침투시키려고 했다는 혐의가 추가돼 중형을 피하지 못했다.
3심에서 무기로 감형돼 20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1988년 출소 직후 옥중서간을 엮어 출간한 수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하며 저술가 겸 사상가이자 서예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어깨동무체’로 불린 그의 글씨는 교보문고 입구와 국립현충원 홍범도 묘비 등에 남아 있다. 소주 상표에도 쓰였으나 윤석열 정부 때 교체됐다. 1998년 펴낸 세계 기행집 제목 ‘더불어 숲’은 더불어민주당 당명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정계 입문 후 학생 때의 신념 지키지 못한 장기표
장기표는 마산공고와 동국대 법학과를 거쳐 1966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0년 법과대 학생회장 시절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나자 시신이 안치된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 찾아가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난 뒤 서울대에서 학생장을 치렀다.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등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으로 9년간 옥고를 치르고 12년간 지명 수배돼 도피 생활을 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재야세력이 결집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이끌다가 이재오·김문수와 함께 민중당을 창당해 정계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국회 입성에는 연거푸 실패했고 2020년 보수 정당인 미래통합당에 합류했다.
김금수는 부산고 재학 시절부터 이념써클 ‘암장’에서 활동하다가 4·19 혁명 후 민주민족청년동맹 중앙맹부 간사장을 맡았다. 1964년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됐으나 무죄 선고를 받아 풀려난 뒤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한국노총 연구위원과 정책실장 등을 거쳐 한국노동교육협회 대표,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과 이사장, 전태일 기념사업회 이사장, 민주노총 지도위원, 노사정위원장, KBS 이사장, 민주노동당 고문,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상임고문 등을 역임했다. 2006년 ‘세계노동운동사’ 6권을 완간했다.
“우리가 남이가” 정신으로 보수 정당 텃밭된 밀양과 대구
이처럼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성향의 인사를 줄줄이 배출하고도 정작 밀양의 민심은 차츰 보수화의 길을 걸었다. 이는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의 색채가 짙던 대구가 불과 20여 년 만에 ‘보수의 심장’으로 변모한 과정과 비슷한 양태를 띤다.
첫째 계기는 6·25 전쟁이다. 낙동강 전선을 경계로 동남쪽은 인민군 치하를 겪지 않았다. 나머지 지역은 북한의 인민군과 남한의 국군이 번갈아 점령하며 뒤바뀐 체제를 경험했다. 대구와 밀양 모두 동남쪽에 속하고 외지인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둘째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 등 보수(수구) 정치인을 잇따라 배출한 영향도 적지 않다. 호남의 친김대중 성향이나 충청의 친김종필 정서처럼 고향 사람을 지지하려는 경향은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정치권이 지역감정을 활용한 선거 전략을 채택하며 이를 고착화했다는 점이다. 1971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가도를 위협하자 정부와 여당은 “김 후보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이른바 색깔론을 제기하고 “전라도에 대항해 경상도가 뭉쳐야 한다”는 등 지역감정을 부추겨 승리했다.
이후로도 영남 보수 정당은 유권자 수에서 호남에 우위를 보이는 점을 십분 활용해 호남을 소외시키고 소위 “우리가 남이가” 정신으로 영남 표를 결집시키는 선거 전략을 애용해왔다. 1987년 대선에서의 ‘1노 3김’ 4자 구도 형성, 1992년 대선 때의 초원복국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체질 개선이나 새로운 의제 개발 등을 통한 확장 노력 없이 지역감정을 이용한 전략을 답습하다 보니 영남 표를 지키는 대신 다른 지역 표가 줄어들어 영남 보수 정당의 뿌리를 이은 국민의힘은 ‘영남 자민련’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 있다.
‘극우 발언’ 김용갑이 수구 동네 이미지 덧칠
밀양 역시 이 같은 과정을 밟아오며 보수 성향이 굳어졌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남이지만 정서는 대구 쪽에 가깝다. 경남 합천 출신의 전두환이나 창녕 출신의 홍준표도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밀양은 거리상으로 대구와 부산의 딱 중간이지만 대구가 교육도시로 더 이름나 대구로 유학한 밀양 출신 인물이 적지 않다. 이에 따라 대구의 급격한 보수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가 손꼽히는 야당 도시였듯이 밀양도 농촌 지역치고는 야성이 강한 편이었다. 민주당 계열의 박일은 1971년부터 8·9·10·12대에 걸쳐 밀양에서 4선 고지에 올랐다(9·10·12대는 동반 당선). 그러나 소선거구제로 환원된 뒤에는 보수 정당의 텃밭이 됐다.
여기에 ‘보수의 아이콘’을 자처하며 극우 강성 발언을 서슴지 않은 육사·안기부 출신의 김용갑이 이곳에서 무소속과 한나라당 소속으로 1996년부터 15~17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돼 ‘수구 동네’라는 이미지를 덧칠했다. 그는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9년 ‘좌파 세력 척결’을 주장하며 총무처 장관 자리에서 자진 사퇴하는가 하면 2000년 국가보안법 개정을 추진하던 여당 새정치국민회의를 ‘조선노동당 2중대’라고 공격해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밀양시장은 2006년 엄용수가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당선됐다가 나중에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긴 것을 제외하면 모두 보수 정당 혹은 보수 성향 무소속의 차지였다. 경남지사 선거에서도 밀양 표심은 줄곧 보수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2010년과 2018년 무소속 김두관과 더불어민주당 김경수가 각각 당선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밀양 보수세 여전히 강고하지만 서서히 변하는 중
대선에서도 민주당 계열은 밀양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14대와 15대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은 각각 7.57%와 10.13%에 그쳤다. 16대에서 노무현이 26.82%로 끌어올렸다가 17대 정동영은 12.01%로 주저앉았다. 문재인은 18대와 19대에서 각각 29.94%와 29.68%를 얻었다. 21대 들어와 이재명이 31.51%를 득표해 처음으로 30% 선을 돌파했다.
지난 6·3 대선에서 밀양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 각각 60.24%와 33.42%의 지지를 보냈다. 민주당 계열 대선 후보 가운데는 가장 많은 표를 얻었으나 경남 8개 시 가운데서는 가장 낮은 득표율이었고 김 후보와의 격차도 가장 컸다.
여전히 보수 지지세가 강고해 보이지만 그래도 달라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부산·울산·경남 전체의 민주당 지지율이 처음으로 40%를 넘어섰고 경남 가운데서는 김해와 거제에서 국민의힘을 눌렀다. 밀양의 표심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밀양과 안동은 영남 항일운동의 양대 성지
이황·김성일·류성룡 등을 배출한 경북 안동은 맹자와 공자가 태어난 곳을 빗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불린다. 밀양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 유학자가 많이 나와 안동과 함께 영남의 2대 유향(儒鄕)으로 꼽힌다. “작은 안동”이란 뜻의 ‘소안동(小安東)’이란 별칭도 얻었다. 학통으로 따지면 이황 등은 김종직의 제자뻘이다. 그래서 밀양 사람들은 “안동을 우습게 본다”는 뜻으로 ‘소안동(笑安東)’으로 고쳐 부른다. 그만큼 자부심이 높다.
안동은 우리나라에서 독립유공자를 가장 많이 낳은 고장이다. 한일 강제병합 직후 가산을 팔아 만주로 이주한 이상룡 일가를 비롯해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안옥윤(전지현)의 실제 모델인 남자현 등 392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저항 시인으로 잘 알려진 이육사(본명 이원록), 김시현·김정현 형제, 권정필, 류병하, 류시태 등이 의열단에 가입해 김원봉의 동지가 됐다.
이재명 당선으로 이제 안동은 대통령을 배출한 고을이 됐다. 안동과 함께 2대 유향이자 영남 항일운동의 양대 성지로 꼽히는 밀양에서도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까? 먼 미래의 일이 아니길 기대해본다.